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뒤 ‘국가 어젠다’ 상실… 지도자들 진영 리더십 갇혀”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최진석 서강대 명예교수가 지난해 12월 22일 서울 강남구 사무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딱 여기까지인가’하는 중진국 함정의 회의감에서 벗어나 글로벌 선도 국가로 도약할 국가 어젠다를 제시하는 대선 후보가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있다. 신창섭 기자

■ 3·9 대선 시대 정신을 묻다 - ② 최진석 서강대 명예교수

진영 매몰돼 네거티브만… 유권자는 ‘진영의 홍위병’ 전락
現 대선후보들 선거전서 보여준 것이 전부… 더 기대못해
드물지만… 불안한 리더라도 경청·인재기용 잘하면 성공

정치가 경제 잡아먹는건 순식간… 기업의 자율성 보장을
중진국 ‘시선의 높이’에 머물면 4차산업혁명 선도국 불가

인터뷰 = 유병권 정치부장

‘3·9’ 대선을 바라보는 최진석(63) 서강대 명예교수의 시선엔 우려와 절망,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4차 산업혁명 등 기존 패러다임이 붕괴하는 시대사적 대전환을 맞아 대한민국이 선도 국가로 도약할 수 있는 천재일우가 찾아왔지만, 대선 후보들은 국가 어젠다를 내놓고 경쟁하기보다 네거티브로 일관하며 ‘막장’ 대선이 진행되고 있다고 탄식했다. 문화일보 신년 인터뷰 ‘3·9 대선, 시대 정신을 묻다’에서 최 교수는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국가 방향인 시대 정신도, 그런 국가 어젠다를 제시하는 후보도 대선판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특히 유력 주자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에 대한 평가는 냉혹했다. 그는 “대선 후보로 선출된 이후 2∼3개월 동안 보여준 것이 그 사람의 전부이고, 그 이상 나올 수도 없다”고 평했다.

최 교수는 “국정 능력이 다소 부족하더라도 리더가 성공하는 방법은 고견을 듣는 경청 능력과 실력 있는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라며 “당선되고 나서 충언을 잘 듣는다면 불안한 리더도 큰 성과를 낼 수 있으나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3·9’ 대선이 어느 대선보다 중요하지만, 선거전은 그 의미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국제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4차 산업혁명으로 판이 흔들리는데, 이곳에 뛰어 올라가야 한다. 새로운 판이 짜지는 국제 상황에서 독립을 유지하고 어떻게 지속 가능한 번영을 할 것인가 하는 점에서 이번 대선은 미래 어젠다를 설정해야 하는 중차대한 선거다. 하지만 지금 대선판을 보면 새 판에 올라타기 어려워 보인다.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선택해야 하는 정도는 돼야 하는데, 지금은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선거 역사에서 가장 수준 낮은 선거, 막장 선거를 보고 있다.”

―시대마다 국가 어젠다가 있지 않았나.

“우리는 민주화 이후 국가 어젠다를 상실했다. 정치 리더십 가운데 국가 높이의 리더십은 김대중(DJ) 전 대통령 때까지였다고 본다. 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은 진영 리더십이나 프로젝트형 리더십에 불과하다. 그 이전에는 건국, 산업화, 민주화 등 당시의 정치·경제·사회적 조건에서 국가가 도달해야 할 분명한 방향이 있었다. 그렇지만 DJ 이후 4명의 대통령은 국가가 나가야 할 레벨을 정하지 못하고 진영의 리더십에 머물러 있었다. 국가 레벨의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은 정치가 혼란스럽다는 뜻이다. 이런 혼란을 극복하는 새로운 어젠다를 설정해야 한다. 이번 대선이 중요한 이유다.”

―이번 대선에서 ‘공정’ ‘상식’이 화두가 되고 있다.

“공정이니 정의니 하는 것은 국가 레벨의 어젠다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어젠다가 될 수 없다.”

―그럼 이 시대 국가 어젠다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민주화 다음의 어젠다는 선도 국가 혹은 전략 국가, 일류 국가로 올라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민주화까지는 선진국을 쫓아가는 추격 국가 형태를 띤다. 추격 국가는 전술적 레벨의 삶이면 된다. 이젠 전략 국가 레벨로 올라가야 한다. 이후 창의 국가로 이동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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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국가 어젠다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시선의 높이가 한계에 갇혔다. 국가를 생각하는 사고가 중진국 레벨을 넘지 못하고 있다. 전술적 삶으로 정점을 찍은 다음에 전략적 삶으로 이행해야 하는데,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길이라 당황하는 것이다. 그래서 적폐 청산을 한다면서 스스로 새로운 적폐가 되거나 ‘이게 나라냐’라고 비판하고 등장해 ‘이건 나라냐’란 비판을 듣는다. 시선의 높이가 같은 수준에 갇혀 있기에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같은 수준의 일을 반복한다. 이런 관점에서 문 대통령도 또 하나의 박근혜 전 대통령이다. 시선의 높이를 다르게 끌고 올라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유력 두 후보도 또 하나의 박근혜, 또 하나의 문재인이 된다.”

