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맑실 “성장·낙관·의지… 마흔 번의 사계절, 굳건하게 버틴 비결이죠”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강맑실 사계절 출판사 대표가 지난달 29일 출판사의 40주년 기념 전시가 열리는 파주출판도시 지혜의숲에서 먼 산을 바라보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동훈 기자

■ M 인터뷰 - 창립 40주년 맞은 강맑실 ‘사계절’ 출판사 대표

1987년 입사 1994년부터 대표
월북작가 소설 ‘임꺽정’ 논란
직접 북한 방문해 저작권 해결

사회과학서 아동교양까지 확대
‘누가…똥 쌌어?’100만부 팔려

책의 위기라고? 반만 맞는 말
독자 만남 통로 넓히는 게 관건

매출 떨어졌을 때도 낙담 안 해
절망하지 않으니 늘 의지 넘쳐
책, 언제까지나 우리의 필수품

“사계절은 성장의 의미를 생각합니다.”

경기 파주출판도시에 자리한 사계절 출판사에 들어서면 보이는 현판 문구다. 다음 달 40주년을 맞는 사계절은 인문·어린이·청소년 전문 출판사. 그림책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 어린이 교양서 ‘반갑다, 논리야’ 등 수많은 히트작으로 아이들에게 성장의 자양분을 안겨 줬던 사계절은 40년 세월과 함께 단단한 정체성을 지닌 출판사로 성장했다. 사계절이 지나온 길은 강맑실 대표의 인생과도 겹친다. 그는 남편이 설립한 회사에 1987년 편집자로 입사해 1994년부터 대표를 맡고 있다. 매해 80여 종씩 그동안 펴낸 책만 2000여 종에 달한다. 소재와 주제는 각양각색이지만 사계절의 책엔 생명의 활기와 자연의 온기가 배어 있다. 국어 교사였던 아버지가 지어 준 ‘맑은 골짜기’라는 이름처럼 책으로 세상을 깨끗하게 만드는 강 대표를 지난달 29일 파주출판도시 지혜의숲에서 만났다.

―마흔 번의 ‘사계절’을 보낸 소회가 어떠신지요.

“눈 깜짝할 새라는 말을 실감합니다. 일제강점기(35년)보다 긴 시간이라고 누가 그러더군요. 1980년대엔 전력을 다해 독재 정권에 맞섰고, 1990년대 이후엔 가파르게 변화하는 시대 환경 속에서 어떻게 독자와 만날지 고민했지요.”

강 대표는 40년사에서 가장 중요한 책으로 ‘사회주의 인간론’과 ‘임꺽정’을 꼽았다. ‘사랑의 기술’로 잘 알려진 철학자 에리히 프롬이 편집한 ‘사회주의 인간론’은 1982년 말 출간된 사계절의 첫 책이다. 사회의 민주화라는 창업 정신이 담긴 책으로, 초기 10년간 진보·개혁 사상을 알리는 발판이 됐다. “사계절이 처음 자리한 곳은 서울역 맞은편에 있는 대우빌딩 뒷골목이었어요. 남편인 김영종 당시 대표는 대기업 빌딩과 노숙자·빈민 거주지가 공존하는 모습을 보며 ‘인간답게 사는 길’에 대한 생각을 가다듬었다고 해요.”

월북 작가 홍명희의 ‘임꺽정’도 빼놓을 수 없다. ‘임꺽정’은 홍명희가 분단 직전 북으로 건너가 부수상까지 지냈다는 이유로 역사소설의 최고봉이라는 평가에도 반세기 이상 입으로만 전해 오던 전설 같은 작품이었다. 정부는 당시 은밀히 유통되던 영인본(影印本·사진 촬영 등의 방법으로 복제한 책)을 바탕으로 한 책이 출간되자마자 판매 금지 조치를 내리고 책을 압수했다. 이에 사계절이 ‘출판금지 처분 무효 확인 심판’을 청구하자 당시 국무총리실 산하 행정심판위원회는 월북 작가가 쓴 ‘임꺽정’의 저작권이 사계절에 없다는 이유로 소송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며 기각했다. 이때부터 사계절은 북한에 저작권 양도를 줄기차게 요청했다. 마침내 2005∼2006년 강 대표가 두 차례에 걸쳐 북한으로 건너가 홍명희의 손자 홍석중을 만나 저작권 문제를 해결했고, 그사이 사법부로부터는 ‘판매 금지는 불법’이라는 판결을 이끌었다. ‘임꺽정’을 둘러싼 논란과 법적 투쟁은 시대를 잘못 만난 불운에 굴하지 않은 한국 출판인의 기개를 보여 준 상징적 사건이다.

―사회과학서에 집중하다 아동·청소년 교양도서로 확장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에 관한) 6·29 선언이 나오고 구소련이 붕괴한 1980년대 후반은 사회과학 책의 역할이 희미해진 시점이었어요. 사회과학 도서를 통해 알리려 했던 민주와 개혁 정신을 대중화하기 위해 ‘교육’으로 방향을 전환했어요. 유치원생부터 학생들까지 읽던 책을 모두 검토했는데 서구적 가치관을 주입하는 전집류가 대부분이었어요. 아동·청소년 도서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아이들이 볼 만한 좋은 그림책을 소개하는 작업부터 시작하자고 생각했죠.”

