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 욕구’ 부터 ‘富의 갈망’ 까지… 페이지를 펼치면 ‘시대’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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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스트셀러로 읽는 30년

베스트셀러는 시대를 담고, 그 시대를 사는 사람의 열망과 소망을 반영한다. 지난 시절의 베스트셀러를 다시 펼치는 건 곧 우리가 걸어온 역사를 되짚는 일이다. 문화일보는 창간 30주년을 맞아 ‘베스트셀러로 읽는 30년사(史)’를 정리했다. 지난 1992년부터 올해까지 해마다 가장 많은 독자의 선택을 받은 책을 한 권씩 선정해 베스트셀러에 얽힌 시대상을 살폈다. 자료는 교보문고(1992∼2021년 10월)와 예스24(1999∼2021년 10월)에 의뢰했다. 서점별로 베스트셀러가 다른 경우 문화일보가 화제성과 역사적 의의를 고려해 직접 선정했다. 지난 30년을 보여주는 30권의 책과 함께 당신의 ‘과거’와 우리의 ‘역사’를 반추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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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교양서’ 시장 형성…책을 통한 ‘배움’의 시대(1992∼1995년)

1990년대 초·중반은 대중을 위한 인문교양서 시장이 형성된 시기다. 당시 독자들은 책을 통해 ‘지식’을 쌓고 ‘배움’을 얻었다. 1993년 베스트셀러에 오른 어린이 교양서 ‘반갑다 논리야’는 우화 형식으로 논리적 사고가 합리적 행동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풀어냈다. 이듬해엔 방송 기자로 활약하던 전여옥의 ‘일본은 없다’가 제일 많이 팔린 책으로 기록됐다. 일본 문화와 생활 양식을 비판한 책은 국민의 ‘반일 감정’을 자극하며 100만 부 이상 나갔다. ‘○○은 없다’ ‘○○은 있다’ 등 제목을 흉내 낸 책들이 쏟아질 만큼 출판계에 미친 영향력도 컸으나 2012년 대법원에서 표절 판결을 받으며 빛이 바랬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2’가 1994년 베스트셀러 3위를 기록한 것도 눈에 띈다. 권위 있는 미술사학자가 문화유산의 가치를 조명한 연구서임에도 확대되는 인문서 시장에서 대중과 폭넓게 만나는 데 성공했다. 1992년엔 ‘소설 목민심서 1’과 ‘소설 토정비결 上’이 나란히 1·3위를 차지했다. ‘소설 목민심서’는 다산의 생애와 사상을, ‘소설 토정비결’은 신분을 뛰어넘은 기인 이지함의 삶을 그린 역사소설이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는 “문학 작품을 그저 ‘재미난 서사’로 소비하기보다 ‘인문학적 교양’을 쌓는 수단으로 활용한 당시 독자들의 성향이 반영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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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위기가 낳은 ‘아버지 신드롬’(1996∼2000년)

1990년대 후반은 해방 이후 최악의 경기침체를 낳은 ‘외환위기’의 시대로 기억된다. 한국 경제의 가파른 성장을 이끌던 대기업들이 무리한 차입 경영과 문어발식 확장으로 잇따라 파산하면서 우리 정부는 1997년 11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체질 개선을 위한 혹독한 구조조정은 수많은 ‘아버지’들의 실직으로 이어졌다. 1996년 여름 출간돼 이듬해 베스트셀러에 오른 김정현의 소설 ‘아버지’는 제목 그대로 아버지들에게 바치는 헌사였다. 독자들은 소설 속 암으로 죽어가는 중년 남성에게 가족을 위해 앞만 보고 내달리다 한순간 거리에 나앉은 우리 시대 모든 아버지의 모습을 투영했다.

자본과 인력이 국경을 넘나드는 ‘세계화’ 역시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다. 세계화 흐름은 문화 콘텐츠 영역에도 지각 변동을 일으켰다. 출판계에선 시차를 두지 않고 각국에서 ‘동시 출간’하는 ‘글로벌 동조화’ 전략이 등장했다(장은수 출판평론가). 마법 학교로 간 소년의 모험을 그린 J K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시리즈 1편인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은 2000년 해외 판타지 문학으로는 처음으로 베스트셀러에 등극했다.

