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개인적인 이야기로 말문을 엽니다. 2013년 가을, 여자친구가 생겼습니다. 막 연애를 시작했을 무렵 그녀에게 소설가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을 선물했습니다. 청춘이기에 청춘을 그리워할 필요가 없던 대학생 때 밑줄 치며 읽은 책이었습니다. 첫 페이지에 차마 여기 옮길 수 없는 느끼한 멘트를 적어 건넸습니다. 그녀가 그 멘트에 감동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몇 년이 흘러 우리는 결혼을 했고, 또 몇 년이 지나 딸을 낳았습니다.
◇50대의 김연수가 30대의 김연수에게
이번 주 도착한 ‘청춘의 문장들’ 개정판을 들추며 지나간 그 시절이 생각났습니다. 책 한 줄에 마음이 움직이고, 선물할 책을 고르며 설레던 청춘의 나날들이요. 김연수도 20여 년 전 낸 ‘청춘의 문장들’을 다시 읽고 고치며 ‘김연수의 청춘’을 떠올렸다고 합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그는 “그 시절에 나는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가고 있었다”며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리며 20여 년 전 내가 쓴 문장들을 그대로 따라 썼다. 마치 두 사람의 손이 서로 겹치듯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손을 맞잡을 수 있다면, 50대의 김연수는 30대의 김연수에게 이런 얘기를 들려주고 싶다고 고백합니다. “좋아하는 일을 좋아하면서 살아도 괜찮아. 마음껏 좋아해도 돼. 읽고 싶다면 하루 종일 책만 읽어도 되고, 쓰고 싶은 만큼 글을 써도 돼. 그건 시간 낭비가 아니야. 좋아하는 일을 좋아해서 그 일을 더 잘하게 되는 인생을 살도록 해.”
‘청춘의 문장들’은 젊은 날에 김연수를 사로잡은 문장들과 그에 대한 사색으로 이뤄진 산문집입니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나 ‘세계의 끝 여자친구’ 같은 소설 못지않게 김연수를 ‘좋아하는 일을 좋아해서 그 일을 더 잘하게 된’ 작가로 만들어준 책입니다. 첫 출간 후 20년 정도 흐른 지금까지도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는 스테디셀러니까요. 수줍은 미소, 단단하면서도 어눌한 말투를 가진 김연수에겐 원래 청춘의 이미지가 있었는데, 이 책 덕분에 우리는 그를 영원한 청춘의 작가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청춘의 문장들’을 처음 읽은 건 2005년 무렵이니 벌써 17년 전이네요.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유독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 글이 있었습니다. ‘내리내리 아래로만 흐르는 물인가, 사랑은’이라는 제목의 에세이인데요 아버지와 자신, 그리고 자신과 딸의 관계에 얽힌 문장들이 너무 아름다워 코끝이 찡해졌습니다. 몇 해 전 딸이 태어나 아빠가 된 덕분에 더욱 오래 눈길이 머물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연수는 딸 열무와 함께 맞은 두 번째 여름의 어느 날 자전거 앞에 아이용 의자를 설치했습니다. 의자에 앉히려 하자 처음엔 무서워 울음을 터뜨린 딸은 이내 고분고분 엉덩이를 붙였습니다. 아빠가 페달을 밟자 기분이 좋아진 듯 연신 고개를 돌려 아빠를 바라봤습니다. “얼굴로 와 부딪히는 바람이 좋았던 모양이었다. 내친김에 멀리까지 달렸다. 정말 아름다운 여름이었다. 나무 그늘 아래를 달리면서 나는 ‘열무와 나의 두 번째 여름이다’고 혼자 말해봤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소설가 김연수. 문화일보DB
◇아버지와 딸…만나고 헤어지는 生의 섭리
작가가 딸아이와 함께 자전거를 탄 건 어릴 적 아버지가 남겨준 기억 때문입니다. 김연수의 아버지는 저녁이면 어린 아들을 자전거 앞 의자에 앉히고 친구들 집에 놀러 가곤 했습니다. 아버지가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 동안 언제나 소년은 지쳐 잠들었는데, 아버지는 얼굴이 불쾌해진 뒤에야 아들을 깨웠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다시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김연수는 잠이 덜 깨 꼭 꿈을 꾸는 것만 같던 당시의 기분을 이렇게 돌이킵니다. “자전거는 가끔 비틀거렸으리라. 나는 가끔 졸았으리라. 하늘에는 별빛이 눈부셨으리라. 아버지는 노래를 흥얼거렸으리라. 아이가 생기면 제일 먼저 자전거 앞자리에 태우고 싶었다. 내 얼굴에 부딪히던 그 바람과 불빛과 거리의 냄새를 아이에게도 전해주고 싶었다.”
김연수가 이 기억과 함께 꺼낸 문장은 정약용의 둘째 형인 정약전이 아우를 생각하며 쓴 글귀입니다. 형제는 1801년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유배를 떠나게 됐습니다.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향했지요. 이후 13년이 지난 1814년 아우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풀려난다는 소식이 정약전에게 들려왔습니다. 중간에 한 차례 거처를 옮긴 정약전은 처음 떠나올 때만 해도 흑산도 입구인 우이도에서 살았으니 우이도로 잘못 찾아간 동생이 한 번 더 바다를 건너는 수고를 하면 어쩌나 싶어 우이도로 다시 나갔습니다. “차마 내 아우로 하여금 바다를 두 번이나 건너며 나를 보러 오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아버지와 함께한 ‘바람과 불빛과 거리’를 딸에게 전해준 김연수는 이렇게 적습니다. 내가 바다를 건너는 수고를 한 번만 했다면 그건 아버지가 이미 바다를 건너왔기 때문이라고. 나도 열무를 위해 먼저 바다를 건너는 방법을 배워야겠다고.
전체 원고를 섬세하게 매만진 개정판에 새로 추가된 글은 두 편인데, 그중 하나인 ‘꿀을 머금은 것처럼 지지 않는 벚꽃들을 바라본다’ 역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풀어냅니다. 몇 년 전 아버지는 단풍으로 물든 공원을 걸으며 “나뭇잎은 저렇게 졌다가도 봄이면 다시 돋는데 한 번 떠난 사람은 왜 다시 오지 않는가”라는 일본 시를 읊조렸습니다. 스스로 읊은 시처럼 아버지는 얼마 후 세상을 떠났고, 한 번 떠난 뒤엔 영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남겨진 이의 슬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단풍을 보며 김연수는 “그제야 내가 사는 이 땅의 풍경이, 누군가에겐 한 번 떠나고 다시 오지 않는 어떤 이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누군가의 부모는 아니지만,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자식이기에, 이 문장은 읽는 이의 마음을 바늘처럼 콕콕 찌릅니다. 하지만 그저 쓸쓸해지기만 하는 건 아닙니다. 하늘나라에 간 아버지, 30대에 쓴 글을 다시 읽는 50대의 작가, 지금쯤 빛나는 청춘을 통과하고 있을 딸의 관계에 대한 고요한 사색이 만남과 헤어짐으로 이뤄진 생의 섭리를 긍정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삶의 어디쯤 와 계시나요. 청춘의 한복판을 지나는 중인가요, 아니면 저만치 멀어진 ‘푸른 봄(靑春)’을 그리워하는 중인가요. 아무렴 어떻습니까. ‘청춘의 문장들’의 편집자가 독자들에게 띄운 엽서에 썼듯, 세월이 흘러도 좋은 책은 낡지 않고 청춘은 빛이 나는 법이니까요.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면 이미 지나갔다 해도 청춘이 사라진 건 아니니까요.
나윤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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