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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살며 생각하며 게재 일자 : 2022년 11월 18일(金)
축구는 음악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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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영 피아니스트,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20년전 월드컵 16강전 열린 날
부천필 말러 교향곡 연주 관람

음악회 뒤 극적 역전 장면 시청
청중 모두가 한마음으로 감격

얼마전 안타까운 참사 있었지만
다시 하나 될 시간이 오고 있다


나보다 어린 세대에게 속담이나 옛말을 설명해야 하는 경우는 별로 없지만, 이해시키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지만, 주변 환경이 1년 동안에도 여러 번 천지개벽하는 것을 목격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이런 ‘한가한’ 표현이 가 닿을까 싶다. 그런데도 강산이 2번 변했다면 꽤 오랜 시간이고, 20년이 짧다고 생각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다만 예외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이 그렇다. 우리의 2002년 월드컵이다.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는 일이라면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의 머릿속은 그다지 많은 로딩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참 희한한 사람들이네!” 동생이 등 뒤에서 한마디 던졌다. 2002년 6월 18일이었다. 국민 전체가 국가대표 축구팀의 16강전, 이탈리아와의 승부를 아침부터 기다리고 있던 그날 저녁, 나는 예술의전당 음악당에서 열리는 음악회에 참석했다. 내겐 축구만큼이나 놓칠 수 없는 무대였기 때문이다. 도대체 연주회가 열리기나 할지, 과연 누가 음악을 들으러 갈지 궁금했던 건 우리 가족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예술의전당 음악당에서 열렸던 공연은 부천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말러의 교향곡 연주회였다. 1999년부터 2003년까지 이어진 부천필의 말러 사이클은 지휘자 임헌정의 야심 넘치는 기획으로, 국내 교향악단 중 처음으로 시도된 거대한 프로젝트였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이 시리즈를 통해 말러라는 작곡가와 친해진 애호가도 많다. 장기간에 걸친 지휘자와 단원들의 노력과 이른바 ‘말러리안’으로 불리는 열광적인 말러 마니아들의 바람몰이, 대한민국에서의 첫 전곡 연주라는 의미를 안고 부천필의 말러는 당시 클래식 공연계의 히트 상품으로 자리 잡았다. 문제는 월드컵과 겹친 날짜였다. 교향곡 5번이 연주되던 그날, 나와 ‘소수의’ 청중은 말러를 택했다.



400명 남짓한 음악당의 청중은 공연장 측의 배려로 가운데 자리로 옮겨 앉아 음악을 감상했다. 말러의 교향곡 5번은 모두 5악장으로 이루어졌는데, 영화음악 등으로 사용돼 알려진 4악장 ‘아다지에토’가 가장 유명하지만, 다른 악장들도 높은 완성도를 지닌 걸작이다. 장송행진곡 풍의 1악장, 공격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느낌의 2악장, 오스트리아 춤곡 렌틀러를 작곡가의 어법으로 변형시킨 3악장과 오케스트라가 지닌 사운드의 최고치를 나타내며 클라이맥스를 구성하는 마지막 5악장 등을 임헌정이 이끄는 부천필은 일치된 호흡과 매끄러운 흐름으로 멋지게 연주해 냈다. 교향곡에 앞서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을 연주한 피아니스트 최희연의 활약도 눈부셨다. 그녀의 해석은 세련미와 화려함을 골고루 갖추고 있었다. 특히, 피아노 독주자가 홀로 연주하는 카덴차 부분에서 스스로 작곡한 패시지들을 선보이며 다채로움을 더해 갈채를 받았다.

아름답고 장대한 오케스트라 선율에 빠져 있던 청중은 음악회가 끝난 후 곧바로 현실로 돌아왔다. 로비로 나온 우리는 축구 경기 진행 상황이 궁금해 우왕좌왕했고, 음악당 로비에 설치된 모니터들은 우리를 위해 즉시 TV로 연결됐다(이런 사례가 이후에도 있었는지 궁금하다). 붉은 유니폼 태극전사들과 이탈리아의 파란 유니폼이 혈전을 펼치던 그 경기를 두고 곧장 집으로 향한 사람은 없었던 듯하다.

후반전에 접어든 지 오래였다. 국민 대다수가 복기할 수 있는 그날의 경기 중 안정환의 페널티킥 실축, 이탈리아 선수 비에리의 선취골, 김태영이 부상으로 마스크맨이 되는 과정 등은 놓쳤지만, 말러의 팬들에게는 영화보다도 더 영화 같은 반전이 남아 있었다.

설기현의 극적인 동점 골이 터지던 바로 그 순간, ‘골!’ 하는 함성과 함께 모니터의 화면이 끊어졌다…. 컨트롤 룸의 누군가가 극도로 흥분한 나머지 버튼을 잘못 누른 듯했는데, 웃음과 안타까움이 뒤섞이던 그 몇 분간은 참으로 즐거운 패닉 상태였다. 다시 모니터가 들어오고, 얄밉도록 지능적이고 강했던 이탈리아 토티의 퇴장, 그리고 ‘반지의 제왕’이 창조해 낸 연장전의 피날레! 우리는 모두 얼싸안았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이 섞여 있었지만 상관 없었다. 믿을 수 없는 승리,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 놓은 대한민국 축구의 기적이 그 존재 가치를 맘껏 뽐내는 순간이었다.

부푼 가슴을 안고 밖으로 나와보니, 예술의전당 앞 남부순환로는 온통 차들과 사람으로 뒤덮여 있었다. 집에 가고 싶지 않은 사람, 집에서 뛰쳐나온 사람들이 엉켜 방금 일어난 기적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그날의 고성방가에 불쾌해한 사람이 몇이나 있었을까. 어느 쪽이나 ‘빵빠앙빵 빵빵!’ ‘대~~한 민국!’이 울려 퍼졌다. 축구는 음악과 함께여서 더 좋았고, 복잡하고 난해한 말러의 염세관적 철학이 담긴 교향곡 5번은 그날만큼은 승리의 팡파르였다.

축구의 어떤 요소가 우리의 피를 끓게 하는지 나는 잘 모른다. 어쨌든 다시 하나 될 시간이다. 믿었던 손흥민의 부상이 염려스럽고, 얼마 전에 일어난 안타까운 대형 참사로 인해 즐겁고 떠들썩한 축제가 되기에는 한계가 있을지 모르나, 마음으로 전해지는 간절한 염원은 뜨거운 나라 카타르까지 오롯이 전해질 것이다. 아무쪼록 우리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는, 또 한 번의 잊을 수 없는 월드컵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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