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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살며 생각하며 게재 일자 : 2022년 05월 13일(金)
어느 노배우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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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희 작가

환희·좌절의 세월 겪은 老배우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꽃 같아

자신을 비추는 성찰의 거울 통해
욕망 덜어내는 사람은 아름다워

잘 묵은 술처럼 향기 품은 어른
이것이 내가 꿈꾸는 희망이다


우연히 한 여성 노배우의 노래를 들었다. 마치 자분자분하게 말하듯 부르는 노래가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기교로 무장한 여느 가수의 노래보다, 성량이 커 소리가 짱짱한 젊은 가수들의 노래보다 팔순을 넘긴 노배우가 부르는 노래는 더 울림이 컸고, 뭔가 모를 애수를 안겨주었다. 살아온 세월만큼의 시간이 그대로 온몸으로 내려앉은 노배우의 표정은 담담하면서도 담백해 보였다. 그래서 순정해 보였다. 이제는 더 욕심낼 것도, 바랄 것도, 이룰 것도 없다는 듯한 그 표정이 마음을 건드렸다. 어깨의 힘을 빼고 두 팔은 편하게 내려뜨린 채 읊조리듯 노래하는 그의 뒤로 커다란 그림자가 배경으로 드리워져 있는 듯했다. 그 그림자는 내 눈에만 보이는 환상 같은 것이었다. 그가 걸어왔을 세월의 무게와 부피만큼의 그림자. 그것은 시간이 만들어낸 그의 아우라였다.

처음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담담하게 부르는 그 노래가 그토록 처연하고 아름답고 서러울 줄은. 방심하고 있다가 유탄을 맞은 듯 가슴이 뜨거워졌다. 노래가 가진 힘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아니 노래도 노래였지만, 어쩌면 그가 걸어왔을 세월의 무게가 던져주는 또 다른 애상과 각성이었을 것이다. 그 노배우는 노래를 통해 자신이 살아오는 동안 체득하고 확인한 삶의 풍경과 진실들을 이야기해주고 있는 듯했다. 눈부신 삶도 어느 순간에는 그 빛을 잃는다는 사실을. 그리고 감당하지 못할 좌절과 고통은 없다는 사실을. ‘나의 옛날이야기’. 노래 곡목이었다. 의도된 선곡과 창법이었겠지만, 듣는 내내 가슴이 시리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 순간이었다.

그 노배우에게서 권위가 느껴졌다.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누구나 다 가질 수 있는 것이 노인의 권위가 아니다.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고집과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혀서는 편협해지기 쉬운 것이 사람 아닌가. 게다가 참을성도 부족해진다. 그러니 존경받는 어른으로 나아가기가 어려운 것이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자신의 신념만을 고집하지 않고 바뀐 패러다임을 수용하며 길라잡이 역할을 하되, 때에 따라서는 자신보다 빠른 후배를 위해 슬며시 길을 비켜줄 줄도 아는 지혜를 가지는 것. 누구나 다 바라는 어른으로서의 노인 모습이다.

우리에겐 좋은 전통과 미덕이 있다. 장유유서. ‘나이 든 사람과 나이 어린 사람 사이에는 사회적인 순서와 질서가 있다’는 이 덕목은 삼강오륜 가운데 하나로 우리 삶의 기본이었다. 기실 우리가 공경해 마지않던 노인의 권위와 예우는 곧 선인으로서 한 존재가 통과해 왔을 그 지난한 시간들에 대한 예의이자 그 경륜에 대한 예우였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나이만으로는 권위를 갖기가 어려워졌다.

노인들의 위치와 역할을 에둘러 이야기한 영화가 있다. 조엘 코엔과 에단 코엔 형제가 감독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영화가 그것이다. 이 영화는 미국 작가 코맥 매카시의 소설이 원작으로, 삭막한 풍경과 잔혹한 장면 때문에 몇 번이나 고개를 돌려야 하는 불친절한 영화이다. 이 영화 속에서 귀가 들리지 않는 노인은 동전 던지기를 통해 삶과 죽음을 강제당하기도 하는데, 등장 인물들에게는 하나같이 죽음이 농담처럼 찾아온다. 이 영화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더는 노인의 지혜를 필요로 하는 곳은 없다는 점이다. 그럴까? 정말 그럴까? 소설이 말하는 것처럼, 영화가 그려내는 것처럼, 노인의 지혜는 하찮고 낡은 것이어서 아무런 소용이 없을까. 하지만 노인의 경험과 지혜가 젊은이의 지식과 만났을 때 얻게 되는 그 힘과 해답은 인공지능(AI)도 구하지 못하는 빛나는 보석일 것이다.

저명인사든 무명 인사든, 부자든 빈자든 누구나 나이가 들게 마련이다. 일에 골몰하다 어느 날 문득 고개 들어 뒤돌아보면 출발점으로부터 너무 멀리 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게 인생이고 우리의 삶이다. 그 노배우의 노래를 듣고 있는 청중을 보니 모두 나와 같은 심정이었던 모양이다. 다들 눈이 발갛게 젖어들어서는 눈가를 훔쳐내고 있는 것이.

불혹을 지나고 이순을 거쳐 고희를 넘기고 팔순에 접어든 그 노배우가 지나온 길에는 가슴 떨리는 환희도 있었을 테고, 좌절도 있었을 테고, 슬럼프도 있었을 것이다. 그 세월을 견뎌온 노배우가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국화꽃 옆에서’라는 시가 그때처럼 생생하게 다가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이 생긴 꽃’. 세상 온갖 풍파를 다 겪고 순해진 눈빛으로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은 그만큼 애처롭고, 그만큼 깊고, 그만큼 담백할 것이다. 웃음마저도 날빛처럼 투명할 것이다. 그 누님이 대면하고 있는 거울은 자신을 비추는 성찰의 거울일 것이다. 빛나는 외모를 보여주는 그런 거울이 아닌, 내면의 성숙함과 지혜를 비추는 그런 거울 말이다. 그 거울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며 끊임없이 뒤척이게 하는 욕망을 덜어내고 조용히 깊어지는 사람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잘 묵은 술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돈다. 잘 익은 술처럼, 잘 묵은 술처럼 은은한 향기를 품은 시간, 그리고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꽃이 되는 일. 이것이 내 앞으로의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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