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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식카페 게재 일자 : 2021년 10월 08일(金)
빚은 유휴상태 富의 배분… 채권·채무 한쪽만 편들면 사회질서 무너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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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 = 이철형 작가

■ 김태환의 이야기철학 - (17) 이솝우화 ‘암퇘지와 염소’

채권자 ‘갑’· 채무자 ‘을’ 항상 성립안돼… 빌려준 뒤 못받을 위험 감수해야 하는 채권자가 때론 약자일 수도
빚은 빌려주면 갚아야 하는 교환관계의 산물… 건전하고 생산적으로 작동할 때 사회 전체 복지 향상시켜


아테네에서 어떤 남자가 빚을 졌는데, 상환 기일에 돼도 갚을 돈이 없었다. 독촉하는 채권자에게 유예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하고,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유일한 재산인 암퇘지를 채권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팔려고 내놓았다. 그는 지나가던 사람에게서 암퇘지가 새끼를 낳을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당연히 새끼를 아주 잘 낳을 수 있다고 장담하면서, 심지어 엘레우시스 비의 때는 암컷을, 판아테나이아 축제 때는 수컷을 낳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물어본 사람이 깜짝 놀라자 이번에는 채권자가 나서서 더욱 놀라운 암퇘지의 비밀을 밝혔다. “그 정도로 놀라기엔 이릅니다. 디오니소스 축제 때는 이 암퇘지가 새끼 염소를 낳아줄 겁니다.”

이 이솝우화의 재미를 충분히 느끼기 위해서는 여기 열거된 아테네의 제의에 대해 간단히 몇 가지 사항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엘레우시스 비의는 곡물의 여신 데메테르와 그녀의 딸 페르세포네를 기리는 축제로 매년 10월에서 11월에 열렸으며, 이때 암퇘지를 제물로 바쳤다. 판아테나이아 축제는 아테네 여신의 탄생을 기리는 축제로 그 시기는 매년 7월 말이며, 수퇘지가 제물로 바쳐졌다. 디오니소스 축제는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를 기리는 축제이며 매년 3월 말에 열렸는데, 여기서는 디오니소스를 상징하는 동물이기도 한 새끼 염소가 제물이 됐다. 그러니까 채무자는 암퇘지를 잘 팔기 위해서 그 녀석이 축제 때마다 필요한 대로 암퇘지면 암퇘지, 수퇘지면 수퇘지를 척척 낳을 수 있다고 허풍스러운 주장을 해 물어본 사람을 놀라게 한 것이다. 그래도 채무자는 돼지가 돼지를 낳는다는 근본적인 자연법칙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지만, 채권자는 그 최소한의 선마저 넘어버린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제물로 새끼 염소가 필요한 디오니소스 축제 때가 되면 암퇘지는 새끼 염소도 낳아줄 것이다. 그것은 채무자의 허풍보다도 더 황당무계한 주장이지만, 어쨌든 암퇘지가 축제 때 필요한 제물을 낳는다는 채무자의 논리를 일관되게 밀고 나가서 얻어낸 결론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암퇘지를 팔기 위해 채권자가 채무자보다 더 큰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채권-채무 관계의 본질적 특징과 관련이 있다. 그 특징이란 무엇인가?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는 쌍방이 서로 주고받는 일종의 교환관계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교환관계에서 핵심적인 것은 시간 지연이다. A와 B 사이의 교환관계에서 A가 B에게 먼저 주고, B가 A에게 나중에 준다면 첫 번째 수수행위의 시점과 두 번째 수수행위의 시점 사이에 채권-채무 관계가 발생한다. 먼저 준 A는 장차 B에게서 받을 권리를 가지기에 채권자가 되고, 먼저 받은 B는 A에게 줄 의무를 지기에 채무자가 되는 것이다.

