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거리에서 멸시당한 ‘작은 인간’… 작가들, 언어로 진실·희망 외쳐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러시아 최초의 근대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의 역사이자 신화이고 문학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풍경. 게티이미지뱅크

■ 장은수의 지식카페 - ⑪ ‘영광과 절망’ 페테르부르크

수천명 희생으로 건설된 신도시… 웅장한 궁전·장엄한 성당·낭만적인 운하·아름다운 백화점 등 즐비
상류층 향락 속에 시민들의 행복 외면당해… 푸시킨·고골 등 현실 고발하며 사회 변혁 이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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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서쪽 끝에 있는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약어 페테르부르크)는 그 자체로 러시아의 역사이자 신화이고 문학이다. 유럽을 모방해 지은 이 러시아 최초의 근대 도시는 제국의 심장이자 아방가르드의 체현이고,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이끄는 유럽의 강대한 침략군을 100년 간격으로 두 차례나 무찌른 영웅의 도시이자 불굴의 상징이다.

유라시아 양쪽 모두의 변두리에 불과했던 러시아의 영광은 페테르부르크에서 시작해 동으로는 시베리아를 거쳐 베링해까지, 서로는 폴란드를 지나 독일까지, 남으로는 캅카스 땅을 건너 중앙아시아까지 한때 뻗어갔다. 프랑스 시인 고티에는 “저녁이 여명처럼 흰색인 그곳, 은빛 지평선 위로 보이는 금빛의 도시만큼 찬란한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고 했다. 페테르부르크는 살아 있는 꿈이다. “말하면 단어들이 이내 얼어붙을 것” 같은 강추위 속에서 환상처럼 솟아난 도시를 보면서 가슴 뛰지 않는 러시아인은 없다.

동시에 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문학사에서 토스카(toska)라는 우울증을 낳고, 페테르부르크 신화라는 파멸적 어둠을 잉태한 곳이었다. 푸시킨 이후 고골, 도스토옙스키, 마야콥스키, 자먀친, 브로드스키 등 수많은 시인과 작가가 빛을 좇아 이 도시에 왔다가 음산한 그늘과 마주친 후 좌절과 절망을 맛보고 영혼의 고통으로 전율했다.

“운명이 나를 페테르부르크로 보낸다”면서 영광을 꿈꾸었던 고골은 하급 서기로 지하실에서 일하면서 혐오와 저주로 가득한 소설을 써서 이 도시에 복수했다. “모든 것이 눈에 보이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악마가 스스로 가로등을 켰다.” 역사상 어떤 도시도 페테르부르크만큼 영광의 천사와 불행의 악마가 공존하는 도시는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에서 고통에 시달리던 영혼들은 방황과 반항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혁명에서 탈출구를 얻었다.

“이곳에 도시가 서리라.”

페테르부르크의 역사는 짧다. 1703년 근대 러시아의 기틀을 놓은 계몽 군주 표트르 대제는 오랫동안 선조들 땅을 점령해 온 스웨덴을 몰아내고, 네바강이 발트해 핀란드만과 만나는 삼각주에 생겨난 크고 작은 섬들을 운하와 다리로 연결해 신도시를 건설하라고 명령했다. 입지는 최악이었다. 날씨는 얼어붙을 듯 춥고, 한 해 아홉 달은 눈이 내리며, 바다는 역류했다. 미국의 역사가 브루스 링컨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말했듯, 수십 년 동안 민중을 동원해 “힘겨운 노동으로 습지를 메우고 늪지대를 마른 땅으로 만들어 화려한 궁전과 웅장한 성당을 짓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표트르 대제는 황량한 습지에서 암스테르담을 상상했다. 후진국 러시아를 개혁해 네덜란드처럼 강국으로 만들고 싶었다. 바다로 가는 통로, 즉 얼지 않는 항구 도시가 필요했다. 링컨에 따르면, 당대 러시아인의 머릿속에는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자연을 개조해 쾌적하고 풍요로운 세상을 건설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없었다. 신의 손이 모든 걸 결정한다고 체념했을 뿐이다. 근대적 군대도, 공장도, 문학예술도 없었다. 모스크바 크렘린궁엔 낡아빠진 전통에 갇혀 나날의 향락만 즐기는 타락자들만 가득했다. 대제에게는 러시아의 정신을 바꿀 살아 있는 증거가 필요했다.

