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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파워인터뷰 게재 일자 : 2022년 11월 23일(水)
“한국문학 수장고 보니 온몸에 소름… 미래 자부심 되게 보존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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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문정희 국립한국문학관장은 “시를 지키면서 끝까지 사랑했다”는 점에서 스스로 성공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며, “내가 참 많이 사랑했던 한국 문학, 또 나를 사랑해준 한국 문학을 위해, 나의 경험과 그 경험에서 나온 나침판으로 봉사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호웅 기자


■ 파워인터뷰 - 신임 국립한국문학관장 문정희 시인

2025년 개관 목표로 작업 중
근대문학 태동 1900년대지만
시기 · 공간적으로 다 열어놓고
비판받는 작가 작품까지 포함
열심히 수집 · 분류해 전시할것

나는 뜻밖에도 굉장한 겁쟁이
거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독서
바쁜 덕에 요즘 ‘고독’ 이 깨져


인터뷰 = 최현미 문화부장 chm@munhwa.com

문정희 시인은 최근 국립세종도서관 수장고를 돌아보고 온몸에 소름이 돋게 감동을 받았다. 시인이 도서관 수장고를 찾은 것은 1969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불면’과 ‘하늘’이 당선되면서 등단한 53년 차 시인으로서가 아니라 국립한국문학관 관장으로서의 방문이었다. 2025년 개관하는 국립한국문학관으로 갈 각종 자료와 문헌이 세종도서관 수장고에 보관돼 있기 때문이었다.
“자료들 하나하나를 보면서 한국 문학이 참 위대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한국 근대 문학 태동기를 1900년대로 보지만 시기적으로 그 위로 거슬러 올라가고, 공간적으로도 모두 열어놓고, 한국 문학이 미래에 큰 꿈과 자부심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거예요. 53년간 시를 썼고, (등단 전) 어린 시절에 시집을 냈으니 내 생애 전체가 한국 문학 안에 있었어요. 내가 참 많이 사랑했던 한국 문학, 또 나를 사랑해준 한국 문학입니다. 나의 경험과 그 경험으로 만들어온 나침판으로 봉사하고 싶습니다.”

신임 국립한국문학관장으로서의 포부를 말하며 시인은 우스갯소리처럼 한마디를 보탰다. “그래서 좀 많이 바빠요. 저의 고독이 좀 깨졌어요.” 고독은 자유, 여성, 생명, 뜨거운 사랑 등과 함께 시인이 오랫동안 붙들어온 시적 화두다. 때맞춰 그의 15번째 시집 ‘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민음사)도 나왔다.

시집을 펼치면 ‘시인의 말’을 대신한 시 한 편이 독자를 맞는다. ‘늘 새로 태어나기 바빠/해가 기울어 간 것도 몰랐다.//살과 뼈/들끓는 나로 시를 살았다//미완성으로 완성이다//10대 때부터 어린 시인/아직도 어린 시인//그것참 황홀하다.’ 등단 53년, 시로 바빴던 긴 세월을 통과해 도착한, 이제 시로 완성될 시간에 ‘미완성’이라니. 그리고 오랫동안 ‘뜨거운 사랑’을 외쳐온 시인이 ‘좀 추운 사랑도 좋다’니. 그에게 어떤 변화가 생긴 것일까. 지난 14일, 서울 중구 정동길 한 카페에서 시인을 만났다.

―미완성으로 완성은 어떤 뜻인가.

“인간은 미흡한 존재로 결국 미완성이다. 시집에 수록된 ‘디자이너 Y’는 나의 ‘시론’이라고 할 수 있다. 시에서 디자이너 Y는 옷을 다 만든 후 가위로 겨드랑이에 구멍을 내고, 소매를 짝짝이로 만든다. 그는 최선을 다해 옷을 만든다. 체형에 맞게, 계절에 맞게, 아름다움과 자신의 미의식에 맞게. 가다가 도중에 그만두거나, 엉성하고 미숙한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만든다. 그렇게 완성된 옷을 가위로 자른다. 그건 ‘미완성인 채로 나다’는 얘기와는 다르다. 자기가 생각하는 완성에 올라간 뒤, 완성을 향해 다시 시작하는 거다.” 시로 말하자면 최선을 다해 시를 쓰지만, 그 시를 찢고 다시 써나간다는 지독한 ‘태도’에 대한 이야기처럼 들렸다.

