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캄한 사람도 쓸쓸한 사람도… 무언가 얻어갈 영적 쉼터 소망”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조광호 신부가 강화 동검도에 짓고 있는 명상센터의 일부인 ‘동검도 채플’. 조 신부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이 창을 이루고 있고, 건물 뒤쪽으로는 강화 바다의 갯벌과 야산이 보인다.

■ 조광호 신부의 ‘강화 동검도 명상센터’ 찾은 김남조 시인

‘동검도 채플’ 75세 조광호 신부
“삶이 고단한 분들 상담도 하고
인문학 대화 커리큘럼 만들것
젊은이들 결혼식도 할수 있게”

격려차 들른 95세 김남조 시인
“사람들 고뇌 떨쳐버릴 수 있게
공간 만든 신부님의 결심 탁월
우리나라 유리화 예술 권위자”

강화 = 글·사진 장재선 선임기자

한국 현대시문학사의 대표적 인물인 김남조(95) 시인이 봄이 오는 길목에서 인천 강화도를 찾았다. 수십 년 동안 교우해 온 조광호(75) 신부가 짓고 있는 ‘명상센터’를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지난 17일, 김 시인과 함께 온 이연수(77) 모란미술관장은 “시인께서 최근 편찮으셔서 고생하셨는데, 이제 나아져서 외출하실 수 있었다”고 전했다. 조 신부는 “천사가 여행을 하면 태양이 웃는다는 말이 있는데, 시인께서 오시니 날이 환하다”고 화답했다.

명상센터는 강화 동검도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내달 개소할 예정으로 막바지 건축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먹고 마시며 떠드는 곳이 아니라 고요히 명상하고 대화하는 영적 쉼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조 신부는 “문화·영성 잡지 ‘들숨날숨’을 시작했던 20여 년 전부터 명상 공간을 꿈꿔왔으나 다른 일들에 밀려서 이루지 못했다”며 “바다를 접한 이곳 땅을 본 후 30분 만에 매입 결정을 했다”고 전했다. 이른바 차경(借景)을 통해 영혼이 쉴 수 있는 장소로 최적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린 것은, 서울에서 초지대교를 건너서 동검도로 오는 길의 풍광이 빼어났기 때문이었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왼쪽으로는 널따란 갯벌이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겨울 들녘과 작은 산들이 이어졌다.

“달이 지구의 물을 끌어당기는 밀물과 썰물에 의해 갯벌이 드러납니다. 저 갯벌이 있기에 우리 지구가 아예 썩지 않습니다. 아무리 욕심 많은 사람도 저기에 집을 짓진 못하지요.”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김남조(가운데) 시인이 강화 동검도 명상센터를 둘러본 후 조광호(왼쪽) 신부, 이연수 모란미술관장과 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다.

조 신부는 자연 속에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강화도가 먹고 마시며 노는 관광지로만 인식되는 게 안타까웠다고 했다. 작년에 매입한 동검도 땅에 3층짜리 건물을 짓고 그 옆에 자그마한 채플을 마련했다. 큰 건물은 조 신부가 인천에서 운영해 온 연구소 ‘스페이스 & 글라스 아트(Space & Glass Art)’에서 경비를 충당했다. ‘갤러리 채플’이라는 이름으로 예술품을 보고 느끼며 명상을 하는 공간으로 활용한다. ‘동검도 채플’로 명명된 작은 건물은 그의 지인 30여 명이 기부금을 내서 지었다고 한다.

“세부 운용 계획은 지인들과 상의해서 정하겠습니다만, 예약제로 소수 인원이 모이는 공간으로 꾸려갈 것입니다. 삶이 고단한 분들은 상담도 하고, 젊은이들이 작은 결혼식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문학을 통해 대화하는 커리큘럼도 만들어 볼까 합니다.”

조 신부의 말을 유심히 듣고 있던 김 시인이 “저기 갯벌에 바닷물이 들어오면 여기가 마치 대양 위에 떠 있는 배와 같은 느낌을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김 시인은 “사람들이 자신의 고뇌를 떨쳐버릴 수 있는 공간을 만든 신부님의 결심이 탁월하다고 생각한다”고 격려했다. 독실한 불교도이면서도 조 신부와 오랫동안 교우해 온 이 관장은 “명상센터가 종교를 넘어서 개방된다고 하니 반갑다”며 웃었다. 조 신부는 “일반 시민들이 영적 연대를 이루는 암자 역할을 하기 바란다”고 했다.

김 시인은 다리가 불편해 휠체어에 앉았으나 또렷한 음성으로 “캄캄한 사람, 쓸쓸한 사람, 말하고 싶은 사람들이 와서 무언가를 얻어갈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며 각 층의 공간 구성에 대한 조언을 상세히 전했다. 조 신부는 “부지 상황, 경비 등의 문제로 다 수용할 수는 없겠으나, 고마운 말씀들을 잘 새기겠다”고 했다.

조 신부는 서울 가톨릭대를 나온 사제이자 독일 뉘른베르크 조형예술대를 졸업한 후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해 온 미술가이기도 하다. 유리에 투명 유약으로 그림을 직접 그리는 스테인드글라스 아트로 정평이 나 있는데, 다양한 재료와 디지털 기법을 가미해 날로 새로운 작품을 만들고 있다. 부산 남천동 성당, 옛 서울역 로비, 숙명여대 박물관 로비, 대구 범어동 성당 등에 그의 유리 작품이 있다. 그는 회화, 드로잉, 환경조형물 등의 영역에서도 활동해왔다. 서소문 순교자 현양탑 등 국내외 30여 곳의 가톨릭 교회에 대형 회화와 조각, 제단 벽화가 있다. 서울 지하철 2호선 당산철교 구간에서도 그의 대형 벽화(250×6m)를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유리 예술의 최고 권위자이지만, 나에겐 그저 젊은 신부님이지요.” 김 시인은 칠순이 넘은 사제 미술가에게 상찬을 겸한 농을 건넸다. 그러면서 명상센터의 2층 창문에 스테인드글라스 아트를 적절히 배치하라고 당부했다. “바다가 있는 밖과 예술이 있는 안에 두루 신비가 있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김 시인은 명상센터를 다 둘러본 후 이어진 차담(茶談)에서 “내 여명(餘命)이 어떻든지 한국의 앞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며 “대선 후 혼란한 상황이 오더라도 우리 국민이 잘 헤쳐나가 꼭 희망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했다. 조 신부와 이 관장은 미소로써 공감을 표했다.

이날 만남을 한 지 이틀 후 조 신부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명상센터는 한국 최초 스테인드글라스 미술관 역할도 할 것입니다.” 예술 작품을 통해 마음을 정화하는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문학인이기도 한 조 신부의 문자는 그가 김 시인과 헤어지며 했던 말을 절로 떠올리게 했다. “5월쯤 다시 오셔서 봄빛 속의 강화도를 맘껏 즐겨 보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