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서면 가로막는 낮은 목소리’… 아름다운 가사 따라 헤매는 내 마음

■주철환의 음악동네 - 영화 ‘헤어질 결심’ 테마곡 ‘안개’

프루스트와 프로스트가 헷갈린다는 학생을 가끔 본다.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프랑스의 소설가, 로버트 프로스트(1874∼1963)는 ‘가지 않은 길’을 쓴 미국의 시인이다. 두 작가를 불러낸 오늘의 영화가 ‘헤어질 결심’이다. 영화를 다 본 후 나는 ‘의식의 흐름’을 좇아 사라진 시간과 공간들을 비스듬히 헤매었다. ‘영화를 본 후’라고 하지 않고 특별히 ‘영화를 다 본 후’라고 적은 이유가 있다. 그 극장(광화문 씨네큐브)은 영화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불을 안 켜는 게 불문율이라 어둠 속에 갇힌 채 하염없이 그 많은 이름의 사열을 받았다. 인내심이 발동하지 않은 건 송창식과 정훈희가 부른 주제곡 ‘안개’가 관객을 내밀하게 포획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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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는 곡도 좋지만 가사가 예술이다. 특히 2절은 현기증 나도록 아름답다. ‘돌아서면 가로막는 낮은 목소리/ 바람이여 안개를 걷어가 다오/ 아, 그 사람은 어디에 갔을까/ 안개 속에 눈을 떠라/ 눈물을 감추어라’ 작곡자는 재즈색소폰연주자로 유명한 이봉조(1931∼1987), 원곡가수는 정훈희가 맞는데 이토록 아름다운 가사를 쓴 작사자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자막에 나온 이름은 박현. 아, 그 사람은 누구며 지금 어디에 있을까.

영화는 끝났는데 노래채집가의 마음은 안개로 무성했다. 나는 극장을 나와 종로 방향으로 몇 걸음을 옮겼다. 옛날 광화문 모서리에 큰 극장이 하나 있었다. 기억하기 쉽게 정리하면 부산엔 국제시장, 서울엔 국제극장이다. 거기서 개봉한 화제작 중에 ‘러브스토리’가 있다. 내 의식의 흐름은 앤디 윌리엄스(1927∼2012)가 부른 영화주제가와 접속한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사랑이 얼마나 위대할 수 있는가/ 바다보다 오래갈 우아한 러브스토리/ 그녀가 건네준 사랑에 관한 단순한 진리’(Where do I begin to tell the story of how great a love can be/ The sweet love story that is older than the sea/ The simple truth about the love she brings to me) 아, 직접 불러보니 이 노래에 ‘헤어질 결심’의 마지막 바다 장면을 그대로 덮어씌워도 무방하겠구나.

오늘은 감탄사의 대량방출이다. 아, 다시 나는 작사가 박현을 찾아야겠다. 미약한 취재력으로 보고서를 작성해본다. 본명은 박진현, 직업은 라디오 음악PD다. 고인의 직장후배인 장명호(현 MBC 사우회장)의 증언에 따르면 섬세한 성격에 글솜씨가 좋았다고 한다. 갑자기 어디선가 검은고양이 한 마리가 출몰한다. 놀라지 마시라. 박진현의 따님이 바로 음악동네의 천재소녀 박혜령(1965년생)이고 그녀가 4세 때(1969) 부른 번안곡이 ‘검은고양이 네로’다. 당시 전국의 어린이가 합창할 정도로 유행했다.

‘헤어질 결심’은 정훈희의 ‘안개’에서 출발했다고 박찬욱 감독은 밝혔다. 나는 기어이 노래의 탄생을 추적한다. 이제부터는 직접 들은 이야기다. 방송사 선배 중에 소설가 김승옥의 동생(김상옥)분이 계셨다. 조카 과외선생으로 대학생 때 형님 댁(가회동)에 얹혀살았는데 어느 날 형(김승옥)이 녹음된 색소폰 연주를 들으며 시(?)를 쓰는 걸 목격했다. 뭐냐고 물으니 본인의 단편소설 ‘무진기행’을 영화(1967년 ‘안개’)로 만드는데 작곡가인 이봉조가 주제곡의 가사를 의뢰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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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이소라 ‘바람이 분다’ 중) ‘헤어질 결심’의 포스터엔 ‘짙어지는 의심 깊어지는 관심’이란 문구가 나온다. 혹시 이봉조는 음악PD인 박진현과 소설원작자 김승옥, 두 분에게 다 부탁했고 누군가 그걸 취합(?)해서 명가사가 탄생한 게 아닐까. ‘생각하면 무엇하나 지나간 추억’(‘안개’ 중) 하지만 내 마음은 지금도 ‘안개만이 자욱한 거리’를 헤매는 중이다.

작가 프로듀서·노래채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