―시를 통해 늘 ‘뜨거운 사랑’을 이야기해왔는데 이번에 ‘추운 사랑도 좋다’고 했다. 어떤 변화인가.

“뜨거운 사랑, 그게 변했다. 변하는 게 나쁘지 않다. 요즘 들어 인생은 실망, 절망, 상처, 죄의식, 부끄러움 같은 것들이 뭉쳐진 것임을 알게 됐다. 그 인생마저도 바람이 훅하고 불면 날아가 버린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 인생이 중요하다. 비록 시간 속에 변하고, 결국 허탕이 된다 해도 여러 실오라기가 묶여 만들어진 밧줄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래서 시시한 시도 좋고, 추운 사람도 좋다.” 이어 그는 “나는 늘 언어를 정신과 육체 속에 저장해 사는 존재라고 생각했고, ‘나는 쓴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을 해왔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늘 시를 써서 존재해 왔지만 그것으로 인해 생긴 것들, 예를 들어 명예 같은 건 본질적으로 나와 상관없다. 그런 것은 그저 향기나, 잠깐 산꼭대기에 쌓인 눈 같은 거다”는 말을 덧붙였다.

―문정희 시인하면 에너지, 격정, 거침없음 같은 단어들이 떠오른다. 타고난 성향인가 노력의 결과인가.

“두 가지 다다. 어려서부터 ‘나는 나다’를 지키려 애썼다. 기쁠 때는 물론, 좋지 않은 일을 당할 때도 나 스스로에게 실망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특별한 계기가 있나.

“11세 때 도시(광주)로 혼자 유학 왔다. 모두가 어려운 시절이었는데, 부모님이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해 도시에 나가 공부하게 했다. 나중에 보니 매우 대담한 결정이었다. 그때 홀로 도시의 친척 집에서 지내며 어두운 골목에서 내지르는 고함도 무서웠고, 번쩍이는 네온사인에 겁먹었다. 주변에 있을 수 있는 위험과 적의에도. 그때 나는 많은 사랑과 기대를 받는 나 자신을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존재, 몹시 귀한 존재라고 생각하며 견뎠다. 그때부터 ‘나는 나다’라고 생각했다.” 시인은 그 11세 어린 시절 이후 자신은 늘 혼자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고독’이 시적 화두가 됐다고 말했다.

―1969년 ‘월간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후 고독과 함께 자유도 오랜 시적 화두였는데. 왜 자유인가.

“자유, 고독, 치명적인 사랑이 오랜 시적 화두다. 자유롭지 않은 건 견디질 못한다. 호기심이 많고 싫증도 잘 냈다. 실은 내가 겁쟁이였는데, 겁이 나는 위험한 상황에 놓여도 너무 궁금해 그 끝을 봐야 했다. 하지만 이 단어를 정식으로 쓴 건 20여 년 전, 한 문학상 수상 소감에서였다. 그때 ‘맹수는 혼자 다닌다. 그 혼자의 고독으로 포효할 때 그것이 시다. 참새 떼나 쥐 떼들은 몰려다닌다’고 했다. 그때 진짜 맹수가 되고 싶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생각하는 건 네포티즘이다. 네포티즘에 따라 너는 좋고 너는 나쁘다고 나누는 것이 싫었다. 세상의 정의는 여러 개인데 한 개의 정의를 갖고 난도질하는 것도 견딜 수 없었다. 맹수처럼 혼자 가겠다고 생각했다.”

―18세 진명여고 3학년 때 시집을 내고, 전국 백일장을 휩쓴 ‘문학계의 아이돌’에, 미당 서정주의 제자였다. 문학의 화려한 중심을 걸은 것 아니었나.

“남성들이 지배한 문단에서 여성이었고 학연이나 연고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청소년 시절 화려하게 등장했지만 한때 깊은 공백의 슬럼프도 겪었다고 했다. 그 공백의 계기는 1982년, 결국 2년 만에 돌아온 뉴욕 유학이었다. 하지만 서른 초반, 뉴욕 생활은 여러모로 그에게 많은 시적 변화를 끌어냈다. 그의 평생의 시적 화두인 ‘자유’ ‘여성성’ 등도 이때 다져졌다고 한다.