근대 러시아 문학의 뿌리를 만든 푸시킨은 ‘청동기마상’에서 노래했다. “황량한 물결 일렁이는 강기슭에/ 서서 그는 위대한 생각을 품고/ 먼 곳을 바라보았다./ (중략)/ 우리가 이곳에/ 유럽을 향한 창을 내고/ 저 바다 앞에 굳건하게 발을 딛고 일어서기 위해/ 자연은 우리에게 이곳을 점지해 주었다.”

페테르부르크는 표트르의 도시란 뜻이다. 도시 한복판에 거대한 기마상으로 우뚝 선 그가 수천 명의 목숨을 네바강에 던져넣어 기적을 연출한 주역이다. 황량한 땅에서 아름다운 도시를 상상하고, 축축한 바다에서 활기찬 미래를 떠올렸다. 푸시킨은 ‘유럽을 향한 창’을 내서 러시아 근대화의 위업을 이룩한 대제의 꿈을 ‘위대한 생각’이라고 찬미한다.

대제는 다재다능했다. “때로는 위대한 학자, 때로는 용사/ 때로는 선원, 때로는 목수”였고, “전지전능한 영혼”을 갖춘 “위대한 일꾼”이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러시아를 번영의 반석에 올려놓고, 언젠가 유럽이 러시아를 뒤쫓게 하겠다는 원대한 꿈은 너무나 정당했다. 유럽의 정수를 빨아들여 기하학적으로 완벽하게 설계되고 정치적·군사적·문화적으로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조화를 이루려 한 도시는 시인의 찬탄을 자아냈다. “사랑한다, 너 표트르의 창조물을,/ 사랑한다, 너의 엄격하고 정연한 모습을.”

그 후로도 오래 이어진 건설 과정 끝에 도시가 위용을 드러냈을 때, 사람들은 경이를 느꼈다. 분홍색, 청록색, 붉은색, 노란색 등으로 장식한 궁전들, 바티칸 성당과 맞먹는 규모의 장엄한 이사크 성당, 인간을 압도하는 웅장한 관공서 등이 즐비하게 들어서고, 도시의 실핏줄인 운하는 베네치아만큼 아름답고 낭만적이었으며, 넵스키 대로에는 백화점, 호텔, 상점, 카페, 극장, 교회, 도서관 등이 극치의 화려함을 자랑했다. ‘넵스키 대로’에서 고골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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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넵스키 대로에선 모든 것이 빛을 발한다. 아무리 사무적인 시민일지라도 넵스키 대로를 세상 어느 것과도 바꾸지 않으리라. 아무리 바쁘고 필수 불가결한 일도 넵스키 대로에 들어가기만 하면 씻은 듯이 잊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세련된 이 도시는 민중의 피와 뼈를 갈아 세운 악마의 도시이기도 했다. ‘청동기마상’에서 푸시킨은 표트르의 기마상 아래에서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한 사내를 등장시킨다. “두고 보자.” 이 도시로부터 가난 속에서 ‘소확행’을 꿈꾸었던 ‘작은 인간들’의 도전이 시작된다.

