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작곡 어벤저스’ 모여… 2주간 70여곡 ‘집단 창작’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아이브의 ‘마이 새티스팩션’(My Satisfaction)을 작곡한 조시 컴비(왼쪽), ‘애프터 라이크’(After Like)를 쓴 앤더스 닐슨(오른쪽)이 서울 성동구의 스튜디오 녹음실에서 음악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마켄엔터테인먼트 제공

■ K팝의 탄생 현장을 가다 - (1) 노래의 메카 ‘송캠프’ 가보니

영미권 · 북유럽 · 남아메리카…
내로라하는 K - 팝 작곡가 40명
가수와 3 ~ 4명씩 팀 만들어 작업

개인창작 아닌 작곡시스템 구축
협업으로 곡 수준의 상향평준화
다수 참여로 글로벌 보편성 갖춰

K-팝의 위상이 놀랍다. 미국 주류 팝의 변방으로 평가받던 한국이 K-팝의 전 세계적 인기를 타고 그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K-팝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는 아직 논쟁이 진행 중이지만 K-팝을 구성하는 몇 가지 특징은 꼽을 수 있다. 중독성 있는 멜로디의 노래와 칼군무, 독특한 세계관, 화려한 비주얼, 그리고 강력한 팬덤이다. K-팝을 구성하는 이 요소들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K-팝이 탄생하는 현장을 직접 찾아가 본다.

지난 15일 서울 성동구 성수동의 한 건물. 겉으로 보기엔 평범해 보이는 건물의 4층 스튜디오에서 K-팝의 역사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스튜디오로 들어서자 흡사 노래방처럼 긴 복도의 양옆으로 2평 남짓 작은 크기의 방들이 줄지어 있었고 희미한 비트 소리가 여러 곳에서 들려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다양한 국가 출신의 젊은이들이 후드 티셔츠 등 편안한 옷차림을 한 채 삼삼오오 모여있거나 각 녹음실에서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K-팝의 탄생을 취재하기 위해 방문한 ‘송캠프’(Song Camp)의 모습이었다.

◇송캠프란…“작곡가 어벤저스 모여”

‘송캠프’는 말 그대로 노래를 만들어내는 캠프다. ‘캠프’라는 단어 때문에 “모닥불 피워놓고 통기타를 치며 캠핑을 하는 것인 줄 알았다”고 한 어린 가수도 있다. 실제 송캠프는 노래를 만드는 이들이 일정 기간 동안 모여 협업을 통해 수많은 데모곡을 생산해내는 행사다. 수많은 K-팝 곡들이 송캠프를 통해 탄생한다.

이날 방문한 송캠프를 주최한 곳은 마켄엔터테인먼트. 작곡가 라이언 전의 프로듀싱 팀에서 시작한 회사로, 음반 기획과 제작 등을 한다. 11월 7일부터 18일까지 2주간 진행된 이번 송캠프에 참여한 작곡가는 총 40여 명. 전 세계적 히트곡인 방탄소년단(BTS)의 ‘버터’(Butter)를 작곡한 세바스찬 가르시아와 아이브의 ‘애프터 라이크’(After Like)를 만든 앤더스 닐슨, 엑소의 ‘러브 미 라이트’(Love Me Right)를 쓴 덴질 레메디오스(DR·Denzil Remedios) 등 내로라하는 K-팝 작곡가들이 모두 참여했다. 연령대로 보면 20대 초반부터 30대 후반까지 다양하고, 국적별로 보면 미국과 캐나다 등 영미권부터 노르웨이·스웨덴 등 북유럽, 남아메리카, 아프리카까지 다양한 곳 출신이다.

이들은 어떻게 곡을 만들러 한국까지 왔을까. 마켄엔터 측은 “해외 곡들을 많이 듣는다. 곡이 좋고 우리와 스타일이 맞을 것 같은 작곡가들에게 공식적으로 이메일을 보내 송캠프에 초청한다. 가장 뛰어난 작곡가들을 모았다. ‘작곡가 어벤저스’라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주최하는 송캠프 스타일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의 송캠프는 해외 작곡가들이 우리나라에 머무는 동안의 체류비용을 전부 부담한다.

