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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식카페 게재 일자 : 2021년 11월 22일(月)
암벌 모습한 꽃에서 페로몬 향 발산…곤충 性的 파트너 흉내내 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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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벌의 모습을 흉내 내어 수벌을 유혹하는 꿀벌난초(Ophrys apifera).

■ 박원순의 지식카페 - ⑨ 난초

영리하게 진화… 다산·힘·사랑 상징 관다발 식물 중 가장 큰 과 이루며 전 세계 2만8000종 분포
19세기 초 유럽 상륙 귀족들 사이서 인기, 일부는 수천 달러에 거래… 바닐라 향은 지금도 아이스크림 등에 사용


이탈리아의 과학자 스테파노 만쿠소 박사 연구팀에 따르면,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측면에서 본다면 식물도 지능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 난초류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영리하게 진화했다. 특히 번식을 위해 다른 곤충과 동물을 이용하는 데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인간 역시 오랜 문명의 역사 속에서 난초의 치명적인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난초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와 미술 작품뿐 아니라 난초를 소재로 한 여러 소설과 영화만 봐도 이 범상치 않은 식물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난초는 아름다움과 세련됨, 다산과 힘, 사랑 등 강한 상징성을 지녀 왔다.

난초류는 약 1억 년 전 공룡들이 살던 시대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수많은 동식물이 멸종하거나 다른 종으로 대체됐지만, 난초류는 끊임없이 세를 확장하며 산이나 습지, 나무 위나 바위틈, 초원이나 우림 등을 가리지 않고 번성해 왔고, 지금은 관다발 식물 가운데 가장 큰 과(family)를 이루며 전 세계에 약 2만8000종이 분포하고 있다.

난초의 영어명 오키드(orchid)는 고환을 뜻하는 그리스어 오르키스(orkhis)에서 유래했다. 일부 종에서 볼 수 있는 둥근 위인경(헛비늘줄기)의 모양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진화의 역사가 오래된 만큼 생김새도 천차만별이다. 대부분 좌우대칭으로 세 장의 꽃받침조각과 세 장의 꽃잎을 가지고 있다. 그중 가운데 위치한 꽃잎 하나는 입술 모양으로 생겨 입술꽃잎 또는 순판(脣瓣)으로 불리는데 꽃가루 매개자를 인도하는 착륙장 역할을 한다. 이들 꽃받침조각과 꽃잎의 크기와 배치, 모양, 그리고 색깔과 무늬의 조합에 따라 무수히 많은 종류의 난초가 탄생했다.

다른 일반적인 꽃들처럼 단순히 꿀이나 꽃가루를 만들어 놓고 마냥 기다리는 게 아니라 난초류는 특정한 타깃만을 위한 교묘하면서도 복잡한 메커니즘을 개발했다. 특히 꽃가루 매개자 곤충의 성적 파트너 흉내를 내는 경우가 많다. 꿀벌난초(Ophrys apifera)는 매우 정교하고 디테일하게 암벌의 모습을 하고 있다. 수벌이 자신과 교미행위를 하도록 유발하는 것이다. 미국의 논픽션 작가이자 환경운동가인 마이클 폴란이 표현했듯 이 난초는 고도의 ‘성적 속임수’를 쓰고 있는 것이다. 온시디움 헤네케니(Oncidium henekenii)는 암벌에게서 나는 페로몬과 똑같은 향을 발산하는 꼼수까지 부린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꽃잎에 갈색 무늬를 넣고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벌의 천적처럼 보이도록 해 수벌로 하여금 자신을 공격하게 만든다. 영문도 모르는 곤충들이 이들 난초를 상대로 아무 의미 없는 교미 혹은 공격행위를 할 때 꽃가루가 들어 있는 화분괴(花粉塊)가 벌의 머리나 몸통, 뺨을 때려 달라붙게 되는 것이다. 훨씬 더 교활한 난초도 있다. 우리나라에선 복주머니난, 영어로는 레이디스 슬리퍼(lady’s slipper)로 불리는 시프리페디움속(Cypripedium) 난초는 순판이 물통 혹은 주머니처럼 생겼는데 벌이 헛수술에 앉으면 미끄러워 주머니 안쪽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출구를 간신히 통과하는 과정에서 벌은 꽃가루를 묻혀 또 다른 꽃으로 가는 것이다.