1999년 연기자 서갑숙의 에세이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도 주목할 만하다. 성(性) 경험을 적나라하게 풀어낸 책은 성적 담론을 금기시하던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저자가 출간 취지를 ‘해명’하기 위한 기자회견을 열고, 검찰이 음란성 여부를 따지는 내사에 착수하는 등 논란이 일파만파로 확산하는 와중에도 책은 ‘없어서 못 팔 만큼’ 불티나게 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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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 경험 복기…SF 등 대중문화 장르 확장(2001∼2005년)

새로운 세기의 첫 베스트셀러는 스펜서 존슨의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였다. 당시는 한국 경제가 IMF 위기를 막 벗어나 새 도약을 모색하던 시기. ‘실패’에 대한 복기를 통해 ‘생존’하려는 한국인들의 몸부림은 도태되지 않는 처세술을 담은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들었다. 같은 작가가 치밀한 계획으로 성공을 일구는 법을 담은 ‘선물’은 3년 후인 2004년에도 가장 많이 팔린 책으로 기록됐다. ‘처세’와 ‘경제’를 결합한 도서가 인기를 끄는 경향은 2000년대 중·후반 ‘자기계발서의 시대’로 이어진다.

이 시기 베스트셀러 명단에서 단연 눈에 띄는 이름은 프랑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다. 1993년 ‘개미’, 1997년 ‘개미 혁명’ 시리즈로 팬층을 넓힌 그는 2003년 ‘나무’로 한 해를 결산하는 출판 시장의 일인자가 됐다. ‘나무’는 인간을 ‘반려견’처럼 키우는 외계인, 투명 피부를 지닌 인간을 만드는 데 성공한 과학자 등의 이야기를 담은 과학소설(SF)집. 마니아 장르로 인식되던 본격 SF로 흥행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베르베르는 이후 ‘파피용’ ‘타나토노트’ ‘뇌’ 등을 연이어 출간하며 지난 20여 년 동안 문학과 비(非)문학을 통틀어 ‘한국에서 가장 많은 책을 판 작가’ 1위(예스24 기준)에 오른다. 베르베르가 ‘나무’를 내놓은 2003년엔 한국 영화계에도 대중성과 작품성을 겸비한 ‘장르 영화’가 쏟아졌다. 박찬욱 ‘올드보이’, 봉준호 ‘살인의 추억’, 김지운 ‘장화, 홍련’, 장준환 ‘지구를 지켜라!’ 등이 모두 같은 해에 개봉했다. 최루성 신파와 멜로드라마가 주류이던 문화계가 SF·공포·스릴러 등 장르 영토를 확장하며 대중과 소통하는 시발점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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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서’ 열풍…‘정의’라는 화두 던진 양극화(2006∼2010년)

‘마시멜로 이야기’ ‘시크릿’ ‘대한민국 20대, 재테크에 미쳐라’ ‘이기는 습관’…. 2000년대 중·후반 베스트셀러 최상위권에 포진한 이들 책은 자기계발서 열풍을 주도했다.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하고 계발해야 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집단적 불안감이 출판 시장에 스며든 것이다.

2006년 판매량 1위를 차지한 ‘마시멜로 이야기’는 가상 인물을 내세워 ‘성공 법칙’을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전했다. ‘내일’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유예하는 현대인의 초상을 “성패를 가르는 열쇠는 ‘노력’이나 ‘머리’가 아닌 보상을 지연시키는 능력”이라는 메시지에 담았다. 이듬해 가장 많은 독자의 지지를 받은 책 역시 긍정적 낙관을 통해 성공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 론다 번의 ‘시크릿’이었다. 이와 함께 2007년 교보문고 집계에서 ‘돈 잘 모으는 비법’을 담은 ‘대한민국 20대, 재테크에 미쳐라’가 3위에 오른 건 십수 년 후 주식·부동산 관련 투자·재테크 서적의 시장 장악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다.

자기계발서에 독자들이 몰리는 사이 한쪽에선 점점 심해지는 양극화에 대한 문제의식이 생겨났다. 출발선 자체가 ‘불공정’하다면 무슨 수를 써도 계층 상승의 사다리에 올라탈 수 없다는 자각이 싹튼 것이다. 2010년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열렬한 호응을 얻은 배경엔 이런 절망과 한탄이 배어 있다. 하버드대 강의를 엮은 책은 구제금융, 모병제, 대리출산 등의 이슈를 다양한 사고실험으로 살피며 ‘공정’과 ‘정의’라는 화두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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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에 지친 이들에게 건네는 ‘위로’(2011∼2015년)

