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살다보면 행복한 날도 꽤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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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우 영화배우

아이도 있는 젊은 이혼부부
재결합하면 또 싸울까 걱정

살면서 그런 과정 겪지 않고
백년해로한 사람 거의 없어

망망대해 같은 인생의 바다
두려워도 함께 나아가야지

요즘 TV 보는 일이 재미없다. 남들 좋아하는 예능도 그렇고 인기 있다는 드라마도 그렇다. TV는 켜도 한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는 경우는 드물고, 손에 꼭 쥔 리모컨으로 여기저기 헤매고 다니는 ‘프로그램 방랑자’다. 지난해부터 응원하는 팀이 생겨 저녁마다 야구 중계를 보는 게 그나마 낙이다. 좋아하는 팀의 감독이 돼서 작전 지시도 하고 실수한 선수에게는 격려하기도 한다. 때로는 흥분하기도 하고 결정적인 찬스에 안타를 치거나 극적으로 점수가 났을 땐 온 거실을 방방 뛰어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좋아!” 그 정도 반응이 전부다.

왜 그럴까. 방송 일을 한 탓에 그 제작 과정을 알아서일까. 우리 또래들은 이구동성으로 좋은 다큐가 보고 싶다 하는데, 나도 그 말에 격렬한 공감의 한 표를 던진다. 나이 탓일까. 아니다. 요사이 남편이 드라마를 챙겨보면서 감정에 복받쳐 때로 흐느낌을 동반한 눈물을 흘린다고 증언하는 친구의 아내들도 꽤 있는 걸 보면 내 증상이 나이 탓만도 아닌가 보다.

습관적으로 TV는 켰으나 몰입이 잘 안 되는 요즈음, 시계를 보면서 그 시간을 기다리기도 하고 방송을 보면서 나와 의견이 다를 때는 탄식하기도 하고 전달될 리 없는 열띤 훈수를 둘 때도 있고 때로는 껄껄 웃기도 하는 프로그램이 생겼다. 제목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이혼했어요’인가, 아니지. 이혼은 둘이 하는 거니 ‘우리 이혼했어요’가 맞을 듯하다.

프로그램 때문에 다시 마주하게 된 젊은 이혼 부부는 아직 감정 정리가 안 된 듯 눈에 분노의 핏기가 여태 살아 있으니 대화가 잘 될 리 없다. 비수 같은 말이 난무하는 것을 보며 만나지 않는 게 좋았을 걸 하는 마음이 든다. 그들의 대화에 도무지 출구가 보이지 않아 답답한 나머지 ‘절대 재결합 안 됨’ 혼자 단정 짓고는 옆에 앉아 같이 보고 있는 아내를 힐끗 본다. 왜? 나도 저런 식의 대화를 해 본 경험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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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속 젊은이들처럼 엉킨 감정을 정리하자고 말은 하면서도 풀리지 않는 감정의 찌꺼기들을 어찌하지 못해 퍼붓는, 서로를 할퀴는 언어들과 감정들. 그리고 아까운 시간들. 아니다, 그 시간이 반드시 아깝다고 할 수만은 없겠다. 나도 그런 과정을 거쳐서 지금은 번듯한(?) 한 인간이 되었으니까. TV를 보면서 내가 기억하는 부끄러운 어느 날이 떠오르는 순간, 얼굴이 벌게지면서 내가 기억하는 그날을 제발 아내는 떠올리지 않기를 얼마나 빌었던가.

시간이 지나면서 TV 속 부부에게 변화가 보인다. 철근 콘크리트 벽같이 무표정한 그 얼굴에 옅은 미소가 슬쩍 비친 것을 나는 보았다. 견고한 ‘여리고’ 성벽에 균열이 가는 게 느껴졌고, 곧 그들 중 한 사람이 먼저 마음의 문을 열어 줄 것 같아 그제야 소파에 등을 붙인다. 어쨌든 긴장감도 있고 재미있다.

요즘, 말을 얼마나 예쁘게 하는지 말하는 입만 봐도 좋은 아이 때문에라도 재결합하면 좋겠다고 생각한 젊은 커플이 있다. “나는 재결합할 수 없어!” 최근 TV를 보는 내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은 한 남자의 선언이 있었다. 아니, 그사이 셋이 지낼 집도 마련했고, 그 집에서 같이 살면서 얼마나 행복해했는데, “그래 그 이유나 좀 듣자”. 다시 소파 끄트머리로 나앉았는데, 그 젊은 남자가 “우리는 재결합하면 또 싸울 것이고 그러면 불행해지고 후회하게 될 거야”라고 한다.

심각한 표정이었는데, “그런 바보 같은 소리가 어디 있어” 하고 하마터면 소리칠 뻔했다. 진정하고 그들을 설득한다.

“보세요, 그대들처럼 그런 과정 겪지 않고 백년해로한 사람 거의 없어요. 미래가 걱정돼서 출발 자체를 못 하겠다는 건데. 그래요, 두 사람 대차게 싸우면서 상처도 많았고 그래서 그런 과정 다시는 겪고 싶지 않겠다는 마음 이해돼요. 근데 산다는 건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상대방이 싫어하는 행동, 서로가 감정 상하는 말은 되도록 삼가게 되는 거지요. 그런 시간을 거치면서 그대가 말하는 피곤한 상황, 그토록 싫어하는 불행한 상황을 안 만들게 되는 거지요. 그런 일이 두렵고 무서워서 시작도 안 하겠다고요? 거친 파도를 만날 게 걱정이 돼서 배가 바다로 나가지 않고 방파제 안에 머무른다면 그건 이미 배가 아니지요. 인생의 바다에 폭풍우가 일기도 할 것이고, 감당하기 힘든 파도를 맞닥뜨리는 날도 있겠지요. 그러나 바다가 아니면 볼 수 없는 붉은 석양도 얼마나 장관일 것이며 일출에 눈을 뜨며 감격의 눈물을 흘릴지도 모르죠. 마치 두 사람을 위해 펼쳐준 듯한 구름축제를 보며 신께 감사할 것이고, 둘만 아는 행복한 시간도 갖게 될 겁니다. 그래요, 경험해 본 적 없는 망망대해 같은 인생의 바다, 누구나 두렵지요. ‘이번 항해 내가 최선을 다할 테니 같이 떠나자. 당신이 좀 도와줘, 때로 당신이 리더가 되면 내가 당신을 도울게.’ 서로 믿고 의지하면서 인생의 바다로 나아가는 겁니다. 세월이 흐른 뒤 항해 마치는 날, 거칠어진 손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 쓸어올리며 말하겠지요. ‘고마워, 다시 항해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역시 당신과 하고 싶어.’ ‘…물론 나도.’ 빛나는 미소로 대답하겠지요.”

출발을 머뭇거리는 젊은 친구들에게 용기를 내라고 토닥여 주고 싶다. 인생은 살 만하고 행복한 날이 꽤 많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