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다시 소확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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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입력 2022-04-15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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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희 작가

거리두기 3년째 유대관계 실종
소확행의 필요성 갈수록 커져

‘2%기적’못이루고 떠난 美가수
“자신이 먼저 행복해져라”주문

쇼펜하우어 “건강이 행복조건”
내 버킷리스트 첫 번째는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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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오랜만에 대학은사님을 찾아뵈었다. 뽀얗고 환하게 피어오르는 햇빛을 따라 꽃을 보러 간 자리에 그분이 계셨다. 선생님은 퇴직해 고향으로 돌아와 산언저리에 생의 마지막 집을 마련하고, 정갈하게 들어앉으셨다. 그곳에서 선생님은 자칫 외로워질 수 있는 노년기의 삶을 소확행의 실천을 통해 행복해지려 애쓰고 계셨다. “행복하다가 아니고, 행복해지려 애쓴다”는 그 말씀이 외롭다는 말로 들려 명치 부근이 시큰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능동적으로 삶의 마무리를 하고 계시는 모습이 선생님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여기저기 망가져 맑은 정신을 방해하는 육신의 고통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왜 그런 선생님이 오래된 관목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땅에 다붙듯 납작 엎드린 나무 말이다. 소확행이라는 말이 생각난 건 그때였다. ‘그래, 한때 소확행이 유행했었지.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소확행.’ 선생님은 그 소확행을 위해 숙제처럼 계절마다 버킷리스트를 만들어 하나씩 실천해 가시면서 노년의 삶을 잘 견디고 계셨다. 봄 들판에서 나물 캐기, 직접 캔 쑥으로 쑥국 다섯 번 끓여 먹기, 맛있는 커피 가게를 찾아가 커피 마시기… 이 봄 선생님이 작성한 버킷리스트 목록이었다. 대수롭지 않은 그것들이 무슨 버킷리스트가 될 수 있을까 싶지만, 실행으로 옮기기까지는 그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이미 쑥을 캐고 쑥국을 끓여 드셨는지 거실에는 쑥 향기가 도는 것도 같았다.

감사는 감사할 수 있는 자세가 되었을 때 비로소 찾아오고 눈에 들어온다. 행복은 그 감사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가만 생각해보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많다. 문득 흘러나오는 오래된 노래가 지난날의 은밀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고, 커피 한잔이 누군가를 생각나게 하거나 우연히 발견한 메모에서 잊고 있었던 에피소드가 재생되기도 한다. 그런 마법 같은 일들 속에 행복은 숨어있는 것이다. 하긴 그 마법의 일들이 다 행복일 수만은 없다. 때에 따라서 그것들은 끔찍한 기억을 소환하는 스위치가 될 수도 있다.

선생님 집을 나오면서 드는 생각이 지금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소확행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스스로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 지루하고 짜증 나는 일상을 견디게 해주는 것은 소확행에 있지 않겠는가. 맛있는 커피집을 찾아가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일처럼 자신을 위한 작은 사치나 호사는 당장의 삶을 위로하고, 나아가 그것들은 타인과 사회에 대한 관대함으로 귀결된다. 어디 소확행뿐일까. 아모르파티, 카르페디엠, 욜로처럼 우리는 한때 삶의 의미들을 정의하는 단어들을 외며 허투루 사는 것을 경계하기도 했다.

한데 코로나 대유행으로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아니, 코로나 때문만이 아니다.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은 잔뜩 화가 난 얼굴을 하고 가시 돋친 말들로 타인들을 공격해대기 시작했다. 소확행이 사라진 자리에는 혐오와 갈등, 분노, 절망과 좌절이라는 단어들이 대신했다. 통용되는 단어를 보면 그 시대를 유추해볼 수 있는데, 지금 우리는 분노와 혐오의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념갈등, 정파갈등, 젠더갈등, 세대갈등, 지역갈등… 가히 갈등의 시대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시대다.

나 역시 길어지는 코로나 상황에 짜증이 늘었고, 까닭 없이 분노가 괴곤 한다. 어쩌면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른다. 역병은 우리의 안온한 삶을 무너뜨렸고, 사회적 거리두기가 3년째 이어지면서 끈끈한 유대관계도 많이 사라졌다. 다시 살아갈 힘은 타인의 위로와 격려 및 동조에 의해 형성되거나 배양되는데, 코로나는 그 기회와 연대마저 걷어가 버렸다. 그래도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하니 어쩌랴. 그렇다면 앙앙불락(怏怏不樂), 미워하고 증오하며 사는 것보다 선생님처럼 스스로 행복을 찾으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한 아름다운 가수를 안다. 제인 마르크제프스키. 그의 예명은 나이트 버드다. 그가 한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왔을 때 인상 깊었던 것은 환한 미소였다. 하지만 그는 생존확률 2%의 암 환자였다. 그는 탄식을 터트리는 사람들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0%가 아니잖아요. 내게는 2%가 있어요. 인생에 쉬운 때는 없어요. 자신이 먼저 행복해지지 않으면 안 돼요. 마음은 자신의 손에 달려있어요.” 그의 말이 일체유심조를 생각나게 했다. 일체유심조대로라면 지옥과 천국도 각자의 마음이 빚어내고,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마음이 빚어낸 세상 속에서 안간힘을 다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제인은 목전에 들이닥친 죽음에 굴복하지 않고 행복해지기 위해 오디션에 도전했고 하루하루 행복을 찾았다. 하지만 그는 2%의 기적을 이루지 못하고 올해 초, 31살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스스로 행복해지라는 주문이었다.

그가 누리지 못한 오늘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 선생님의 버킷리스트처럼 나도 항목을 적어봐야겠다. 스스로 행복해지기 위해. 행복론의 대가 쇼펜하우어는 행복의 조건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건강이라고 했으니 내 버킷리스트 첫 번째 항목은 산책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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