2000년대 후반이 ‘자기계발서의 시대’였다면, 2010년대 초·중반은 ‘힐링과 위로의 시대’였다. 하지만 ‘힐링’이나 ‘위로’라는 단어가 품은 따뜻한 온기로 이 시기를 회고하는 건 불가능하다. 독자의 어깨를 토닥여주는 책이 큰 사랑을 받은 건 수많은 이가 각박한 사회의 속도 경쟁에서 밀려나 주저앉았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010년대는 1980년대 초반∼1990년대 중반 출생자가 취업시장에 유입된 시기. 이들은 ‘최고 학력’을 쌓았으나 세계적 경기 침체 속에 비정규직을 전전하며 ‘가장 적게 버는’ 세대로 전락했다(앤 헬렌 피터슨, ‘요즘 애들’). 김난도 서울대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2011년 베스트셀러가 된 건 우연이 아니다. 김 교수는 ‘홀로서기’를 위해 분투하는 청춘을 향해 바닥은 생각보다 깊지 않다는, 기적이란 천천히 이뤄지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건네며 ‘우리 시대의 멘토’로 부상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비롯해 이 시기를 채운 베스트셀러는 하나같이 ‘피로’에 지친 이들의 손을 잡아준 책들이다. 트위터에 남긴 잠언을 모은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은 “내 마음이 쉬면 세상도 쉬고, 내 마음이 행복하면 세상도 행복하다” “누구처럼 되기 위해 살지 말고 하나밖에 없는 ‘오직 나’가 되라”는 등의 문장으로 독자를 치유했다. 2015년 출간된 기시미 이치로·고가 후미타케의 ‘미움받을 용기’는 심리학 거장으로 유명한 알프레트 아들러의 이론으로 ‘용기의 철학’을 설파했다. 백 대표는 “타자의 시선이 아닌 자기 내면에 주목하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책들이 힘든 시기를 통과하는 독자들의 호응을 얻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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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가벼움’의 시대(2016∼2021년)

2010년대 후반부터 현재에 이르는 시기는 ‘가벼움’으로 요약된다. 더 이상 독자들은 책을 통해 방대한 지식이나 깊이 있는 철학을 구하려 하지 않는다. 이런 소비자 수요에 맞춰 출판계는 ‘일상적 에세이’와 ‘투자·재테크 서적’으로 양분됐다. 2017년 서점가를 장악한 이후 150만 부 이상 팔린 이기주의 ‘언어의 온도’는 생활에서 발견한 말과 글, 단어의 어원과 유래, 언어의 소중함 등을 가벼운 스케치로 담은 에세이다. 2018년 최고 판매량을 기록한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역시 갈수록 ‘말랑말랑해지는’ 시대 흐름을 대변한다. 월트디즈니 애니메이션 ‘곰돌이 푸’가 원작인 책은 어떤 순간에도 여유를 잃지 않는 캐릭터를 통해 희망을 북돋는 삽화집. 장 평론가는 “인스타그램에 공유하기 좋은 형식과 팍팍해진 삶을 위로하는 메시지가 결합해 ‘저자가 따로 없는 애니메이션 베스트셀러’라는 이례적 현상을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자산 격차가 점점 벌어지는 가운데 코로나19 사태까지 겹친 지난해엔 ‘부(富)를 축적하는 비법’을 알려준 ‘더 해빙’과 ‘돈의 속성’이 나란히 베스트셀러 1·2위에 올랐다. 부동산 시장 폭등에 ‘영끌’을 해서라도 자산을 모으려는 젊은 세대의 욕망이 출판 트렌드를 바꿔놨다. 국내 저자의 책으로는 이례적으로 해외에서 먼저 출간된 ‘더 해빙’은 물려받은 재산이나 남다른 학벌이 없어도 부와 행운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한다.

2016년의 베스트셀러는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였다. 채식을 결심한 여성을 통해 욕망과 고통의 근원을 탐구한 작품은 그해 한국 최초로 세계 3대 문학상인 맨부커 인터내셔널 국제상을 받으며 글로벌 무대로 비상하는 K-문학의 상징이 됐다. 다만 이 작품이 판매량 1위를 기록한 건 ‘가벼움의 시대’에 일어난 ‘예외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채식주의자’는 2007년 출간 당시엔 대중의 이목을 끌지 못했으나 맨부커상 수상으로 ‘뜻밖의’ 역주행을 했다. 2010년대 후반 ‘채식주의자’로 문을 연 베스트셀러 목록은 ‘소설 쓰기를 배운 적도, 필사를 해본 적도 없는’ 신예작가 이미예의 대중 판타지 ‘달러구트 꿈 백화점’으로 끝난다. 특별히 언급할 만한 건 올해 ‘달러구트 꿈 백화점’에 이은 베스트셀러 2위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쓴 ‘조국의 시간’이라는 점이다. 법무부 장관 후보자 지명 후 이어진 수사와 재판 과정을 기록한 책은 열혈 지지자들의 호응 속에 35만 부가량 팔리며 진영 논리에 따라 두 쪽으로 나뉜 한국 정치의 현실을 드러냈다.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