하급 관리인 예브게니의 꿈은 연인과 알콩달콩 사는 것뿐이다. 그러나 위대한 표트르의 도시는 소박한 꿈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 도시에선 신처럼 위대한 표트르 대제 말고는 누구도 바라는 삶을 살 수 없다. 한 해 전 페테르부르크에 홍수가 났을 때, 사내는 넘쳐난 강물이 연인을 삼키는 걸 망연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표트르의 도시는 자연을 이기지 못했다. 해마다 홍수가 도시를 파괴하고, 전염병이 창궐해 시민들을 살해했다. 인간의 오만이 낳은 불행은 필연의 형태를 띤다. 여기에 더해 민중의 고통을 돌보지 않는 권력의 잔혹함이 기적의 도시를 인세 지옥으로 만들었다. 타락한 상류층은 과시적 향락을 누리다 못해 권태와 공허에 빠져들고, 능력과 성과보다 신분과 계급이 삶을 지배하는 이 도시에서 출세하려면 누구나 허위를 연출하는 속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성공을 위해 페테르부르크에 왔다가 절망에 빠진 하층 계급은 고골처럼 억압과 모멸, 멸시를 견디지 못하고 광인이 되거나, 도스토옙스키처럼 ‘지하 생활자’가 되어 울분을 곱씹으며 도끼를 들어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도시”를 뒤집어엎으려 했다.

운명의 가혹함을 못 이긴 예브게니는 정신이 나갔다가 다시 홍수가 나자 자신도 모르게 청동기마상 아래 와 있다. 재앙의 진짜 원인이 네바강이 아니라 인간이 살 수 없는 땅에 도시를 건설한 표트르임을 깨달은 것이다. 이로부터 예브게니의 꿈이 실체를 얻는다. 표트르의 꿈에 맞서 모두가 행복을 누리면서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부국강병을 이루어 러시아를 세계 중심에 두겠다는 표트르의 야망이 진정하다면,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예브게니의 갈망 또한 진정하다.

푸시킨은 큰 인간 표트르 대제의 진실과 작은 인간 예브게니의 진실을 동등하게 맞세웠다. 비인간적이고 비정하기 그지없는 대제의 위업 아래에서 ‘두고 보자’면서 변혁을 기약하는 민중의 속삭임에 입술을 빌려주었다. 근대 이후, 러시아의 역사와 문학은 푸시킨이 보여준 이 두 가지 진실의 대결을 반복해 왔다. 한쪽엔 표트르, 스탈린, 푸틴 등이 있고, 다른 쪽엔 도스토옙스키, 마야콥스키, 스베틀라나 등이 있다. 작가들은 극도로 억압적 세계에서 정치의 폭력에 맞서 영혼을 지키고 희망을 생산하는 전통을 이룩함으로써 문학의 언어에 세계사적 깊이를 부여했다.

정치가 문학의 진실을 존중하지 않고 작은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자 ‘두고 보자’가 집단 저항으로 폭발했다. 1820년대엔 하급 장교들이 반란을 모의하다 처형됐고, 1860년대엔 학생들이 거리에서 자유를 외쳤고, 1905년엔 굶주린 노동자들이 궁전 앞을 피로 물들였다. 1917년 10월, 마침내 분노한 민중들이 황제를 끌어내고 혁명을 일으켰다. 빈곤을 모르쇠 하고 격차를 방치하며 시민을 우울과 광기로 몰아가는 정치는 반드시 몰락한다.

문학평론가


■ 용어설명

토스카 : 토스카는 불안, 향수, 우울, 우수, 지루함, 짜증 등 별다른 이유 없이 찾아오는 정신적 고통 전체를 뜻한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이 있다는 것은 느끼지만 억압적 현실에서 이를 실현할 만한 마땅한 수단이 보이지 않을 때 생겨난다. 푸시킨이 ‘예브게니 오네긴’에서 보여준 대로, 모든 일에 싫증 내는 권태와 이유 모를 우울을 일으키는 토스카가 잉여 인간이라는 전형적 인간형을 낳았다.

작은인간 : 작은 인간은 러시아 문학의 주요 인간형 중 하나이다. ‘작은’은 ‘신분 낮은’을 뜻한다. 고골의 ‘코’에 나오는 코발료프, ‘외투’에 나오는 아카키예비치처럼, 하찮은 일에 종사하는 하급 관리로 자주 형상화된다. 2015년 노벨상 수상자 스베틀라나는 작은 인간들의 목소리만 모아서 작품을 썼다. 작은 인간은 결국 ‘작아도 인간’ 또는 ‘작지만 큰 인간’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