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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김병종의 시화기행 게재 일자 : 2021년 10월 12일(火)
눈앞에 펼쳐진 ‘책의 바다’…“인류 문명은 종이서 나왔다” 실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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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병종, 어머니의 책, 27×19㎝, 혼합재료에 채색.


■ 김병종의 시화기행 - (91) 더블린 트리니티대학 롱룸 도서관

아일랜드 最古 트리니티대학
옥스퍼드·케임브리지 견줄 명문
수많은 노벨상 수상자 배출

목조건물 오히려 초현실적 느낌
서가의 책들 모두가 예술작품

인간의 삶이 계속되는 한에는
쓰는 행위 역시 계속될 것 확신


열서너 살 무렵에 떠오르는 내 ‘행복’ 지도 하나. 사면이 책으로 둘러싸인 헌책방. 밖에는 흰 눈이 소담하게 내리는데 푹푹 끓는 무쇠 난로 위의 주전자. 그리고 그 곁에서 의자에 앉아 발을 까딱이며 책을 보던 서점집 여자아이. 그 헌책방을 지나칠 때면 생각하곤 했다. 언젠가 나도 사면이 책으로 둘러싸인 곳에 살고 말 거야. 천장에 닿도록 책을 쌓을 거야. 세상의 책이란 책은 다 모아서 그렇게 쌓아놓고 그 안에서 살 거야. 그토록 책 가난에 허덕여서 닥치는 대로 빌려다 읽곤 했지만 그래도 허기는 채워지지 않았다. 아, 아 마음껏 읽을 책이 쌓여 있는 도시에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곤 했다. 그림을 그리면서 지난 반세기 동안에 허겁지겁 책을 끌어모았던 것도 생각해 보면 그 채워지지 못한 갈증과 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집의 사면이 책으로 채워졌을 때쯤 문득 잊고 있던 한 소년이 떠올랐다. 책 가난에 허덕이던 그 옛날의 소년. 내가 모은 책들을 모두 그에게 주기로 했다. 3000권이 넘는 책을 내가 자랐던 고향 도시로 보냈다. 그것은 옛날의 그 아이에게 보내는 나의 선물이자 스스로에게 하는 보상인 셈이었다.

내일이면 더블린을 떠난다. 아일랜드 버킷리스트의 맨 마지막은 트리니티대학 도서관인 롱룸이다. 그곳은 내게 환상과 실재 사이에 있는 그 무엇이었다. 롱룸을 처음 TV 화면을 통해 본 것은 20년이 넘는 것 같다. 엄청나게 큰 오크통을 뉘어놓은 것 같은 그 길고 웅장한 모습은 거의 초현실적이었다. 세월의 더께가 앉은 오래된 그 궁륭의 목조건물은 역설적이게도 마치 최신식 컴퓨터 그래픽으로 연출한 것처럼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세상에 저런 곳이 있었던가 하며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내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지척인 더블린의 오코넬 거리(O’Connell St.)는 우리나라로 치면 멀리 남대문이 보이는 세종로라 할 만하다. 파리라면 개선문을 향해 뻗어 있는 샹젤리제와 같다고 할 만큼 아일랜드 역사와 문화의 심장부다. 그곳에는 아일랜드 민족주의의 상징인 대니얼 오코넬(Daniel O’Connell·1775~1847)의 동상이 있고 길의 북쪽 끝에는 역시 독립운동의 리더인 찰스 스튜어트 파넬(Charles Stewart Parnell·1844~1891)의 동상이 금색 하프를 배경으로 서 있다.