교환이란 것은 이처럼 두 차례의 수수행위를 필요로 하는 것이고, 그 두 행위가 완벽하게 동시에 이뤄지기는 어렵기 때문에, 대부분의 교환 과정에서 비록 짧은 시간이나마 채권-채무의 관계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식당에서 주문한 음식이 나오면 손님에게는 음식값을 지불할 의무가 생긴다. 많은 식당에서는 손님이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떠날 때까지 이 채무를 유예해준다. 물론 우리는 상식적으로 식당에서 식사하는 손님들을 채무자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다만 손님이 통상적인 지불의 기한을 지키지 못하고 외상 장부에 이름을 올리고 식당을 떠난다면, 그때부터는 손님이 식당 주인에게 빚을 진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니까 교환 과정이 관습적으로 정해진 시공간적 한계 안에서 완결되지 못하고 두 번째 수수행위가 더 지연되는 경우에야 채권-채무 관계가 성립한다는 것이 상식적 관점일 것이다. 그러나 관계의 구조적 측면에서는 손님이 식당에서 밥값을 해결하든 외상을 진 뒤에 일정 시간 후에 지불하든 차이가 없다. 식당에서 성립하는 교환관계는 주인이 먼저 주고 손님이 나중에 갚는 관계이며, 잠시나마 주인은 채권자의 입장에, 손님은 채무자의 입장에 서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본격적으로 채권-채무 관계라고 부르는 것은 밥을 먹고 돈을 내는 교환 과정의 불가피한 시간차 때문에 그 부산물로서 발생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역으로 오직 시간차 때문에 교환의 의미가 발생하는 것이 본격적 채권-채무 관계의 특성이다. 돈을 꾸고 갚는 일, 보리쌀을 꿨다가 돌려주는 일이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면 여기에는 교환의 의미가 있을 수 없다. 같은 것으로 같은 것을 바꾸는 것이기에 무의미한 교환이 된다. 교환은 서로 다른 것을 바꾸는 일이며, 돈을 꾸고 갚는 일이 교환이 되는 이유는 지금의 돈과 일정 시간 뒤의 돈 사이에, 지금 당장의 보리쌀과 보름 뒤의 보리쌀 사이에 중대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채권자와 채무자라는 말을 들으면 전자를 강자로, 후자를 약자로 상상하기 쉽다. 그런데 지금 살펴본 교환의 구조 자체만을 놓고 보면 채무자가 오히려 유리하고 우월한 입지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채권자는 먼저 내주고 나서 일정 시간 뒤에 준 것을 돌려받기를 기대하는 사람이다. 채권자의 기대는 긴장과 불안을 동반하는 기대이다. 채무자가 의무를 이행하지 않거나 할 수 없는 처지에 빠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채권자가 된다는 것은 선불을 하고 그 대가를 돌려받지 못할 위험을 감수한다는 의미다. 반면 채무자는 그런 부담이 없다. 채무자는 자기 몫을 먼저 확실하게 확보하고 후불의 의무를 질 뿐이다. 동일한 가치를 주고받는 등가교환의 관계라면 후불이 무조건 이득이다.

일방적으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채권자는 보호장치를 필요로 한다. 이솝우화 가운데는 채권자의 불안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수사슴이 양에게 와서 밀을 좀 꿔달라고 한다. 수사슴이 얼마나 빠른지 아는 양은 보증인을 세워야 한다고 말한다. 늑대가 보증을 서주기로 했다는 수사슴의 대답에 양은 펄쩍 뛰며 대꾸한다. “뭐든지 가져가고 갚을 줄 모르는 늑대를 믿으라고? 네가 빠른 다리로 달아나면 나는 빚을 누구한테 돌려받지?” 이 우화는 남에게 뭔가를 빌려주려면 교환 구조에서의 불리함을 상쇄하기 위해 사회적 보호 장치(보증 제도)가 필요하다는 것, 그런데 이 역시 궁극적으로 물리적 힘으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힘이 없는 자는 채권자가 돼서는 안 된다.

아테네의 채권자는 양처럼 무력한 존재는 아니다. 그는 빚을 기한 안에 돌려받지 못했을 때 채무자를 손아귀에 넣고 괴롭힐 수 있고 그가 가진 마지막 재산을 팔도록 강요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권자는 필요한 돈을 되찾지 못할 위험에 직면해 있다. 채무자에게 정말 돈이 없다면 별 뾰족한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테네의 채무자에게는 그나마 암퇘지라도 있어서, 암퇘지로 채무를 변제할 가망성이 남아 있다. 그는 상품의 가치를 터무니없이 부풀리면서까지 암퇘지를 팔아보려고 노력한다. 그래야 채권자에게 시달리는 신세라도 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왕 빚 독촉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암퇘지를 파는 것이 그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절박한 문제일 수는 없다. 암퇘지를 팔아도 그 대금은 채권자에게 돌아갈 것이고, 못 판다면 아마도 채권자에게 암퇘지를 빼앗기고 말 것이다. 그래도 채무자는 빚을 얻어서 이미 썼기에 어떻게 되더라도 손해를 보는 입장은 아니다. 그는 분명 어려운 처지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적어도 채권자와의 교환관계에서 손해를 감내하는 입장은 아니라는 것이다. 반면 채권자에게는 암퇘지를 팔아서 돈으로 만드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다. 그래야만 그는 겨우 빌려준 돈을 돌려받아서 손실을 입지 않게 된다. 그러한 다급한 심정이 암퇘지가 염소 새끼를 낳을 수 있다는 황당무계한 거짓말에서 드러난다. 채무자의 거짓말보다 채권자의 거짓말이 강도가 훨씬 더 센 것은 빚을 갚아야 할 절박함과 빚을 받아내야 할 절박함 사이의 격차를 반영한다. 그리고 이러한 격차는 궁극적으로 채권-채무 관계의 비대칭적 교환 구조에서 기인한다.