―이번 대선에서도 모양만 달리한 리더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인가.

“유력 두 후보만을 보면 그렇다. 각 당의 후보가 정해져 2∼3개월 선거전을 치르면서 무엇인가를 보여줬다면 그게 전부다. 그 이상 나올 수 없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후보들이 대통령이 된 뒤 완전히 바뀌어서 다른 사람이 될 것이라는 기대는 환상이다.”

―시선의 높이를 강조한다. 시선의 높이란 무엇인가.

“어떤 인간도 자기가 가진 시선의 높이 이상을 할 수는 없다. 국가도 그 국가가 가진 시선의 높이 이상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시선의 높이를 올리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다. 개인이나 국가가 하는 모든 노력은 사실 근본적으로 시선을 높이려는 일이다. 노자도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를 말한다. 어떤 공을 이뤘으면, 거기에 머물면 안 되고 더 높은 시선을 향해 건너가야 한다는 뜻이다. 머무르면 방황 속에서 혼란스럽다. 그러면, 전진은 없고 퇴보만 있다. 우리가 지금 그렇다. 한 단계 더 높은 시선으로 무장해 선도 국가를 도모하지 않으면 우리는 ‘딱 여기까지다’라는 것이 제 생각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시선의 높이로 다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이미 도달해버렸다.”

―선도 국가로 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국가 전체의 시선의 높이가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올라간 시선을 산업에 적용시키는 정치력이 필요하다. 지금이 4차 산업혁명 시기임을 철저히 인식해야 한다.”

―왜 지금이 기회인가.

“현재의 문명 시스템은 1차 산업혁명 시기 중간대인 1820년대에 구축됐다. 그때 선진국은 지금까지 선진국이고 후진국은 지금도 후진국이다. 후진국에서 선진국 높이까지 거의 다다른 국가는 대한민국밖에 없다. 그 전에 아르헨티나가 우리 같았는데 하강했다. 아르헨티나는 중진국 높이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도 지금까지는 중진국 높이의 시선 이상을 못 가졌다. 패러다임이 유지되고 있으면 추격 국가가 선도 국가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패러다임이 깨져야 기회가 오는데 지금 이미 깨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국력은 지금이 가장 강하다. 선도 국가로 올라설 꿈을 가져본다면, 딱 지금이다. 현재 상황은 위기이자 기회이다.”

최 교수는 대선 후보 중 마음 가는 후보가 한 명도 없을까. 후보에 대한 비교 평가를 부탁했다. “대선 후보들을 만나도 보고 관찰도 해보니, 어젠다랄지,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인식이나 지도자로서의 인격 등이 종합적으로 가장 단단하게 돼 있는 사람은 그래도 안철수”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어 “지지율이 잘 안 나오더라”고 했다. 안 후보는 인터뷰 이후 지지율이 상승하고 있다.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는 이유는.

“진영 정치 때문이다. 진영 정치를 한다는 것은 유권자나 정치인이 생각하는 정치를 안 한다는 뜻이다. 진영에 갇히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진영 논리에 따라 자신이 속한 이념이나 가치를 확대 재생산하기만 하면 된다. 이번 대선은 생각 없는 정치 지도자와 생각 없는 유권자가 만들어낸 비극의 한 장면이다. 유권자들이 ‘진영의 홍위병’으로 전락했다.”

―정치는 퇴보했지만 그래도 대한민국은 많은 발전을 하지 않았나.

“기업을 중심으로 한 민간의 힘이라고 본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그동안 패스트 팔로어로서 추격을 잘했고, 그런 과정에서 창의적 기풍도 발현되기 시작했다. 정치가 잘되면 민간이 지금보다 더 잘할 수 있다. 일본은 1927년에 지하철을 놓았는데 아르헨티나는 1913년에 들어섰다. 1900년대 초에는 아르헨티나가 프랑스나 이탈리아보다 잘살았다. 그런 나라가 후진국으로 추락한 이유는 정치 혼란 때문이다. 경제가 정치를 애써 키워놔도, 정치가 경제를 잡아먹는 것은 순식간이다. 대중이 포퓰리즘에 맛을 들이면 정치인들이 그걸 포기하지 못한다. 정치 발전과 경제 발전은 따로 가지 않는다.”

―정치 혼란이 장기화하는 것은 민주적 견제 장치가 부재하기 때문인가.

“정치가 혼란스럽게 돌아가면 그걸 바로잡아 주고, 감시·견제하는 역할을 시민사회가 해야 한다. 시민단체가 정치 하위조직으로 전락하면서 이익 집단화됐다. 시민사회 안에서 세상을 제대로 보는 훈련을 받은 지식인들이 호루라기 역할을 해야 하는데 지식인들도 정치 주변인으로 전락했다. 정치 회복, 정치 정상화가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다.”

최 교수는 우리가 ‘K’자 변곡점에 있다고 진단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상향으로 나라가 지속 발전하느냐, 아니면 우하향으로 몰락하느냐 하는 변곡점에 있다는 것이다.