이날 스튜디오에 마련된 5개의 녹음실 모두에서 작곡가와 가수 등이 3∼4명씩 팀을 이뤄 새로운 K-팝 곡을 만들어냈다. 먼저 비트를 만들고 그 위에 멜로디를 얹고, 가이드 녹음을 한다. 작업이 순조로운 경우 대강의 가사까지 만들어내는 과정이 이 ‘팀’ 체제로 이뤄진다. 한 녹음실마다 매일 최소 1곡 이상의 곡이 나오고 총 5개의 녹음실이 있으니 최소 5곡이 탄생하는 셈이다. 보통 2주 정도 송캠프가 계속되니 최소 70곡 이상이 나오는 것이다. 이런 ‘송캠프’가 1년에 3∼4번 정도 기획된다.

송캠프에 참여하는 작곡가들의 일과는 어떨까. 대부분 오전 11시쯤 스튜디오에 나와 이르게는 오후 5시, 늦게는 오후 10시까지 곡 작업을 한다고 한다. 점심, 저녁을 함께 먹고 가끔은 반주도 곁들인다. 마켄엔터 측은 “아무래도 편안한 분위기에서 더 좋은 곡이 나오다 보니 각자의 작업 스케줄을 최대한 배려한다”고 말했다.

◇협업이 효율 높여…K-팝 작곡의 시스템화

송캠프는 1990년대 초반 외국에서 먼저 시작됐다. 당시 IRS 레코즈를 설립한 마일스 코플랜드가 미국의 가수 셰어와 영국 밴드 스퀴즈 소속 글렌 틸브룩 등 뮤지션들을 프랑스의 한 성으로 초대한 것이 최초의 송캠프로 알려져 있다. 작가 존 시브룩은 저서 ‘더 송 머신 : 인사이드 더 히트 팩토리’(The Song Machine : Inside the Hit Factory)에서 마일스 코플랜드 주최 모임을 “모든 송캠프의 어머니”라 적었다.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SM엔터테인먼트가 먼저 시작했고 이후 다른 기획사, 프로듀싱 팀들이 주최하며 이어왔다. 송캠프는 곡 창작을 더 이상 골방에서 홀로 이뤄지는 고독한 개인 작업이 아닌,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으로 바꾸는 전환점이 됐다. 만드는 방식이 바뀌다 보니 팝 사운드도 완전히 바뀌었다.

송캠프의 장점은 ‘협업’이다. 다른 작곡가들과 함께 작업을 하니 일의 효율이 높아져 빠른 시간에 다수의 곡을 만들어낼 수 있다. 예전엔 오롯이 홀로 짊어져야 했던 창작의 고통을 나눈다는 측면도 있다. 비트를 잘 만드는 사람, 후렴구를 잘 만드는 사람 등 각기 장점이 다른 뮤지션들이 협업하면서 곡의 수준도 상향 평준화됐다.

물론 창작자가 늘어나면서 저작권 분쟁이나 표절 위험이 높아진다는 단점도 있지만 국내외 다수 뮤지션의 참여로 만들어지다 보니 전 세계적인 보편성도 갖게 됐다. 역량을 지닌 전 세계 뮤지션들이 최고의 K-팝 곡을 만들기 위해 모였으니, 여기서 탄생하는 K-팝 곡이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날 송캠프에서 만난 ‘버터’ 작곡가 세바스찬 가르시아는 “한국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이전부터 한국에 오고 싶었다. 한국은 전 세계 팝의 중심이자 K-팝, BTS의 나라다.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 “개인적으로 ‘K-팝’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제 K-팝이라고 따로 떼어내 부를 필요가 없을 정도로 K-팝의 위상이 높아졌으며 주류 팝과 동등하게 바라본다는 의미에서다. 그러면서 그는 “난 K-팝을 만들지 않는다. 최고의 팝을 만들 뿐”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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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부족한 점 채우는 게 가장 큰 장점… 함께 하니 뜻밖의 멜로디 떠오르기도”

■ ‘12년째 송 캠프 운영’ 음악 프로듀서 라이언 전

‘작곡’(作曲)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두 가지 뜻이 나온다. 음악 작품을 창작하는 일, 그리고 시나 가사에 가락을 붙이는 일. 우리가 생각하는 작곡가라 함은 두 번째 뜻일 것이다. 선율을 만들어내는 자 말이다.

