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빌려 땅 사면 낭패…대법 “점유취득도 인정 안 돼”

명의신탁으로 사들인 땅 21년 동안 점유…수탁자가 명의 넘기자 소유권 이전 소송
“소유권 취득 못할 것 알고 점유…점유취득시효 완성 안돼”

부동산실명법으로 명의신탁계약이 무효가 된 상황에서 명의신탁자가 20년 동안 부동산을 점유했더라도 소유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대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A 씨의 유가족이 B 씨 등을 상대로 낸 소유권 이전등기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광주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8일 밝혔다.

재판부에 따르면 A 씨는 부친이 1955년 취득한 논 6050㎡(약 1천830평)를 1978년쯤 물려받았다. A 씨는 땅을 상속받은 후 소유권 이전등기를 하지 않고 있다가 1997년 한국농어촌공사에 땅을 팔았고, 공사가 소유권 이전등기를 했다. 비슷한 시점 A 씨는 B 씨와 명의신탁 계약도 맺었다. A 씨가 B 씨 명의로 이 땅을 공사로부터 되사고, 다시 B 씨 명의로 공사 대출을 받아 매매 대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이다. 공사는 두 사람이 명의신탁은 몰랐고, A 씨는 대출 원리금 5000여만 원을 명의상 채무자인 B 씨에게 줘서 갚게 했다. 토지 명의는 2009년 B 씨에서 한 영농조합으로 이전됐고, 2015∼2017년에는 C 씨에게 신탁됐다. A 씨는 1997년부터 사망한 2018년까지 논을 점유하며 농사를 지었으나 등기부등본상 소유자는 A 씨였던 적은 없었다.

A 씨가 세상을 떠나자 부인과 자녀들은 “A 씨의 점유취득시효 20년이 지났다”며 논의 소유권 이전등기를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민법은 소유 의사를 갖고 20년 동안 평온하고 공공연하게 부동산을 점유한 사람은 등기를 통해 소유권을 취득한다고 규정하는데, 이를 근거로 명의를 넘겨달라고 한 것이다.

하급심은 A 씨 유가족의 손을 들어줬지만 대법원은 판단이 달랐다. 점유를 개시할 당시에 소유권 취득을 위한 법률 행위를 안 한 사람이 이런 사정을 잘 알면서도 법적으로 타인이 소유한 부동산을 무단으로 점유했다면, 그 점유가 ‘소유 의사가 있는 점유’라고 추정할 수는 없다는 취지다. 대법원은 “점유취득시효가 인정되려면 점유자의 자주점유(자신이 소유한다는 인식 및 의사를 갖고 하는 점유)가 인정돼야 한다”며 “A 씨는 명의신탁자로서 자신이 소유권을 취득하지 못한다는 사정을 잘 알면서 토지를 점유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는 악의의 무단점유에 해당해 토지를 ‘소유의 의사’로 점유한 것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점유취득시효 주장을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1995년 제정된 부동산실명법은 실소유자가 어떤 이유로 부동산을 타인 명의로 해뒀더라도 소유권을 인정해준 종래의 명의신탁약정을 무효로 한다고 규정했다. 재판부는 1997년 논 매매 계약은 농어촌공사와 B 씨가 맺어 명의신탁자인 A 씨는 계약의 당사자가 아니고, 따라서 명의신탁에 따른 소유권 이전등기 청구도 불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조성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