▲  김병종 교수가 트리니티대학 올드라이브러리 롱룸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리고 ‘빛의 기둥’으로 불린다는 뾰족한 첨탑이 있는데, 오갈 때마다 동상들 사이의 이 거대한 바늘 같은 뾰족 오브제가 생뚱맞아 보인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나는 리피(Liffey)강 가까이에 있는 트리니티대학의 정문으로 들어선다. 이 나라 최고(最古)의 대학은 그러나 백화점처럼 사람들로 붐비는 중심가 큰길 쪽으로 정문이 나 있다. 1592년에 세워졌다는 이 대학에서는 그간 수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고,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에 비견될 정도의 명문이라지만 이 대학이 그토록 유명해지게 된 것은 좀 다른 이유에서였던 것 같다. 예컨대 인류 문화유산 중 가장 아름다운 책의 하나로 꼽힌다는 ‘켈스 복음서(The Book of Kells)’와 오래된 도서관 ‘롱룸’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

켈스 복음서는 전도용으로 옛 수도사들이 혼신을 다해 기도하듯 만든 것이라 하는데 그림을 그리는 내 입장에서는 그 아름다운 색채들의 세밀화와 현대적 감각의 디자인에 절로 감동하게 된다. 그리고 켈스 복음서의 방을 돌아 2층으로 올라가면 눈앞으로 펼쳐지는 광경은 시야를 압도할 만큼 장엄하고 드라마틱하다. 그 옛날 TV에서 보던 바로 그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새삼 아일랜드 문화의 저력에 대해 경외의 마음을 품게 된다. 중앙 통로는 전 세계에서 몰려온 듯싶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데 책의 기(氣)에 눌려서일까, 놀랍게도 그 인파의 흐름이 정중동으로 움직이며 별 불편함을 모르게 된다. 이 웅장한 목조에 꽂혀 있는 서가의 책들은 모두가 장정 하나하나 장인(匠人)의 손을 거쳐나온 예술작품인 듯 보인다. 책의 바다에 둥둥 떠다니면서 인류 문명과 종이 문화의 길고 오래된 관계를 새삼 떠올리게 된다. 오래전 어떤 아티스트는 장차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종이는 화장실에서나 필요할 것이라고 일갈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종이와 인간의 동행 역사에 대해 몰랐거나 일부러 모른 척한 데서 나온 멘트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롱룸에 머물다가 밖으로 나오니 마치 거대한 왕릉으로부터 나온 듯, 햇빛이 쏟아지는 순간 가벼운 현기(眩氣)로 아찔하다.

벤치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지나가는 한 줄의 생각. 인간의 삶이 계속되는 한 쓰는 행위 역시 계속될 것이다. 그것도 종이 위에 쓰는 행위가….

화가, 가천대 석좌교수


중앙 통로만 65m 달해…9세기초 필사본 ‘켈스 복음서’ 소장

현존하는 가장 아름다운 고서(古書)로 꼽힌다는 트리니티대학 소장의 ‘켈스 복음서’는 9세기 초 스코틀랜드 아이오나(Iona) 지방의 수도승 등이 복음 전달을 목적으로 만들었다는 필사본 성서다. 페이지마다 켈트족만의 독특한 아름다움과 예술미로 담아낸 정교하고 화려한 삽화가 그려져 있다. 특히 그 그림들이 식물성 자연 채색에서부터 미세한 원석 암채, 심지어 동물에서까지 추출한 채색들로 이뤄짐으로써 회화의 재료사 연구에도 귀중한 문헌이 되고 있다. 세밀화 중에서는 확대경을 써야 보일 수 있을 정도의 그림까지 있다. 켈스 복음서의 전시관 끝 2층으로 올라가면 드라마틱하고 엄청난 규모의 구 도서관 롱룸이 나타나는데 1812년부터 20여 년에 걸쳐 지어졌다는 이 목조 건물의 도서관은 중앙 통로 안도 무려 65m다. 고서의 진열장 앞으로 세네카를 비롯한 역대 석학들의 대리석 흉상이 있고, 1층 중앙 홀에는 오늘날 기네스 맥주의 로고가 된 오래된 하프가 진열돼 있다. ‘롱룸’은 영화 ‘스타워즈 2 : 클론의 공격’에 나오는 제다이 아카이브(Jedi Archives)의 모티브로 사용되는가 하면 2013년 CNN이 선정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에 2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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