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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김병종의 시화기행 게재 일자 : 2022년 04월 12일(火)
전부였던 사랑을 보낸 후… 더 크고 더 높은 세계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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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병종, 빈(牝), 85×115㎝, 한지에 먹과 채색.


■ 김병종의 시화기행 - (113)피렌체, 단테의 집 <끝>

두 번 마주쳤을 뿐인 베아트리체
감전되듯 강렬한 사랑에 휩싸여
“흡수되어버리는 행복”이라 정의

열살에 만나 스물넷에 돌연 사망
고문 같았던 ‘감정의 지옥’ 경험

상실의 에너지 통해 세계관 확장
문학·종교·정치 등 삶의축 이동
위대한 서사 문학 ‘신곡’도 완성


피렌체의 한 골목을 걷다가 돌담 위에 걸린 배너를 보게 됐다. 단테 박물관이었다. 그의 생가를 박물관으로 꾸민 것이다. 배너 아래에는 역시 돌담 선반 위로 작은 그의 흉상이 있었다. 자칫 지나쳐 버릴 뻔한 건물이었다. 문득 동시대의 ‘위대한 자’는 로렌초뿐 아니라 단테 알리기에리도 그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이 집을 나와서였을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10살의 소년 단테가 저 멀리 소녀 베아트리체의 모습을 처음 보았던 그 운명적인 날이 이 집을 나왔을 때였을까 싶은 것이다. 이제 단테의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 이야기는 거의 신화와 전설이 돼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둘이 손 한번 잡았다는 기록도 없다. 단테가 처음 보고 감전된 듯 느꼈던 그 강렬한 기억만이 저 홀로 그의 평생을 사로잡아 버렸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정확히 9년 후 두 번째 우연히 마주쳤을 때 베아트리체는 미소 지으며 먼저 인사했지만 단테는 얼어붙다시피 제대로 응대도 못했고, 그렇게 둘 사이의 만남은 다시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테는 평생토록 그녀를 잊지 못한다. 다른 여인과 결혼하고 나서도 베아트리체는 여전히 마음의 연인이었던 것이다. 그날 그는 왜 먼저 다가가지 못했을까,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을까. 후세의 사가들은 단테에게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으리라고 추정한다. 심한 매부리코에 째진 눈을 한 단테는 사실 잘생긴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피렌체의 또래 소년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못생긴 편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 점에서는 프랑스 소년 장 폴 사르트르도 비슷했다.

▲  ‘신곡을 들고 있는 단테’(도메니코 디 미켈리노, 1465년 작).

12살의 사르트르에게는 홀로 좋아하던 여자아이가 하나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그 곁을 지나갈 때 여자아이가 다른 아이들이 다 들을 만큼 큰 소리로 그의 외모를 비하하며 놀려 대는 소리를 듣게 된다. 소년 사르트르는 오랫동안 그날의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하지만 베아트리체는 결코 그런 식으로 단테를 대한 적이 없었고, 둘 사이에는 아예 대화 자체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살에 만난 소녀가 그의 생애를 사로잡아 버렸던 것이다. 무서운 일이었다.

이 대목에서 상담의학자인 정신과 의사 얄롬(Irvin D.Yalom)이 떠오른다. 스탠퍼드 의과대학 교수인 그는 뛰어난 문필가이기도 하다. 나는 가끔 그의 글을 읽으면서 문장에서 광채가 난다고 느낄 때가 많다. 그만큼 글을 잘 쓴다. 특히 ‘사랑’에 대한 그의 임상적 진단들은 한숨이 나올 만큼 예리하다. 그는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 일종의 ‘흡수돼 버리는 행복’ 상태 같은 것이라고 정의한다. 사랑에 빠짐으로써 외로움과 소외와 불안을 순간적으로 덮어 버리고, 그 대가로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소년 시절 어느 날 번쩍하며 섬광처럼 부딪친 사랑의 매직에 훗날 위대한 문인이자 철학자이고 정치가였던 단테는 거의 평생을 묶여 버렸던 것이다. 단테는 베아트리체를 실존으로 만나지 않은 상태서도 그녀의 숨소리와 체온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 베아트리체는 24살에 죽고 만다. 단테의 상실은 컸다. 그녀가 지척에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받고 있었지만 아예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의 신곡 3부작 중 가장 절절한 것은 ‘지옥’ 편이다. 베아트리체의 죽음 이후 그는 더 이상은 사랑의 소망이 자신을 끌고 갈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어쩌면 감정 지옥을 경험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상실이 모든 삶, 모든 순간에 작용된다는 모진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다. 그렇게 많은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사랑의 환상에서 깨어났고, 세계는 아연 확충된다. 삶의 축이 문학, 신학, 정치 같은 거대 담론으로 옮겨 갔다.