인류 문명의 역사에서 난초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약 3000년 전으로 보고 있다. 동양에서는 기원전 6세기에 공자가 깊은 숲에서 사람이 없이도 꽃을 피우는 난초에 대해 언급한 기록이 있으며, 서양에서는 기원전 13년 로마의 전통 신들에게 기원하기 위해 건설된 아우구스투스의 평화의 제단(Ara Pacis)에 타래난초속의 일종인 스피란테스 스피랄리스(Spiranthes spiralis)가 묘사된 돋을새김을 볼 수 있다. 남아메리카 등 다른 대륙의 관상 가치가 높은 화려한 난초가 유럽에 본격적으로 상륙한 것은 19세기 초였다. 당시 영국은 급속한 제국의 성장과 팽창 시기에 접어들면서 선교사, 탐험가, 무역상들이 주축이 된 식물 사냥꾼들이 과테말라, 브라질, 마다가스카르 등 먼 나라까지 파견돼 수많은 식물을 들여왔다. 난초류는 윌리엄 존 스웨인슨(William John Swainson)이라는 영국 박물학자에 의해 우연히 도입됐다. 그는 브라질에서 이국적인 식물들을 수집했는데, 기나긴 항해를 통해 운송할 식물들을 포장하는 재료로 다른 흔한 식물들의 뿌리나 덩굴 따위를 사용했다. 그중에는 아직 꽃이 피지 않은 난초류의 덩이줄기도 있었는데, 그가 영국에 돌아올 때쯤 이들 난초는 아름다운 꽃을 피워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곧 난초류는 큰 관심과 인기를 얻게 됐고, 이렇게 해서 오르키델리리움(Orchidelirium)이라고 하는 난초 열풍이 생겨났다. 유리 온실 건축의 발달도 난초 열풍 확산에 큰 역할을 했다. 열대·아열대 지방이 원산지인 난초들에 유리 온실은 최적의 재배 환경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특히 조지프 팩스턴 경이 온실 건축의 황금기를 주도했다. 1830년대 데번셔 공작을 위해 지은 우아한 온실 구조는 기폭제가 돼 상류 사회에 널리 확산됐다. 너새니얼 배그쇼 워드(Nathaniel Bagshaw Ward)가 오늘날 테라리움의 전신인 워디언 케이스(Wardian case)를 개발한 것도 난초 같은 섬세한 식물들의 안전한 운송과 관리를 위한 혁신적인 아이디어였다.

▲  세계 여러 나라로부터 난초 등 희귀 식물들을 싣고 영국 왕립 식물원 큐가든에 도착한 워디언 케이스(1890년경).

1851년엔 벤저민 새뮤얼 윌리엄스(B.S. Williams)가 ‘난초 재배가의 매뉴얼(Orchid Grower’s Manual)’을 저술해 애호가들의 갈증을 해소해줬다. 곧 영국 북부는 난초 문화의 중심지가 됐고 희귀한 난초류는 경매를 통해 높은 가격에 거래됐다. 일부 난초는 수천 달러대의 가격이 형성됐는데, 이는 17세기 알뿌리 하나 가격이 집 한 채와 맞먹을 정도로 치솟았던 튤립 마니아와 비슷한 현상이었다. 열성적인 수집가들(부자, 귀족, 왕족)을 고객으로 둔 난초 사냥꾼들의 활약은 더욱 대담하고 조직적으로 전개됐다. ‘오키드 킹’으로 불렸던 프레더릭 샌더(Frederick Sander)는 가장 유명한 난초 사냥꾼이었다. 그는 영국 세인트올번스(St. Albans)에 대규모 난초 농장을 차렸고 재배와 번식을 위한 온실을 60개나 만들었다. 그는 1886년엔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공식적인 왕실 난초 재배가로 임명되기도 했다.

난초 열풍이 워낙 뜨겁다 보니 생물학자와 박물학자, 예술가들도 난초에 큰 관심을 가졌다. 스태퍼드셔 지방에 비덜프 그레인지 정원을 조성한 제임스 베이트먼(James Bateman)도 열정적인 난초 수집가였는데, 1845년 ‘멕시코와 과테말라의 난과 식물(Orchidaceae of Mexico and Guatemala)’이란 책을 저술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신의 창조물인 식물들 가운데 양치류와 민꽃식물은 신의 계획 초기에 만들어진 반면, 난초류는 그 꽃의 아름다움을 누릴 자격이 있는 인간이 지상에 등장할 무렵에 맞춰 창조됐다는 창조론을 펼쳤다. 그의 친구였던 다윈의 진화론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견해였다. 하지만 다윈은 1862년 ‘난초의 수정(Fertilisation of Orchids)’이란 책을 저술해 곤충에 의해 수정되는 다양한 난초의 세계를 소개하며 이들이 창조주의 개입이 아닌 진화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보여줬다.

