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잊을 수 없는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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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우 영화배우

중2 올라가는 봄방학 성경반에
최고 인기 미남 선생님이 담임

3월1일 우리 데리고 북한산 등산
꽁치 김치찌개 산상 오찬 못잊어

먼 훗날 경주에서 집으로 초대해
밥상 정성껏 차려 주시던 그마음

학창 시절, 2월 하순이면 한 학년이 끝나고 3월 첫 월요일 새 학년이 시작되기 전 1주일 정도 방학이 있었다. 학교와 부모님께서는 봄방학은 새 학년을 준비하는 기간이라고 하시는데, 뭘 준비해야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애매한 시간이었다.(한 학년 수고했으니 좀 쉬어라 하는 게 맞는 것 아닌가?)

학창 시절을 통틀어 여러 번의 봄방학이 있었으나, 그중 특별히 기억이 나는 건 초등학교 졸업한 뒤의 봄방학. 중학교에 올라가면 영어라는 과목이 있으니 알파벳 정도는 읽고 쓸 줄 알아야 한다며 선행학습 즉, 과외공부를 시키셨다. 선행학습이란 게 알파벳 대문자, 소문자가 점선으로 그려져 있는 노트에 펜촉에 ‘빠이롯트 잉크’를 찍어 이어주는 건데 ‘아니, 그냥 한가지로 쓰지, 대문자 소문자 구별해서 나를 피곤하게 하나’ 하고 투덜댔던 기억이 난다. ‘아 웃긴다, 중학교에 갈 때 영어를 처음 하게 되다니 우리는 미국 사람과 말도 하는데….’ 지금 유치원생들이 까르르 웃어도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알파벳을 그리며(?) 동시에 단어도 배웠다. 그중 데스크(desk)라는 단어는 알파벳 생긴 모양과 발음 기호가 같아 읽기가 쉬웠으나, ‘차이르?’ ‘츠에어?’ 정말 읽기 불편하니 잘 외워지지도 않던 단어. 알파벳 생긴 모양과 발음이 연결이 안 되어서 받아쓰기할 때마다 틀렸던 단어 ‘체어(chair)’ 때문에 그 봄방학이 즐겁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중2로 올라가는 봄방학. 대개는 3월 첫 월요일에 새 학년이 시작되는데, 3월 1일은 3·1절 공휴일이었다. 다니던 교회 주일학교에서도 한 학년씩 진급하면 반편성과 함께 새 선생님도 맞게 되는데, 그해는 정말 기분이 좋았다. 친한 친구들이 같은 반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가장 인기 많은 분이 담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미끈하게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호남형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언제나 미소를 머금고 계셨는데, 딱 벌어진 어깨와 특히 달리기를 잘할 것 같은 체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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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우리가 여쭙지도 않았는데 그분은 성경 공부를 서둘러 접고는 학생들의 성적(成績)과 성적(性的)인 문제에 관해 입을 여셨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주일학교에서 어울려 자란 우리로서는 벌건 대낮에 그런 얘기를 같이 듣는다는 게 꽤나 쑥스러웠다. 그런데 활발하고 박력 넘치는 선생님께서 봄방학의 마지막 날인 3월 1일에 등산을 가자고 제안하셨다. ‘너희들에게 전에 경험해 본 적이 없는 환상적인 시간을 산 위에 펼쳐 주마!’ 의욕적인 표정에 반기를 들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그분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우리에게는 영광이자 기쁨이었다. 그분은 우리 반뿐만 아니라, 우리 학년 전체에게 예수님 다음으로 영향력이 있었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성경 공부하는 시간 다른 반 학생들은 우리를 부러운 듯 쳐다보는 일이 허다했고, 어린 마음에 우리 반은 선택받았다는 착각을 하기도 했다.

등산 계획이 공표되고 이어 실질적인 임무가 부여되는 시간은 마치 거사를 앞둔 비밀 결사대들처럼 엄숙하고 진지했다. 그래 봐야 쌀·숟가락·젓가락을 누가 갖고 오는가 하는 문제였다. 그 지령(?)을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들었던 것은 처음 가 보는 등산에 대한 기대와 산 위에서의 식사가 기대됐기 때문임은 물론이다. ‘산상 오찬’은 꽁치 김치찌개가 메인디시로 정해졌고, 평소 밥통을 끼고 앉아 먹는 사춘기 아이들 예닐곱 명의 식사를 위한 화력 좋은 버너와 코펠은 선생님이 준비하고, 가장 중요한 꽁치 통조림과 쌀 그리고 김치는 각자 조금씩 우리가 나누어서 준비하기로 했다.

드디어 D데이! 북한산 산행 중 미끈거리는 바위틈을 헉헉거리며 빠져나올 때 날리기 시작한 운치 있는 3월의 눈발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꿈결 같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산모퉁이에서 매서운 바람에 펄럭이던 버너의 파란 불꽃과 커다란 코펠 뚜껑을 돌로 눌러 놓은 장면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높은 산에서는 기압이 낮아 그렇게 해야 밥이 제대로 된다는 말씀과 함께. 요즘 남산 산책길에 가끔 들르는 돈가스집에서 넓적한 돈가스를 마다하고 꽁치 김치찌개를 굳이 먹는 것은,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눈발 날리는 북한산 정상에서 희뿌연 서울을 내려다보며 먹었던 그 추억 때문이 아닐까?

1980년대 중반, 선배의 결혼식이 있어서 여럿이 경주에 내려간 일이 있다. 당시 어느 호텔의 중역으로 계시던 그분과 연락이 닿았고, 반가운 목소리로 위치를 말씀하시면서 ‘집으로 오라’ 하셨다. 초행길임에도 다감한 설명 덕분에 혼자 경주 외곽에 있는 아파트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온화한 모습의 사모님께서 식사를 준비하다가 ‘마치 버선발로 뛰어나온 듯’ 어찌나 귀하게 맞아 주시던지…. 호텔에서 차만 한잔해도 충분히 기쁜 일인데 집으로 초대해서 이른 저녁을 정성껏 차려 주시는 마음은 내가 간직하고 있는 그분 그대로였다. 어린 날 나의 정신적 지주이셨음을 알고 계셨을까.

사모님의 그 단아한 모습이 흐려질 때쯤 의외의 장소에서 사모님의 소식을 듣게 된다, 암으로 투병하시다 세상 떠나셨다는. 오래전 경주에서 두 분을 뵙고 혼자만의 아련한 마음으로 서울로 돌아오던 때 우리 일행 모두의 도시락을 버스터미널로 보내 주셨던 사모님의 따스한 성품이 여태 마음속에 남아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