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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게재 일자 : 2022년 01월 18일(火)
“연암의 ‘드넓은 세계를 보라’는 외침…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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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절단이 청나라 수도 연경(현재의 베이징)을 방문한 장면을 그린 단원 김홍도의 ‘연행도’. ‘열하일기’는 연경 방문 과정을 기록한 수많은 연행기와 연행록 가운데서도 백미로 꼽힌다.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김명호 전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서울 서초구 자택에서 최근 출간한 ‘열하일기 연구’ 수정·증보판을 펼쳐 들고 있다. 김명호 전 교수 제공

■ ‘열하일기 연구’ 증보판 출간 김명호 전 서울대 국문과 교수

급속한 세계의 변화 직시하고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야

초판에서는 연암 등 실학파가
주자·불교·서학 등 섭렵 방점

32년만의 수정·증보판에서는
‘西學에서 가장 큰 영향’ 평가


“연암이 ‘열하일기’를 통해 18세기 조선에 던진 메시지는 ‘열린 마음으로 드넓은 세계를 보라’는 것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식 사고에서 벗어나 세계의 변화를 직시하고 조선의 갈 길을 찾아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지금의 우리는 어떤가요?”

지난 1990년 ‘열하일기 연구’를 통해 연암 박지원(1737~1805)에 대한 학계 연구의 중심을 ‘허생전’ ‘호질’ 등 소설에서 ‘열하일기’ 자체로 옮겨놨다는 평가를 받은 김명호(69) 전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32년 만에 이 책을 전면적으로 수정·증보해 펴낸 김 전 교수는 지난 14일 문화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완전히 개방된 세상을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사고방식 면에서는 여전히 한국 중심주의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것 아니냐”며 이같이 물었다. 김 전 교수는 “연암의 메시지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했다.

40여 년에 이른 김 전 교수의 학문 활동은 연암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 조선 후기 연암을 비롯한 실학파 지식인들의 근대화 노력을 규명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32년 만의 수정·증보판 출간이라는 이례적인 작업을 한 것도 학자로서 마지막 숙제를 하는 심정으로 연암 평전을 준비하던 중 ‘열하일기’에 대한 학술적 연구 성과를 다시 종합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제게 많은 감화를 준 스승 우전 신호열 선생님은 ‘진정한 대학자가 되려면 최소한 3개의 큰 봉우리에 올라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3대 고봉은 연암 박지원과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입니다. 연암 한 분만 파고들어도 평생이 걸릴 정도로 이분들은 정말 높은 산이었습니다.”

수정·증보판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부분은 연암을 비롯한 실학파의 사상에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서학(西學)이었음을 분명히 한 점이다. 초판에서는 연암이 주자학뿐 아니라 서학과 도가 사상, 불교 사상까지 다양하게 섭렵했다는 데 방점을 뒀지만, 이후 연구 성과를 종합하면 서학의 영향이 지대했다는 얘기다. 이는 연암과 박제가, 이덕무 등 실학파 사상가들에 대해 유학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평가하는 학계 일부의 평가와 다르다. “연암은 인간관계 면에서 신분제의 상하질서에서 벗어날 것을 강조했습니다. 또 청나라 사람들에 대해서도 오랑캐라고만 하지 말고 평등한 관계에서 우정을 나눠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사상은 마테오 리치의 ‘교우론’과 같은 서학에서 영향받은 겁니다.”

1780년 건륭제의 칠순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청나라 수도 연경(燕京), 즉 지금의 베이징(北京)을 거쳐 열하(熱河)를 다녀온 과정을 기록한 ‘열하일기’가 당대뿐 아니라 구한말 개화파에게까지 막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확인한 것도 수정·증보판의 빼놓을 수 없는 성과다. 김 전 교수는 58종에 이르는 ‘열하일기’ 이본(異本)을 종합 분석함으로써 ‘열하일기’가 지식인 사회에서 얼마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는지 설명했다. 지난해 8월에는 유득공이 연암을 극찬하는 내용의 서문을 붙인 이본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온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이본이 이렇게 많은 데에는 정조가 1792년 ‘열하일기’를 문제 삼아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추진하는 등 사회 전반에 서학에 대한 경계 분위기가 강해진 것과 무관치 않다. “이본들을 보면 단순한 오·탈자나 필사할 때 실수에 의해 차이가 나타난 게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서학에 관련된 천주당이라는 표현을 지운다든가, 다른 글자로 바꾸는 식으로 이본들이 아주 의미 있는 차이를 보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수많은 이본이 나온 것은 “그 자체로 연암의 지대한 영향력을 보여주는 징표”라고 김 전 교수는 설명했다.

김 전 교수는 이번 수정·증보판을 준비하면서 “30대의 신진 학자였던 나와 시공을 초월해 학문적 대화를 나누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30년 전에는 1980년대 유행했던 이른바 ‘내재적 발전론’의 영향 속에 초판을 썼다면,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졌다. “‘식민지 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 가운데서 구태여 편을 갈라야 한다면 ‘내재적 발전론’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세종대왕 시절 얘기나 하는 소박한 생각으로는 탈민족주의의 공격을 제대로 방어할 수 없습니다. 보다 실증적이고 탄탄한 기초 위에서 근대화의 기원을 논해야 합니다.”

김 전 교수가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 비판적이기는 이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학문적으로 너무 게으릅니다. 이들은 조선의 국력이 가장 약했던 구한말을 기준으로 삼아 조선의 역사 전체를 역투영합니다. 지리멸렬했던 모습이 조선의 전체인 것처럼 단정하고 17~18세기 조선의 실상에 대해서는 탐구를 안 해요. 연암에서 그 손자인 박규수, 여기서 개화파로까지 이어지는 도도한 흐름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중국 제일의 장관은 광활한 영토나 아름다운 산수, 화려한 누각, 거대한 성곽이 아니라 “깨어진 기와조각과 똥 부스러기”라고 했다. 청나라 번영의 근원을 직시하고 배워야 한다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이용후생(利用厚生)의 철학이다. 김 전 교수는 이는 격변의 시기를 사는 우리 세대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강조했다. “17~18세기 영·정조 시대는 조선을 포함한 동아시아가 처음으로 서구 열강이 주도하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와 접촉한 시대입니다. 그러나 군주나 지배층은 논외로 하더라도 가장 개명했다는 지식인들조차 이런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현실을 전혀 모른 채 반청사상에 사로잡혀 ‘우리 조선이 주자학을 가장 잘 계승한 소(小)중화다’는 과대망상에 빠져 있었죠. 열린 마음으로 세계의 변화를 보라던 연암의 외침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울림이 있습니다.”

오남석 기자 greente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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