베이트먼은 1862년 다윈에게 마다가스카르에서 온 앙그라이쿰 세스퀴페달레(Angraecum sesquipedale)를 선물했는데, 이 난은 꽃받침조각 뒤쪽으로 달팽이 더듬이처럼 생긴 좁고 기다란 꽃뿔이 30㎝ 정도로 뻗어 있었고 그 끝에 꿀이 들어 있었다. 다윈은 그 꽃의 꿀을 먹을 수 있는 긴 주둥이를 가진 꽃가루 매개자가 마다가스카르에 분명히 존재할 거라고 예측했다. 그리고 이 꽃이 흰색이고 밤에 짙은 향기가 나기 때문에 꽃가루 매개자는 나방의 한 종류일 거라고도 했다. 그로부터 130년 후인 1992년 실제로 그러한 나방(Xanthopan morganii praedicta) 종류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확인돼 이 난초는 ‘다윈난’이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한편 생태학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과학자이자 의사, 화가였던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은 ‘자연의 예술적 형태(Kunstformen der Natur)’(1906)라는 책을 통해 난초를 포함한 수백 종의 예술적 일러스트레이션을 선보이기도 했다.

▲  다윈난(Angraecum sesquipedale)

주로 열대와 아열대 지방이 원산지로 유럽에서 열풍을 일으킨 팔레놉시스속(Phalaenopsis), 시프리페디움속(Cypripedium), 카틀레야속(Cattleya) 등의 난초류를 편의상 서양란이라고 한다면,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양에 자생하는 온대성 난 종류를 동양란이라 한다. 관상용 동양란은 심비디움속(Cymbidium) 종류가 대부분이다. 심비디움은 보트를 뜻하는 킴보스(kymbos)에서 유래했는데, 입술꽃잎 모양이 배를 연상시킨다. 봄을 알리는 꽃이라는 뜻의 보춘화(報春花·춘란), 한란(寒蘭) 등이 여기에 속한다. 석곡속(Dendrobium)과 풍란속(Neofinetia) 종류도 대표적인 동양란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1세기 ‘삼국유사’에 난초에 관한 첫 기록을 찾아볼 수 있고, 고려 말기부터는 매화, 대나무, 국화와 함께 사군자(四君子)의 하나로서 문인화에 많이 등장한다.

난초 하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향을 떠올린다. 전 세계적으로 아이스크림과 베이킹에 가장 많이 쓰이는 향으로 유명한 바닐라(Vanilla planifolia)도 난초의 일종이다. 멕시코 동부 해안의 토토낙족이 처음으로 바닐라를 재배했는데 15세기 아즈텍인들이 이곳을 점령하며 바닐라를 얻었고, 16세기 스페인이 아즈텍을 정복하면서 유럽에 소개됐다. 10m 높이까지 자라는 덩굴성 난초인 바닐라는 지름 10㎝ 정도의 연노랑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데 이 꼬투리로부터 향 결정체를 추출한다. 그런데 몇 년에 한 번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꽃이 피고 특정 벌이나 벌새의 도움을 받아야만 꽃가루받이가 일어나기 때문에 자연 상태에서는 열매가 아주 귀하다. 그런데 1841년 인도양 레위니옹 섬에 사는 한 소년이 작은 막대기와 엄지손가락을 이용해 바닐라 꽃을 인공 수정시키는 방법을 개발한 이후로 마다가스카르, 인도네시아 등지에 바닐라 농장이 생겨나 수확량을 크게 늘릴 수 있었다.

난초 열풍의 불씨는 아직도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전 세계 많은 사람이 다양한 난꽃을 즐기고 있다. 조직배양 등 대량 증식법의 개발과 유통의 혁신으로 다양한 난초 품종을 누구나 꽃시장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세상이 됐다.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동식물종의 국제거래에 관한 협약(CITES)에 따라 야생에서 난초를 수집하는 것은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난초 사냥꾼들도 여전히 극성이다. 심지어 영국 큐가든 같은 유명 식물원의 온실에서도 이따금 희귀 난초가 도난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난초는 지구 상에서 곤충과 함께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식물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만큼 다른 생물 종을 비롯한 주변 환경을 잘 이해하고 그들과 공생하는 전략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자연을 깊이 들여다보면 모든 것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오랜 진화의 역사 속에서 현명하게 지구에서 살아가는 난초의 전략과 지혜를 다시금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국립세종수목원 전시기획운영실장


■ 다윈난(Angraecum sesquipedale)

다른 나무에 붙어 자라는 착생란 종류는 마다가스카르에서만 자란다. 속명인 앙그라이쿰(Angraecum)은 난초를 뜻하는 말레이어인 앙그렉(angrek)에서 유래했고, 종명인 세스퀴페달레(sesquipedale)는 45㎝ 정도 되는 길이를 뜻한다. 찰스 다윈이 이 난의 유난히 긴 꽃뿔 끝에 꿀샘이 있는 것을 보고 이와 똑같이 긴 주둥이를 가진 나방이 존재할 거라고 예측했는데 130년 후 그 가설이 입증돼 ‘다윈난’이라는 별명을 갖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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