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와 시각>北 양면책 늪에 빠진 文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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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정치부 차장

올해 초 배우 서예지가 남자친구였던 김정현을 조종했다는 의혹이 불거진 뒤 타인을 심리적으로 지배해 조종하는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라는 말이 주목을 받았다. 가스라이팅은 1938년 연극과 1944년 영화화로 세계 명작 반열에 오른 ‘가스등’에서 기원한다. 연극에서 윗집 여성을 살해한 남편은 밤마다 보석을 찾으러 윗집에 올라간다. 가스등을 켜고 물건을 뒤질 때마다 아랫집 가스등은 어두워지고 천장에서는 부스럭 소리가 난다. 남편은 이를 이상하게 여기는 부인을 과민반응으로 몰아간다. 자신의 인지능력과 판단력을 믿지 못하게 된 부인은 모든 것을 남편에게 의존하는 심리적 늪에 빠지게 되는 내용이다.

최근 북한의 잇단 담화와 미사일 발사 등에 반응하는 문재인 정부를 보면 이런 늪에 빠진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북한은 지난달 15일 우리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시험 발사일에 맞춰 철도기동미사일 연대의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를 했다. 또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은 이날 ‘도발 억지력’을 언급한 문 대통령을 “우몽하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이 22일 유엔총회에서 종전선언을 제안하자 김 부부장은 24일 담화에서 “종전선언은 좋은 발상”이라며 호의적 반응을 보였다. 다만, 이중적인 기준과 적대시 정책 폐기를 조건으로 내걸었다. 25일 담화에서도 자신들이 폭파한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재설치와 남북 정상회담 가능성을 내비치면서 이중 기준과 적대시 정책 폐기를 재요구했다. 대화 분위기를 피우던 북한은 28일 극초음속미사일을 시험 발사해 긴장을 일으키더니 29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을 통해 “10월 초 남북 통신연락선을 다시 복원할 의사”를 표명했다. 이어 30일에 신형 지대공미사일을 발사하는 도발을 하고 나흘 뒤인 4일에 통신연락선을 복원했다. 이 일련의 과정은 북한의 전형적인 냉온 전략과 한·미 동맹 흔들기다. 종전선언 카드를 내놓으며 대화에 매달리는 한국 정부더러 미국 정부에 대북 제재 완화를 설득하라는 압박이다. 여기에 한·미 연합훈련 중단과 전략무기 배치 중단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지금 문 정부는 연락선 재단절 카드를 내세운 북한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다. 북한의 잇단 도발에도 문 대통령은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 ‘북한’이라는 단어 자체를 꺼내지 않았다. 김 위원장과 김 부부장의 담화에 발목이 잡혀 북한의 핵·미사일 고도화 움직임에 한마디 말도 못하는 상황을 맞은 것이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한 발 더 나가 지난달 23일 워싱턴포스트(WP) 인터뷰에서 미국 정부에 “대북 인센티브를 구체적으로 밝히라”며 양보를 요구했고, 1일 국회 국정감사에서는 “(대북) 제재 완화도 검토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북한을 압박해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려는 국제사회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다. 동맹 외교나 국가 안보가 흔들리는 것도 안중에 없는 분위기다. “북한과 관련해 ‘미친 짓’의 정의는 그저 대화를 시작하는 특권을 누리려고 북한에 양보하는 것”이라는 허버트 맥매스터 전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쓴소리가 다음 정부에라도 조언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