라이언 전(사진)은 스스로 작곡을 그만뒀다고 말하는 프로듀서다. 최근 그는 프로듀싱 배틀 프로그램인 KBS ‘리슨업’에 출연해 “2016∼2017년부터 작곡은 그만뒀다”고 말했다. SM엔터테인먼트 전속 작곡가 출신으로 동방신기와 소녀시대, 엑소 등과 작업하고, 이후 따로 프로듀싱 팀을 꾸려 워너원의 ‘나야 나’(PICK ME), 아이브의 ‘일레븐’(ELEVEN), 아이유의 ‘셀러브리티’(Celebrity) 등 히트곡을 내며 K-팝 최정상급 프로듀서로 불리는 그가 내놓은 파격 발언이었다.

최근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프로듀서라면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낼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혼자 작곡할 수 있죠. 그런데 프로듀서라면 그것을 넘어 아티스트에게 색도 입혀야 하고 무대도 꾸밀 줄 알아야 합니다. 전체적인 조율을 하는 게 프로듀서의 역할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말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역할에 관해 “전체적인 조정(coordination)”이라고 말했다. ‘작곡’의 두 가지 뜻 중 첫 번째 의미다. “각 작곡팀이 만들어내는 좋은 부분들을 잘 엮어냅니다. 의도적으로 한 트랙을 갖고 다른 두 팀에 다르게 주문을 하는 경우도 있어요. 좋은 부분들이 나오면 나중에 그 둘을 합치는 거죠. 물론 모두의 동의를 구하고요.” ‘송캠프’를 다녀와 보니 그의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갔다. 그는 연주를 한 방향으로 이끄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주방을 총괄하는 총괄셰프와 같은 역할을 했다. “물론 저도 함께 메인 멜로디를 만듭니다. 특히 이번엔 처음 함께하는 작곡가분들도 많았어요. 제가 가진 노하우도 전수했습니다.”

라이언 전의 프로듀싱 팀은 ‘가이드’를 안 받기로 유명하다. 보통의 경우, 한 그룹이 신곡을 낼 때 참고용으로 몇 개의 외국곡을 작곡팀에 준다. 그와 비슷한 스타일의 곡을 만들어달라고 주문하는 것이다. “저희는 가이드를 안 받습니다. 물론 고객이 원하는 것을 해주는 게 맞긴 하지만 되도록이면 저희가 창작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떻게 보면 ‘밉상’이죠. 하하.”

그래서인지 그에겐 믿고 타이틀곡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럴 경우 정말 철저히 분석해서 그 그룹에 맞는 음악을 만들어줍니다. 아이브도, NCT도 그랬어요. 아이브의 곡을 만들기 위해선 아이브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장원영이 어느 색을 좋아하고 안유진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등. 그래야 딱 맞는 곡이 나옵니다.”

라이언 전이 송캠프를 운영한 지도 벌써 12년, 함께하는 전 세계의 작곡가들은 700명 이상이다. 집단 창작, 협업의 이점에 대해 물었다. “서로 부족한 점을 채워줄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입니다. 일상을 계속 함께하다 보니 뜻밖의 수확을 얻을 때도 있죠. 엑소의 ‘러브 미 라이트’(Love me right)는 다른 작곡가들과 함께 순두부찌개를 먹다 흥얼거린 데서 멜로디가 나왔습니다.”

“제가 K-팝을 시작했던 때만 해도 정말 소수의 사람만 즐기던 수준이었어요. 팀으로 함께 곡을 만들어내는 것도 그때는 소수였는데 이젠 많은 분들이 하시더라고요. 이렇게 성장해서 오히려 엄청난 분들이 저희와 같이 작업하자고 찾아오는 정도니 정말 뿌듯하죠. 앞으로도 K-팝의 날씨는 맑다고 봐요. 저도 더 열심히 곡을 만들 거고 보석도 더 많이 찾아낼 겁니다.”

박세희 기자 saysay@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