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로 쌓아올린 산동네 집들… 유년을 비추는 ‘고향의 정경’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제주에서 왔다는 관람객이 서울 학고재에서 정영주 작가의 그림을 살펴보고 있다.

■ 전시 개막일 작품 완판… 정영주‘Another World’展

퇴락하는 집들만 남긴 ‘도시풍경’
파피에 콜레 기법으로 생동감 줘
산동네의 푸근한 정서·위로 전달
국내외 구입 대기자만 200여명
가치상승 기대감에 매물도 없어

전시 개막일에 작품이 다 팔렸다. 작가가 “공공장소에 걸면 좋겠으니 개인에게 팔지 말라”고 당부한전시 타이틀작만 남았다.
그림을 사겠다고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수집가만 국내외에서 200여 명에 달한다. 장마, 휴가철임에도 전시장에 관람객이 줄을 섰다. 제주에서 온 한 중년 여성은 “원화를 보니 그 정감이 가슴을 울린다”고 했다.홍콩에서 왔다는 수집가는 “지인들에게 주고 싶다”며 도록을 4권 샀다. 서울 학고재에서 열리고 있는 정영주(52) 작가의 개인전(‘Another World’, 7월 27일∼8월 21일)에 대한 이야기다.

정영주 작가의 작품이 왜 이토록 열광적 호응을 얻는 것일까. 그 첫째 원인은 우리 시대의 각박함을 위로해주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정 작가의 회화는 작은 집들이 서로 기대어 있는 산동네 풍경을 담고 있다. 이는 그가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미국에서 작품 활동을 하다가 외환위기를 맞아 부득이 한국에 돌아온 후 심신에 극도의 고통을 겪던 시기의 경험에서 비롯한다. 산동네 풍경에서 고향의 안온함을 느낀 그는 ‘도시풍경’ 연작을 그렸는데, 그림 속에서 점차 빌딩을 삭제하고 퇴락해가는 집들만 가득 남겨놨다. 그 골목에 밝은 불빛을 그려 넣음으로써 따스한 정감이 배어 나오게 했다.

정 작가는 “내 작품을 보는 이들에게 언제든 문 열고 반겨주는 고향집 같은 편안함을 얻게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 소망이 시대와 잘 통하고 있는 셈이다. 따스함을 주조로 하는 풍정(風情)이 ‘디지털 노마드’ 시대에 고향의 푸근한 정서를 되살린다. 또한 코로나19 사태와 전쟁으로 시달리는 세상에서 한 가닥 위로의 불빛을 전해준다.

두 번째 이유로 들 수 있는 것은 작업 방식의 개성이다. 정 작가는 캔버스 위에 한지를 오려 붙이는 파피에콜레(Papier colle) 기법으로 작품을 제작한다. 종이를 천천히 빚고 한 겹 한 겹 쌓아 올려 입체적으로 만든 집의 형상에 색채를 입힌 후 화면 곳곳을 비추는 빛을 그린다. 이런 형식은 회화에 3차원적 생동감을 주며 독특한 미감을 빚어낸다. 손이천 케이옥션 이사는 “개성적인 작업 방식이 인기의 큰 요인”이라고 봤다.

서양에서 현대미술을 공부한 작가가 동양의 종이를 재료로 삼아 고향 정서를 환기시키는 것은 ‘융합’ 측면에서도 눈길을 끈다. 올 5월에 열린 홍콩 아트바젤이 아트페어 홍보지의 모델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정영주를 택한 것은 그런 개성 때문일 것이다.

정 작가의 작품 가치가 더 상승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도 인기의 한 요인이다. 이번 전시에 걸린 30호 크기(72.7×91㎝)의 ‘사계 4-봄밤’이 2500만 원에 팔렸다. 경매에선 같은 크기 작품이 그 배 정도 가격에 팔린 바 있다. 그런데 판매 의뢰자가 없어서 이젠 경매 시장에 아예 나오지 않는 상황이다. 값이 더 오를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학고재 측은 “이탈리아 등에서까지 구매 문의를 해 온다”고 전했다. 이처럼 시장 호응도가 높은 정 작가의 미래에 대해선 긍·부정론이 엇갈린다. “세계 시장에서 인정을 받은 단색화 이후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자리 잡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는 반면에 “산동네 집들을 소재로 한 구상 풍경화로 자기 복제를 지속하고 있는 탓에 성장 가능성이 작다”는 의견도 만만찮다. 절망의 끝에서 ‘또 다른 세상(Another World)’의 지평을 열었던 경험이 있는 작가가 자신의 기존 세계를 깨트리며 새로운 길을 열어나갈지 주목된다.

글·사진 = 장재선 선임기자 jeije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