수사슴과 양의 우화나 아테네의 채무자에 관한 우화는 채권-채무 관계가 사적인 방식으로 조정되는 세계를 그리고 있다. 빚을 받아내는 일이 순수하게 채권자 개인에게 맡겨질 경우 수사슴처럼 당장 먹을 것이 필요하더라도 빚을 얻기가 어려워질 수도 있고 처음 약속과 달리 받을 수 없게 된 빚을 받아내려는 노력이 제3자를 속이는 새로운 거짓된 약속(암퇘지가 새끼 염소를 낳을 것이라는)을 낳게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사회는 공적인 차원에서 채무자를 압박함으로써 전반적으로 채권자를 보호하는 장치를 발전시켜 왔다. 빚을 갚지 않으면 경제적 활동을 극히 어렵게 하는 신용불량자 제도가 그러한 예이다. 이솝우화 가운데 돈을 빌려 해상 무역에 투자했다가 배가 난파하는 바람에 파산 상태가 된 박쥐가 채권자들이 두려워 밤에만 다니게 됐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빚을 갚지 못한 채무자가 사회의 음지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오늘의 현실에 대한 은유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채권-채무 관계가 사적인 차원의 문제로 방치될 경우 반대 방향의 부작용도 있을 수 있다. 채권자가 사회적으로 우월한 지위나 권력을 이용해 경제적으로 어려운 채무자에게 과도한 이자를 요구하는 횡포를 부리거나 빚을 갚지 못하는 경우 폭력을 행사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실제로 고대 아테네에서는 빚을 갚지 못한 사람이 채권자의 노예가 돼 노예 노동으로 빚을 갚아야 하는 가혹한 일들이 있었다. 유명한 솔론의 개혁 가운데 중요한 사항이 바로 채무의 탕감과 채무 노예의 해방이었다.

여기서 인간 사회는 채권자의 보호와 채무자의 보호라는 두 가지 대립적인 과제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채무자의 보호에만 치우친다면 기본적인 교환의 정의가 침해되고 이에 따라 장기적으로 빚을 얻는 일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다. 채권자의 보호에만 치우친다면 불가피하게 빚을 갚지 못하게 된 채무자들이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빚이란 인간 사회에서 그 누구라도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불가피한 위험 요소, 즉 일종의 필요악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더 나아가서 -‘빚의 철학·The Philosophy of Debt’의 저자 알렉산더 더글러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사회 전체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생산적 기관으로서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빚은 사회 전체의 관점에서 볼 때 유휴 상태에 있는 부를 당장 필요한 부분에 돌아가게 함으로써 부의 생성과 소모 사이의 시간적 간격을 단축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중요한 전제는 빚이 도박빚과는 달리 생산적으로 사용돼야 한다는 것이다. 빚이라는 사회적 기관이 건전하고 생산적으로 작동하도록 관리하는 것은 국가와 공동체의 중요한 책무 가운데 하나다. 특히 오늘날처럼 국가 자신이 가장 대표적인 채무자로 부상한 시대에는 국가의 책임이 그 어느 때보다 막중하다고 할 수 있다. 국가는 얼마나 좋은 빚쟁이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 용어설명

엘레우시스 비의
엘레우시스는 아테네 북서쪽에 위치한 도시 이름인데, 매년 혹은 5년 주기로 지내는 엘레우시스 비의는 곡식과 수확의 여신인 데메테르와 그의 딸인 페르세포네를 숭배 대상으로 둔 제례다.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납치하자 데메테르는 충격에 빠져 모든 일을 놓아버린다. 이에 흉작과 기아가 지속되자 제우스가 나서 딸을 돌려보낸 후 다시금 대지의 작물들이 살아났다는 이야기가 기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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