그렇게 탄생한 책이 사계절의 스테디셀러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다. 김 전 대표가 어느 유럽 책방에서 발견한 책은 두더지 머리에 똥을 싼 범인을 찾아가는 추리 구조로 재밌는 긴장감을 이어 간다. 이야기 말미에 두더지가 제 몸보다 수십 배는 큰 개에게 작은 똥을 투하하는 ‘복수’를 감행하는 장면은 귀여우면서도 사랑스러운 해방감을 전한다. 강 대표는 30년간 100만 부 넘게 팔린 이 책에 대해 “프로이트의 유아기 발달 분석을 기반으로 똥과 오줌 이야기에 열광하는 아이들의 심리를 건드린 게 주효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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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 중에는 위기철 선생의 ‘반갑다, 논리야’를 읽고 자란 독자도 많습니다.

“당시만 해도 부모들이 ‘우격다짐’하듯 강압적으로 아이를 가르치는 경우가 많았어요. ‘부모는 성장이 끝난 어른이고, 아이는 덜 배운 존재’라는 통념에서 비롯한 교육 방식이었죠. ‘반갑다, 논리야’는 어른과 아이가 같은 눈높이에서 ‘논리’로 대화하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책이에요. 계몽주의에서 벗어나 자연스럽게 웃고 즐기며 건강한 가치관을 심어 주려 했죠.”

지금은 ‘어린이·청소년·인문’이라는 3대 축이 사계절의 정체성으로 뿌리내렸으나 강 대표가 취임한 1990년대 중반만 해도 섣불리 경영서나 실용서에 손대는 시행착오를 겪었다고 한다. 매출 실적에만 급급해 ‘잘 팔릴 것 같은 책’을 연이어 내놓은 것이다. “영어단어 모음집과 인공항문 관리 지침서에 ‘안전운전 365일’ 같은 책까지 내다 1997년쯤 정신을 차렸어요. 출판사가 핵심 역량에 집중하지 않으면 공들여 쌓은 브랜드 이미지가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음을 깨달았죠. 분야를 확장한다고 매출이 따라오는 게 아니라는 뼈아픈 교훈을 얻은 시기입니다.”

―여기저기서 ‘책의 위기’라고 아우성입니다. 이를 돌파하기 위해 어떤 전략을 고민하고 계신가요.

“책의 위기라는 표현은 절반만 맞는 얘기입니다. 독서 인구 자체는 줄었을지언정 책을 사랑하는 독자는 과거와는 비교하기 힘들 만큼 폭넓은 선택지를 놓고 행복한 고민을 하니까요.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 출간 당시만 해도 단행본으로 된 그림책을 찾기 힘들 정도였지만, 지금은 내로라하는 어린이책 전문 출판사가 20개는 넘으니까요. 도서관에 가면 온종일 좋은 책만 볼 수 있는 시절입니다. 관건은 ‘책의 위기’에서 책을 구해 내는 게 아니라 뉴스레터·유튜브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 독자와 만나는 통로를 넓히는 일이겠지요.”

사계절은 지난달 26일부터 파주출판도시 지혜의숲에서 창립 40주년 기념 전시 ‘사계절 40, 책·사람·자연’을 선보이고 있다. 다양한 북토크·체험 프로그램을 무료로 즐길 수 있는 전시로, 다음 달 6일까지 이어진다.

―전시장에서 본 ‘자연과 사람, 생명, 모두를 그러안은 책’이라는 문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자연을 곁에서 볼 수 있는 파주출판도시에 회사가 있어 참 다행이에요. 새가 날고 나무가 자라는 자연의 변화를 일상적으로 느끼며 인간 역시 거대한 생태계의 일부라는 것을 배웁니다. 길가에 핀 야생화 한 송이에 감동할 줄 알면 사람도 깊이 사랑할 수 있겠지요. 자연에 군림하지 않는 겸손한 태도로 책을 만들겠다는 다짐을 담은 문구입니다.”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하셨나요.

“항상 책을 가까이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어요. 7남매 중 막내인데 언니·오빠 교과서를 보는 게 그렇게 재밌었어요. 어머니가 안타까웠는지 어느 날 50권짜리 계몽사 소년소녀 전집을 사 주시더군요. ‘작은 아씨들’ ‘날아가는 교실’ 같은 작품을 닳도록 읽으며 책 속엔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걸 알게 됐죠. 그저 좋아서 읽었을 뿐, 책을 만드는 사람이 될 줄은 몰랐는데 돌아보니 운명 같기도 하네요.”

강 대표가 지난해 3월 펴낸 ‘막내의 뜰’은 가족이 있어 든든하고 책이 있어 행복했던 유년을 되짚은 에세이다. 이 책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세상이 요구하고 강요하는 삶의 방식과 잣대를 좇지 않을 나만의 낙관과 의지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강 대표는 열렬히 소망하지 않았으나 운명처럼 흘러 들어온 출판계에서 오래 살아남은 비결 역시 ‘낙관’과 ‘의지’라고 했다. “남편이 불온서적을 출간했다고 여러 차례 끌려가도, 직원 월급 주기도 빠듯할 만큼 매출이 떨어져도 크게 낙담한 기억이 없어요. 가족의 사랑이 물려준 생래적 낙천성인 것 같아요. 절망하지 않으니 한두 번 실패해도 다시 시작할 의지가 생겼고요. 사계절이 앞으로 만들어 나갈 40년도 기대돼요. 어느 소설 속 문장처럼 책은 언제까지나 우리들의 ‘필수품’일 테니까요.”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