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오죽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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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영 피아니스트, 음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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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을 하루 쉬면 내가 알고
이틀 쉬면 음악가들이 알고
사흘 쉬면 모두가 안다는데

피아니스트에게 연습은 숙명
연주 시작전 악기와 심적 대화
오죽하면 이렇게까지 하겠나

꽤 오래전이다. 대한민국 음악계를 대표하는 쟁쟁한 피아니스트들과 함께 앉아 차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진지한 음악 이야기도 많이 나왔지만, 지금까지도 기억에 생생한 화제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평균율 모음곡’을 연습하는 요령에 대한 것이었다. 이 곡은 피아니스트에게는 기독교의 구약성경과 같은 존재로, 거의 모든 건반 음악의 기원이자 기본 틀을 제공해 주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닌 걸작이다.

위대한 작품인 만큼 좋은 연주를 위해서는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한데, 누군가 엉뚱한 소리를 꺼냈다. “피아노 의자를 빼고 거기 쪼그려 앉아서 얼굴을 건반에 닿을 정도까지 내리고 쳐보면 연습이 잘 된다고 하던데….” 옆 사람은 한 술 더 보탠다. “아냐. 내가 들은 얘긴데, 피아노 안으로 기어들어가서 손을 거꾸로 건반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치면 금방 외워진대.” 실없는 소리에 모두 웃을 법하지만,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이 ‘방법’ 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황당한 이야기에 이렇게 반응하는 까닭이 있을까? 정답은 아니지만, 이유를 간단히 설명한다면 이렇게 네 글자다.

‘오죽하면!’

음악가들의 생활을 잘 모르는 분들에게서, 당황스럽지만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있다. “아니, 50년 가까이 피아노를 치셨는데, 아직도 연습을 해야 됩니까?” 답은 물론, 매우 강한 긍정이다. ‘연습을 하루 쉬면 내가 알고, 이틀 쉬면 음악가들이 알고, 사흘 쉬면 모두가 다 안다’는 격언은 누가 만들었는지 참 아픈 진리다. 하루하루 더 나아지기 위해 연습하지만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자신이 없어지기도 하고, 그래서 강박이나 습관처럼 매달리기도 한다.

이번 여름 대한민국 음악계를 강타한 신예 피아니스트 임윤찬과 지난해 가을에 만나 나눴던 얘기가 생각난다. 그가 이번 반 클라이번 국제콩쿠르에서도 최고의 평가를 들었던 프란츠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을 독주회 레퍼토리로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밤을 새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요즘은 그저 피아노 연습하다가 어머니가 ‘밥 먹어라’ 하면 밥 먹고 또 연습하는 일상이 전부입니다.” 어마어마한 결과를 만들어낸 18세 소년의 시간은 이렇게 무시무시한 훈련으로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믿을 수 없는 무대 앞 천재들 대부분은 이렇게 노력으로 뭉쳐진 존재다. 집시풍의 바이올린 곡 ‘치고이너바이젠’ 등의 걸작을 남긴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 파블로 데 사라사테(1844∼1908)는 당대 최고의 기교를 자랑하는 연주자였다. 누구에게나 천재로 인정받았던 그는 그러나 씁쓸한 어조로 이런 명언을 남겼다. “하루 14시간씩 37년을 연습해 왔는데, 사람들은 나를 천재라고 부르는군.”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선생이 하신 말씀 중 기억에 남는 대목.

“누가 하루에 몇 시간 연습하느냐는 질문을 하면 늘 똑같이 대답합니다. 가능한 모든 시간을(Every Possible minute!).”

지치지 않는 열정에 고개가 숙여지지만, 피아니스트의 사정은 조금 다르다. 악기를 들고 다닐 수 없기 때문이다. 지방이나 해외 연주를 가면, 호텔 방에서도 연습할 수 있는 다른 악기 연주자들이 한없이 부럽다. 피아니스트는 공연장에 미리 가거나 지인의 스튜디오, 심지어 호텔 로비에 놓인 피아노로 손을 풀어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갖가지 상황의 피아노를 만나는 게 피아니스트의 운명이나, 그래도 집중해 ‘가능한 모든 시간’에 연습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고통스럽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연주자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 역시 연습실에서 탄생한다. 다람쥐 쳇바퀴보다도 더 지겨운 반복 훈련 속에, 게을러질 수밖에 없는 자신과 타협하지 않고 앞만 보고 나아가는 과정에서 문득 찾아오는 즐거움은 ‘어쩌면 조금은 향상될 것 같은 가능성’이 보일 때다. 내 실력이 확실히 늘어난 게 아니라, 좋아질 ‘기미’라도 느껴지는 것 그 자체가 연주자에게 한없는 행복감을 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뭔가 해냈다고 느껴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또 다른 고민거리가 머릿속에 훅 하고 떠오른다. 존경하는 피아니스트 백건우 선생과 이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 예상 밖의 답변을 듣고 놀랐다. “몇 날 며칠을 머리가 깨지도록 고민하다 어떤 문제 하나가 풀릴 기미가 느껴지고 희망의 빛이 보일 때 나도 정말 기분이 좋지. 그런데 그 빛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때가 많아….” 나보다 몇십 배 몇백 배의 비슷한 경험을 해 본 대선배의 고백은 단어 하나하나가 진실했다.

연주자에게 연습이란 무대에서 단 한 번의 기회에 최상의 모습을 들려줘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다. 미국의 피아니스트 앙드레 와츠에게는 무대에서 리허설을 할 때 독특한 루틴이 하나 있다. 다른 연주자보다 한 시간 내지 30분 정도 시간을 더 내 일정 거리에서 피아노를 말없이 응시하는 시간을 가진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악기와 심리적인 대치 상태를 갖는 것인데, 새로 만나는 악기와의 적응을 위해 필수라고 스스로 설명한다. 그만의 방법은 물론 존중되어야 하겠지만, 사실 이런다고 낯선 악기가 순순히 자신의 말을 들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럼 왜 이런 행동을 할까? 역시 답은 한 가지, ‘오죽하면 이러겠나’이다.

오늘도 손가락이 내 맘대로 움직여줘야 할 텐데…. 의자에 앉아 건반 위에 손을 올리면서 크게 한번 심호흡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