“아무것도 아니면 어때/지는 것도 괜찮아/지는 법을 알았잖아/슬픈 것도 아름다워”라며 삶을 끌어안는 문정희 시인은 “살아있다는 거 빼놓고는 나머지는 아무것도 아니다. 순간만이 내 것”이라고 말했다. 김호웅 기자


“지금 나의 관심은 ‘무의미의 축제’… 이 생의 순간순간을 즐겨라”

젊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
나이 들면서 보이니 선물 같아
고통·비극 살아있기에 일어나

15번째 시집 ‘추운 사랑도 좋아’
미완성 삶에 대한 자각 같은 것

다음 시집의 형식은 ‘산문시’로
즐겁고 유머러스하게 쓰고 싶어


―오래전 이야기지만, 뉴욕 생활이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그때 뉴욕에서 일하고 있던 남편이 시를 쓰려면 이 세계를 알아야 한다며 오라고 했다. 학교(진명여고 교사)에 사표를 내고 애들 둘을 데리고 갔다. 가난하고 힘들어 평생 할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고 평생 흘릴 눈물이란 눈물은 다 흘린 것 같다. 2년 만에 돌아왔는데, 그사이 한국은 내 느낌에 10년은 변한 것 같았다. 시의 시대였는데, 이미 다음 세대가 등장해 그전에 나름 신진으로 주목받던 내 이름은 간 곳이 없었다. 뉴욕의 경험과 얘기들을 시로 썼지만 1980년대 중반 한국 사회는 너무나 다채롭고 뜨거웠기에 주목받지 못했다. 시인으로 사라진 존재였다. 모든 것이 돌아앉아 있었다. 하지만 뉴욕의 경험이 황홀한 자극이 됐다.”

―어떤 영향이었나.

“그곳에서 평소 보지 못한 예술적이고 황홀한 세계를 봤다. 영화를 보고 연극을 보고 그림을 보고, 진짜 자유를 봤다. 그때까지 내가 본 자유는 정치·이데올로기적인 자유, 선거 벽보에 쓰여 있는 자유였는데 뉴욕에선 진짜 자유가 굴러다니는데 미칠 것 같았다. 밥 딜런이 기타를 치고 앨런 긴즈버그가 시낭송을 했다. 히피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이 들끓는 용광로였다. 그래서 앞으로 어떤 것이 와도 자유, 이 생명의 풋풋함을 잃지 말자고 생각했다.”

이와 함께 그는 시에 대한 또 다른 통찰의 눈도 얻었다. 시는 당대 언어로 쓰는 것이기에 문학 자체의 역량뿐 아니라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었다. 글로벌한 그곳에서 자신의 시가 번역됐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물론 번역이 되려면 좋은 시를 써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또 당시 뉴욕에서 급진적인 여성 운동이 벌어지면서 그 역시 페미니즘에 대한 이론적 체계를 공부했다고 한다. 부당한 건 알겠는데 왜 부당한지 몰랐던 문제에 대해 답을 얻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부당한 여성의 문제로 넘어갔다.

―평생 학교 선생, 교수로 일한 워킹우먼이다. 시를 통해 가부장제를 공격하고 그 폭력성을 드러내 왔다. 개인의 경험이 시가 됐나.

“나는 조기 유학해 교육받은 특별한 딸이었는데 이 딸이 완전히 조선 시대로 돌아갔다. 4대 독자와 결혼해 아들을 낳아야 했고, 1년에 제사가 6번이나 있었다. 밖에 나가면 여성차별이 엄혹한 조직 사회에서 일했다. 가난한 결혼생활이 황당하고 기막히긴 했지만 그분들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전통이고 관습이었다. 아무 잘못 없이 가해를 한 것이다. 나는 곧 결혼제도의 허위와 맹점을 알아버렸다. 결혼이 사랑과 행복으로만 채울 수 없다는 사실, 희생·위선·절망·후회, 이 모든 것이 포함된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이를 가진 엄마였기에 견딜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내 시의 소재가 됐다. 엄청난 소재였고 좋은 재료였다. 나는 세 살 때 6·25를, 10대에 4·19, 5·16, 유신과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었다. 농경사회, 산업사회, 초정보화사회를 거쳐 글로벌사회까지 왔다. 한 몸으로 이렇게 다양한 변화를 겪은 건 문학적으로 엄청난 자산이다.”

