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판 시대’… 2주안에 결정되는 책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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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트렌드, 작가→기획 위주로
신간 급증세…시장서 소화 못해

출간 후 2주만 지나도 창고행
판매 적으면 반품 주기도 짧아져
출판사들은 보관비 부담돼 절판

‘어제의 책’ 등 재간 시리즈도 나와
마케팅 효과로 더 큰 인기 얻기도

인문교양 출판사 글항아리는 최근 중국 사상사 연구자 미조구치 유조(溝口雄三)의 ‘이탁오 평전’을 출간하면서 같은 저자가 쓴 ‘중국 제국을 움직인 네 가지 힘’을 절판하기로 결정했다. 2012년 국내에 번역·소개된 ‘중국 제국을 움직인 네 가지 힘’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공존하는 현대 중국의 탄생 배경을 짚은 책으로 미조구치의 대표작 중 하나다. 글항아리 관계자는 “미조구치 사상의 정수가 담긴 ‘중국 제국을 움직인 네 가지 힘’은 ‘이탁오 평전’보다 중요도가 훨씬 높은 저작”이라면서도 “독자들의 반응이 미미해 절판의 운명을 맞게 됐다”고 전했다.

책의 수명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 시장 수요를 초과하는 신간이 쏟아지고, 신간은 출간 후 2~3개월 안에 흥행 여부가 판가름나면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전방위적인 인플레이션 압력 속에 종이값이 인상되면 서점에서 사라지는 절판 도서는 더 늘어날 것으로 예측된다. 출판계에서 ‘절판의 시대’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대한출판문화협회 통계에 따르면 지난 2013년 4만3146종이었던 신간은 2021년 6만4657종으로 2만 종 이상 늘었다. 진입 장벽이 낮은 탓에 직접 출판사를 창업하는 편집자가 많아지고, 출판사의 기획력도 높아진 데 따른 결과다. 이홍 한빛비즈 이사는 “최근 10년 새 출판 트렌드가 ‘작가 중심’에서 ‘기획 중심’으로 확연히 바뀌었다”며 “과거엔 저자가 먼저 콘텐츠 아이템을 제안하는 경우가 많았다면 최근엔 출판사들이 독자가 원하는 책이 무엇인가를 고민해 저자를 ‘캐스팅’하는 관행이 보편화하면서 신간 수도 덩달아 급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늘어나는 신간을 시장 수요가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A 출판사 B 대표는 “신간이 쏟아지다 보니 대형 서점에서 눈에 잘 띄는 ‘매대’ 위에 진열되는 기간은 길어야 2주”라며 “이 기간이 지나면 대부분은 반품되고 일부만 구석에 있는 ‘서가’로 들어간다”고 말했다. 판매량이 미미한 신간의 반품 주기가 갈수록 짧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B 대표는 “반품도서가 늘면 출판사는 월세처럼 빠져나가는 창고비와 물류비 등을 줄이기 위해 절판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며 “보통 저자와 출판사는 5년 계약을 맺는 경우가 많은데 1년에 100~200부 미만으로 팔리는 책을 재계약하는 건 의미가 없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이홍 이사는 “다양한 독자 취향을 겨냥한 책은 많아졌으나 시장 논리로 보면 ‘과다 기획’에 의한 ‘과다 생산’의 부작용이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신간 종수가 급증한 탓에 책 한 권이 갖는 파급력은 예전만 못하다는 점도 절판 주기가 빨라지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 출판사 대표는 “6~7년 전만 해도 종합 베스트셀러 1위는 교보문고에서 일주일에 8000부가량 팔렸는데 지금은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며 “베스트셀러조차 이런 상황이니 절판이 불가피한 ‘쪽박 도서’가 늘어나는 건 당연한 귀결”이라고 꼬집었다.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종이값 인상 여파가 ‘인기 없는 구간’에 미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한 출판사 관계자는 “현재 물가를 반영하면 되는 신간과 달리 구간은 개정판을 내지 않으면 정가 인상을 잘 하지 않는다”며 “재쇄 300~500부 정도로 찍는 구간 가운데 절판이 되는 사례가 늘어날 것”이라고 전했다.

이런 가운데 출판계는 절판 종수를 줄이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고객 주문을 받아 컴퓨터를 이용해 책을 만드는 서비스인 ‘POD(publish on demand)’도 그중 하나다. 황서현 휴머니스트 주간은 “연간 100부 미만 판매 도서 가운데 일부를 POD 방식으로 소량 제작하고 있다”며 “제작비와 관리비가 다소 높지만 출판사의 ‘도서 목록’ 유지에는 유효한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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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절판되는 책이 늘어나면서 운명을 다한 책 가운데 양서를 다시 선별해 재출간하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교유서가가 최근 선보인 ‘어제의 책’ 시리즈가 그렇다. 교유서가는 지난 4월 ‘어제의 책’ 첫 도서로 역사학자 로저 에커치의 ‘잃어버린 밤에 대하여’를 재출간했다. 돌베개가 2008년 ‘밤의 문화사’라는 제목으로 처음 낸 이 책은 교유서가에서 새 제목으로 다시 나왔다 지난해 절판됐었다. 산업혁명 이전 밤이 초래한 위험과 밤의 망상과 악몽, 불면증 등을 탐색한 책은 에커치의 명저로 꼽힌다. 교유서가는 올해 안에 ‘단테 ‘신곡’ 강의’ 등 5권을 연이어 내놓을 계획이다.

변화하는 시대 속에 새로운 마케팅으로 포장한 재간 도서가 첫 출간 때보다 훨씬 큰 사랑을 받기도 한다. 진선출판사와 서울문화사가 절판한 뒤 크래들이 재출간해 대박을 낸 ‘도구와 기계의 원리 NOW’, 갤리온의 절판 도서 ‘심리학 나 좀 구해줘’를 재간한 포레스트북스의 ‘마음의 법칙’ 등이 대표적이다. 장은수 출판평론가는 “출간과 절판, 재간이 반복되는 양상은 책이 잠시 사라질지언정 결코 죽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