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갑 넘어 호기심에 남극근무 자원… 극한 환경서 감사와 겸손 배워”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김용수 외과의가 지난달 28일 부산의 한 병원에서 자신의 남극 체험담을 이야기하며 활짝 웃고 있다. 윤성호 기자

■ M 인터뷰 - 장보고 기지 근무하고 ‘남극일기’ 펴낸 김용수 외과의

59세에 구직 사이트서 알게 된
쇄빙선 아라온호 3개월간 근무
남극의 황홀한 풍경에 푹 빠져
2015년 장보고 기지 의료대원

단 한번도 지루하다 생각 안해
해 없는 3개월 극야 기간에도
어둠 속에 빛 있다는 것 깨달아
은하수 아래 클래식 맛 못잊어

펭귄이 못살면 인간도 다 죽어
공존을 위해서도 철저히 보호
‘범사에 감사하라’ 성경 구절
남극에 가서 그 의미 알게됐다

환갑을 넘긴 의사가 지구에서 가장 추운 남극 대륙에서 1년간 의료 대원으로 근무하고 ‘남극 일기’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보통 사람은 평생 가 보기 힘든 극지의 땅. 1년에 0도 이상인 날이 거의 없고, 겨울철 평균기온 영하 35도에 바람까지 불면 체감온도가 영하 55도를 훌쩍 넘기는 만년 설빙. 해가 지지 않는 연중 100일의 백야(白夜)와 해가 뜨지 않는 93일의 극야(極夜)를 견뎌야 하는 극기 훈련장. 헬기가 바다에 불시착하는 불상사에 대비한 탈출 훈련은 기본이고, 얼음장보다 차가운 남극 바다에 빠졌을 경우 동료끼리 두 팔로 팔짱을 끼고 둥근 고리를 만들어 구조대가 올 때까지 발로 물장구를 치며 버티는 생존 훈련까지 받아야 하는 곳. 언제 생명을 잃을지 모르는 위기에 늘 긴장해야 하는 험지. 왜 이런 고생을 자청한 것일까. 의문 부호를 머리 한구석에 매단 채 김용수(66) 외과의가 근무하는 부산의 한 병원으로 향했다.

―남들은 은퇴할 나이인 61살에 남극 대륙 1년 근무를 자원하게 된 동기는.

“한마디로 호기심이다. 부산의 한 병원에서 페이닥터로 일하다가 2013년 계약이 종료된 후 ‘메디게이트’라는 의사 구직 사이트에 들어가게 됐다. 이때가 59살, 환갑을 앞둔 나이였다. 그런데 극지연구소에서 남극 바다를 3개월간 도는 쇄빙연구선 아라온호에서 일할 의사를 찾는다는 공고를 봤다. 마침 면접을 보는 극지연구소 소속기관이 부산에 있길래 당장 찾아갔다. 딱 1명의 의사를 채용하는데 외과의는 환영받는 전공이었다. 응급상황에서 특기를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렵지 않게 3달 계약을 맺었다. 이게 시작이다. 배에서 눈으로 본 남극은 황홀했다. 항해를 마치고 한국으로 귀항한 다음, 호시탐탐 다시 갈 기회를 노리다가 2년 후 장보고 과학기지에서 연구대원들을 돌보는 의료 대원으로 드디어 남극 대륙을 밟게 됐다. 역대 남극기지 근무 의사 중 가장 나이가 많아 최연장자 기록을 세웠다고 하더라.”

그의 책은 저자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소록도를 비롯한 다양한 곳에서 근무해 왔다. 2013년 대한민국 쇄빙연구선 아라온호의 선의(船醫)로 승선해 3개월간 겨울의 남극 바다 웨들해를 항해하며 남극에 빠졌다. 이를 계기로 2015년 11월 제3차 대한민국 남극 장보고 과학기지 월동연구대 의료대원으로 선발돼 1년간 16명의 월동대원 중 1명으로 남극에서 보냈다. 현재 부산의 한 종합병원에서 응급 환자를 돌보는 의사로 일하며 당시 하루도 빠짐없이 썼던 일기를 토대로 이 책을 썼다.’

―남극의 추위는 어느 정도인가.

“밖에 나가면 우선 기관지가 얼지 않도록 천천히 숨을 들이마셔 데워진 공기가 폐로 들어가도록 호흡을 조절한다. 그래도 수백 개의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차가운 공기가 노출된 피부로 파고든다. 2∼3분도 안 돼 대리석 마스크를 쓴 듯 얼굴 피부가 뻣뻣해지고 코안 깊숙한 곳이 바싹 마른 듯 당기는 느낌이 든다. 얼른 실내로 돌아오면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하고 그새 얼었던 비점막이 해동되면서 말간 콧물 몇 방울이 코에서 떨어진다. 두꺼운 파카에 세 겹의 하의, 윈드스토퍼 방한모, 수술 마스크 위에 아들이 장만해준 겨울용 마스크와 귀마개, 손가락만 뺄 수 있게 바닥이 터진 다운 장갑, 캐나다제 중국산 특수 방한화로 중무장해도 그렇다.”