―혹시 현실과 시적 이상 사이 간극은 없었나.

“내가 꽤 연기파인 것 같다. 나는 사실 뜻밖에도 굉장히 겁쟁이다. 어려서 혼자 도회에 떨어져 겁을 먹었다. 그것을 이겨내는 방법은 오직 정직과 성실, 그런 것들이었다. 자유와 고독, 풀어헤친 머리칼, 치명적인 사랑을 갈구하는 눈망울 속에 뜻밖의 엄청난 제도적 성실함이 있었다. 때론 그걸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겁쟁이다. 그러니 너무 겁낼 필요 없다. 어렸을 때 상여집이 있었다. 그곳에 엄청 무서운 귀신이 있다고들 했고, 울긋불긋한 옷들이 걸려 있었다. 너무 무서워서 거기를 지날 때면 돌아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람에 문이 열려 있어 안을 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대상도 그런 것이다.” 그는 겁쟁이에서 벗어나는 길은 ‘팩트’, ‘팩트’를 바라보는 눈이라고 했다. 막연한 두려움의 정체를 보는 날카로운 눈을 길러야 한다고, 그에게 그 길은 독서였다고 했다.

―한 인터뷰에서 ‘여성의 언어로 시를 쓴 시인’으로 남고 싶다고 했는데, 선생이 생각하는 여성성이란.

“오래전 멕시코에 갔을 때 지도에도 안 나오는 작은 원시마을에 들렀는데 그곳에서 말구유에 머리를 감는 한 할머니를 봤다. 그때 나는 생명 모체로서의 대지모를 떠올렸다. 내가 말하는 여성성은 대지모, 생명을 품어 안은 대지모다.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본질적 존재다.” 그래서 그는 여성을 남성의 상대적 존재로 보지 않는다. “여성을 남성의 상대로 보면 의미가 작아지고 시비의 대상이 된다. 남성은 여성의 적이 아니다. 적대적으로 안 봤으면 한다. 그냥 사랑스러운 대상이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운명 때문에 차별하면 안 된다. 인종처럼 젠더도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아직 여성의 갈 길은 멀다고 했다. “신춘문예 심사를 해보면 70% 정도는 여성 응모자인데 여성 심사위원은 몇 퍼센트가 안 된다. 실제로 게이트키퍼, 수문장으로 남성이 서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남녀 간 덧나는 부분만 이슈화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그는 이 모든 면에서 우리사회가 좀 더 깊어지기를 바랐다.

―시집은 14권이 11개 언어로 번역, 출간됐다. 한국 문학의 세계화를 몸소 느끼는지.

“문학의 세계화 같은 거창한 얘기를 해본 적이 없다. 나는 그저 시를 쓰고, 밖에 나가 문정희 문학을 얘기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봐 준다면 고맙다. 하지만 시집이 전 세계에서 번역, 출간되면서 배운 것이 있다. 한국어는 주어도 생략되고 감춰진 것도 많다. 그래서 가능하면 번역을 염두에 두고 쓴다. 영어를 못 하는데, 번역할 때 말이 되는가를 따진다. 그래서 단어를 바꾸기도 하고, 언어가 정확하고 맞는 건지 여러 번 본다.” 지난여름엔 이탈리아에서, 곧 중국에서 시선집이 출간된다.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대학에 각국 언어로 된 나선형 시비가 서는데, 그곳에도 문정희 시인의 시가 들어갈 예정이다.

―한국문학관 관장으로서 계획은.

“코로나19 등 여러 외부 상황으로 지연됐지만 차질 없이 계획대로 진행되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제까지는 우리가 소중한 문학 자료들을 잘 수집하고 보존했다고 볼 수 없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다양하고 깊게 자료를 수집하고, 잘 분류해 세련된 방식으로 전시하고 보존하겠다. 한국 문학이 미래에 큰 꿈과 자부심이 되도록 하겠다.”