―우상향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희망이 있다면 산업이다. 정치가 혼란스러워도 산업이 살아 있으면 나라가 발전할 수 있다. 그래서 누가 대통령이 되든 기업은 과하게 건드리지 않아야 한다. 아르헨티나는 포퓰리즘에 갇혀 기업을 건드렸다. 규제를 풀고 기업에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해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의 희망은 ‘문화’와 ‘기업’이다. 기업과 문화 외에 제대로 살아 있는 분야가 어디 있나.”

―차기 정부에서 가장 역점을 둬야 할 분야는 무엇인가.

“과학화와 교육이다. 그래야 4차 산업혁명에 빨리 올라탈 수 있다. 우리는 4차 산업혁명 인재 양성이 너무 늦다. 서울대에 인공지능(AI)대학원 정원이 40명이라고 한다. 이는 미래 준비에 손을 놨다는 뜻이다. 몇 백 명을 뽑아야 한다. 인재를 대량으로 배출하고, 법적 정비도 필요하다. 수월성 교육 없이는 인재 양성이 어렵다. 교육은 교육의 관점을 위주로 대해야 한다. 부동산, 도시, 사회 불평등, 계급 등 다른 관점을 위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교육 혁신을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국가가 대학에 자원을 투입하고 등록금 동결도 풀어야 한다.”

―비호감 대선이라고 하지만 차기 대통령을 선출해야 한다. 후보 선택 기준이 있다면.

“첫째는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방향,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한 국가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지를 봐야 한다. 이 순간에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반드시 잡아야 할 시대의 급소, 즉 국가 어젠다를 갖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그런 다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최 교수는 이를 ‘인격’이라고 함)을 갖추고 있는지 따져야 한다. 셋째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을 쓰는지를 꼭 봐야 한다. 넷째는 그 사람이 말을 얼마나 엄중하게 하는가다.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다섯째는 국가관이다. 민족과 국가 사이에서 어느 쪽을 더 우선하는지, 대한민국에 자부심이 있는지 없는지를 반드시 따져봐야 한다.”

―부족한 후보라도 성공한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길이 있나.

“리더가 자질이 안 되더라도 성공하는 방법이 있다. 경청하는 거다. 듣는 능력이다. 중국 고대에 가장 불안한 황제이면서 가장 큰 대업을 이룬 대표 인물이 한나라 고조 유방(劉邦)이다. 배운 것도 없고 주변 친구들은 한량들이었다. 그런데 유방은 타고난 경청자였다. 그가 천하를 통일하고 나자 육고(陸賈)란 신하가 ‘황제는 이제 고전(철학)을 공부하십시오’라고 말했다. 유방이 ‘내가 말 타고 전장에서 피 흘릴 때 너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가 이제 와서 공부하라고 하느냐’고 하니까 육고가 ‘말 잔등에 올라타 천하를 통일했다고 해서 말 잔등에 올라탄 채로 천하를 경영할 수는 없습니다’고 했다. 그런데 유방이 그 말을 알아듣는다. 이게 유방을 위대한 통치자로 만든 핵심이다. 듣는 능력이 있다면, 이미 부족한 후보는 아니다.”

―대부분 리더는 쓴소리를 듣기 싫어한다.

“준비가 안 된 사람,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은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 듣는 능력이 인격적으로는 최고 높은 수준의 능력이다. 여기에 하나 더 덧붙이자면,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만 있으면 불안한 리더도 큰 성과를 낼 수 있다. 그런데 자기의 부족함을 아는 고도의 인격적 성숙이 있어야만 비로소 듣는 능력이 생긴다.”

―최근 ‘대통령 리더십’이 잇달아 실패한 이유도 같은 것인가.

“DJ 이후 대통령들이 정치인으로 권력을 잡은 다음에 국가경영자로 변신하는 데 실패했다. 대통령은 정치인이 아니라 국가경영자다. 국가 경영에 대한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대통령이 되는 경우가 너무 잦다. 국가와 민족을 구분하고 대통령을 왜 군 통수권자라고 하는지 정도는 알아야 한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세상을 바꿔 놓고 있다. 어떻게 봐야 하나.

“기술 문명은 준비돼 있지만, 그때그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시대적 조건에 따라 정체 현상을 빚는다. 이때 강제로 적응시키는 일이 일어난다. 2가지인데 전쟁과 팬데믹이다. 전염병인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면서 중세 봉건제가 막을 내리고, 르네상스가 일어났다. 우리나라에 이미 비대면, 원격기술이 있었지만 여러 조건 때문에 적용되지 않다가 이번 팬데믹으로 일상화하는 일이 벌어졌다. 팬데믹 상황에 적응하는 모습이 우리의 미래 모습일 것이다. 팬데믹이 많은 고통을 주고 있지만, 한편으론 기술 문명을 앞으로 가게 하는 촉매제 역할도 한다고 생각한다. 팬데믹을 통해 국가의 통제와 개인의 자유 문제가 논란이 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