―1년간 한정된 공간에서 생활하는 환경이 코로나19 강제격리나 옥살이처럼 답답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는가.

“단 한 번도 지루하다, 외롭다, 갑갑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남극 대륙의 겨울은 얼핏 보기에 회색의 얼음 하나, 단색밖에 존재하지 않는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 잘 보면 남극에도 사계가 있다. 같은 색깔 안에 엄청나게 다채로운 색채가 들어 있다. 마치 컬러사진보다 흑백사진에 더 깊이가 있듯이. 심지어 해가 전혀 뜨지 않는 3개월의 극야 기간에도 어둠 속에 빛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는 ‘빛이 존재하지 않는 검은색이란 없다’고 말했다. 캄캄한 어둠은 검은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둠 속 빛이 사물이 지닌 본래의 색깔을 끌어내 본질에 닿도록 만든다. 달이라도 뜨면 빛과 어둠이 기막힌 조화를 이루어 황홀한 색채를 만들어 주었다. 챙겨 간 클래식 CD를 틀어 놓고 극야의 은하수 아래에서 듣는 맛은 뭐라 말할 수 없다.”

그는 이런 남극의 참맛을 알려면 장보고 기지가 딱 들어맞는다고 귀띔했다. 세종 과학기지는 위도가 낮아 백야와 극야가 없는 데다 외국 기지들도 많아 번화가처럼 시끌벅적하지만, 장보고 기지는 홀로 오붓하게 극야의 오로라를 감상하는 것 같은 신비한 체험을 하기 좋다고 한다. 남극 대륙은 긴 낮과 밤이 약 3개월씩 교차한다. 극야와 백야는 인간의 24시간 생체 리듬을 흩트려 놓는다. 뇌에서 분비되는 수면 호르몬 멜라토닌이 혼란에 빠지기 때문이다. 충분히 어두워야 분비되는 멜라토닌이 백야 기간에는 덜 나와 수면 부족과 불면증, 심지어 우울증에 빠질 수 있다. 멜라토닌 알약을 먹어 보충하지만 이마저 듣지 않으면 말 그대로 ‘미친다’. 과거 사례로 남극 근무 중 우울 증세가 심해져 자살하거나 불을 지르는 등 사고를 친 대원의 비극적인 이야기가 떠돌 정도다.

―황제펭귄, 아델리펭귄, 갈매기 등 남극의 생명체에 대한 관찰이 돋보인다. 인간과 동물은 지구에서 어떻게 공존해야 할까.

“가기 전에 동물 책을 여러 권 읽었다. 옛날에는 고래 기름을 정제하려고 펭귄을 산 채로 태워 연료로 썼다고 한다. 인간의 신체 구조는 동물과 비교해 봐도 우수하지는 않다. 그래도 종 전체에서 최상위 포식자다. 생태계 하부구조가 무너지면 인간도 못 산다. 펭귄들이 못 사는 환경이 되면 우리도 다 죽는다. 공존하기 위해서라도 이들을 철저하게 보호해야 한다. 난 기지 근처에서 늘 보는 5∼6마리의 바다표범에게 이름을 붙여 줬다. 자세히 보면 털, 눈 모양, 무늬가 다 달라 쉽게 구분이 됐다.”

―남극 근무 경험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나는 무엇이 달라졌나.

“추위에 대한 내성이 생겼다. 웬만한 겨울에도 괜찮다. 가장 크게 바뀐 점은 감사와 겸손이다. 흔히 극지, 심해, 우주는 사람이 살 수 없는 3대 환경이라고 한다. 인간이 문명을 일구고 사는 평범한 일상의 공간이 정말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하 40도의 무서운 추위를 겪어 보면 ‘인간이란 참 나약하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혹독한 환경에서 펭귄, 물새, 물범이 사는 걸 보면 내가 가진 게 얼마나 많은가 하는 고마움도 느낀다. 찰스 다윈도 남극의 생명체는 세상 최악의 조건에서 산다고 썼다. 장보고 기지에서 내가 먹는 것, 입는 것 그리고 진료장비까지 모두 국민의 세금으로 산 물건이다. 참 감사하다. 남극에 가기 전에 습관적으로 교회는 다녔지만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의 말씀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남극에 가서야 그 의미를 알게 됐다.”

노성열 기자 nosr@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