그는 최근 2025년에 개관할 한국 문학 관련 자료들을 보관하고 있는 세종국립도서관 수장고를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좋은 자료들을 하나하나 보니까 한국 문학이 참 위대하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됐다. 백 마디 말보다 더 절절한 감동이었다”고 했다.

―한국 문학 자료 수집 등에 관련된 틀이 있나.

“우리 근대 문학 태동기를 1900년대로 보지만 시기적으로, 공간적으로도 모두 열어놓고 작업을 벌이려 한다. 해외에서 발간된 것들, 한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돼 있지만 한국인의 삶을 그린 것, 또 역사적으로 비판받는 작가들까지 광범위하게 포함해 전시하려 한다. 현재 전문가들이 열심히 분류 작업을 하고 있다. 그 사이사이 한국문학관의 중요성과 의미를 알리고, 확대하기 위해 전시와 세미나 같은 것을 하면서 개관을 준비해 나가겠다.”

―디지털 시대 문학관은.

“문학관도 디지털이라는 방향에 맞춰 준비하고 있다. 우리가 소장하지 않은 자료가 있다 해도 다른 나라 유수의 도서관 등과 연결해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인간이 만든 물건 가운데 책처럼 매혹적인 것은 없다고 했던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 보르헤스 말에 동의한다. 실명돼 눈이 보이지 않던 보르헤스는 책을 사랑하는 당이 있다면 나는 그 맨 앞줄에 앉을 것이라는 말도 했는데, 나 역시 그렇다. 아무리 디지털이 발달해도 그 중심은 책이다. 책은 참 사랑스럽다.”

―최근의 관심은.

“나이 듦이다. 인간이 늙고 병들고 간다는 건 엄숙한 사실이다. 가을이 오듯, 자연스러운 일인데 받아들이기 어렵다. 하지만 젊었을 때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인다. 옛날에 다 아름답게만 보이던 것에서 약간의 그늘이 보인다. 그건 또 선물이다.”

그래서 그는 다음 시집의 테마를 이미 정해놨다. ‘무의미의 축제’다.

“이제까지 시집을 낼 때 어떤 주제를 정해놓고 낸 적은 없다. 쓴 시를 쭉 보고 주제를 정해 묶었는데 다음 시집은 ‘무의미의 축제’에 대해 쓰려 한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제목이긴 하지만, 무의미의 축제를 즐겨야 한다. 젊다고 의미의 축제는 아니다. 그냥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는 무의미의 축제를 자신의 시 ‘늙은 꽃’에 빗대 이야기했다. “꽃의 DNA에는 늙음과 주름이 없다”고, 그저 활짝 필 뿐이라고. 우리의 삶도 그렇다는 것이다.

―‘오직 순간만이 나의 전부’라고, ‘살아있다는 건 순간순간 파도치는 것이고, 그 파도는 영원히 다시 반복할 수 없다’고 했는데.

“그렇다. 14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관이 마당을 도는 것을 봐서 그런지 일찌감치 살아있다는 것, 지금 생생한 이 순간이 전부라고 생각해왔다. 순간만이 내 것이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이 순간만이 내 것이다. 엄청난 고통, 비극, 절망이라 해도 이 또한 살아있기에 일어난 일이다. 오래전 프리다 칼로의 집에 간 적이 있다. 멕시코를 여러 번 갔는데, 매번 생각만 하다가 어느 해에 마음먹고 갔다. 그런데 그렇게 기대하고 간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의 고통도, 예술도, 사랑도 없었다. 그저 기둥마다 웃는 해골들이 걸려 있었다. 살아있다는 거 빼놓고는 나머지는 아무것도 아니다. 순간만이 내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최근 문학상과 관련한 논란에 대해 물었다. 시인이 자신이 운영위원으로 있었던 문학상 수상자로 내정되면서 일어난 논란에 대한 일이다. 그는 “내가 바란다고 파도가 오고 바란다고 파도가 가겠는가, 그것밖에 할 말이 없다”며 말을 아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그것이 또 새로운 논란을 일으킬 수 있기에 침묵을 지키겠다고 했다. “침묵의 힘이 생각보다 많은 말을 한다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는 그는 이번을 계기로 오히려 자신에게 시가 쏟아졌다고 했다. 이 쏟아진 시들 역시 시간이 지난 뒤에 내놓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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