▲  김병종 화가·가천대 석좌교수
좀 전 우피치 미술관에서 만난 단테의 조각상은 얼굴이 절벽 같고 밀랍 같았다. 조각뿐 아니라 그림에서도 마찬가지다. ‘베아트리체를 보는 단테’(헨리 홀리데이, 1883년 작)나 ‘신곡을 들고 있는 단테’(도메니코 디 미켈리노, 1465년 작), 들라크루아의 ‘단테의 조각배’(1822년 작)에서도 똑같다. 차갑게 노기 띤 얼굴, 한 줌의 미소도 없는 얼음 같은 표정으로 일관돼 있다. 얄롬은 사랑으로부터 버림받은 한 여인에 대해 “무시무시하게 몇 달이 흘러갔다. 그녀는 모든 걸 미워했다. 삶은 고문이었다”고 썼다. 단테는 베아트리체가 갑작스럽게 꽃 같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후 그때까지 홀로 그녀를 연모하며 썼던 시를 모아 ‘새로운 인생’(1295)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간하는데, 이로써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사랑 이야기가 비로소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새로운 인생’은 어쩌면 다시는 사랑에 빠지는 일 없이 살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이자 베아트리체에 대한 별사(別辭)였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독배를 마셔 버린 소년. 그는 어찌 보면 상실한 사랑에 대한 보상을 스스로에게 요구했던 것처럼 이후 질풍노도의 삶을 산다. 단테의 경우는 사랑의 상실을 문학과 종교, 정치의 에너지로 변용시켜 갔다. 그에게 상실과 아픔은 위대성으로의 도약을 위한 발판이 돼 준 셈이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분노와 좌절이 종종 자살이나 전쟁 같은 파괴적 극단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단테는 문필가로서 득명하는 동시에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고, 탁월한 언변과 지성으로 피렌체 행정부 최고 위원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그러나 정적들에 의해 기소돼 고향 피렌체를 떠난 후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부랑(浮浪)의 삶을 살게 된다. 20년 가까이 망명자의 신세로 떠돌아야 했던 것. 이 쓰라린 세월 동안 그는 위대한 서사 문학인 ‘신곡’을 완성했다. 사랑을 잃은 뒤에 더 크고 높은 위대한 사랑에 눈떴던 것이다.

화가·가천대 석좌교수


■ 단테 알리기에리와 신곡 (Durante degli Alighieri, 1265. 3∼1321. 9)

본명은 두란테였으나 유아 세례명인 단테(Dante)로 불리게 됐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소년가장이 됐는데, 그 나이 10살 때 아버지 친구의 딸인 9살 소녀 베아트리체(비체)를 보고 한눈에 반해 버린다. 이후 다른 여성과 결혼하고 나서도 계속 연정을 품게 되고, 그녀는 단테가 사랑의 연작시를 쓰게 되는 동력이 된다. 하지만 베아트리체가 일찍 세상을 뜬 후 집필 활동과 함께 정치 일선에도 뛰어든다. 한때 집권 세력의 중추가 되기도 했지만 곧 정적들에 의해 기소되면서 피렌체로 돌아오지 못하고 떠돌게 된다. 20년 가까운 망명생활 속에서 불후의 명작 ‘신곡’을 쓰게 되는데 원래 이 작품의 제목은 ‘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미디(희극)’였다. 이후 단테의 예찬자인 보카치오가 이 작품이 단순한 코미디가 아닌 ‘신적인 코미디’라고 명명함으로써 바뀌게 되고,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신곡(神曲)은 일본어 번역 과정에서 다시 바뀐 것이다. 이 작품은 토스카나 지방의 언어로 지옥과 연옥, 천국의 3부작으로 나뉘어 쓰였는데, 작가가 라틴어가 아닌 피렌체의 일상어로 쓴 것은 종교인이나 지식인이 아닌 일반인도 널리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후세 문학인들은 물론 음악, 미술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 시화기행이 이번 회로 마치게 됩니다. 그간 함께해 주신 독자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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