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여담]범죄자 ‘입’과 플리바게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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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입력 2023-01-25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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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동 논설위원

태국에서 체포된 김성태 쌍방울그룹 전 대표가 애초 예상과 달리 자진 귀국했을 때 검찰과 ‘거래’했을 가능성을 점치는 시각이 많았다. 특히 야권 지지자들은 그가 저지른 배임·횡령, 주가조작 등의 범죄를 봐주는 대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관련된 변호사비 20억 원 대납 의혹이나 대북 사업비 대리 송금 의혹 사건 등에서 구체적인 진술이나 물증 제시 등을 약속하는 뒷거래가 이뤄졌을 가능성을 우려했다.

그러나 그는 변호사비 대납이 사실이 아니라고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이재명을 만난 적도, 통화한 적도 없다고 원천 부인했다. 대장동 사건의 핵심 피고인인 김만배 씨도 자해로 한동안 병원에 입원했다가 다시 법원에 나오면서 “재판에 최대한 협조하겠다”고 해 태도 변화에 대한 기대를 낳았으나 역시 의미 있는 진술은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피고인이 유죄를 인정하거나 다른 사람에 대해 증언을 하는 대가로 검찰이 구형량을 낮추거나 가벼운 죄목으로만 기소하기로 거래하는 것을 플리바게닝(plea bargaining)이라고 한다. 유죄협상제 또는 사전형량조정제도라고도 하는데, 미국에서는 형사사건의 95%가 이 방식을 통해 해결되는 등 적극 활용되고 있다. 수사에서 재판 최종심까지 소요되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일본, 영국, 프랑스, 스페인, 독일 등에서도 채택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플리바게닝에 대한 법적 근거가 없다. 선처를 바라고 피의자가 자진해서 수사에 협조하는 경우는 있지만, 사전에 검찰과 ‘딜’을 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11년 사법협조자 형벌감면제 도입 시도가 있었으나 반대 여론이 많아 유보됐다. 범죄자와 형량을 흥정한다는 게 정의 관념에 어긋난다는 명분론이 압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증거를 찾기가 쉽지 않은 조직, 마약, 뇌물 범죄에서 내부자 제보나 진술이 최종 책임자의 혐의 입증에 결정적일 때 ‘작은 악’과 거래하는 게 오히려 합리적일 수 있다. 범죄자 자신에게 아무런 실질적 이익이 없는데, 보복 위험성을 감수하고 조직의 수장이나 조폭 두목의 범죄를 증언할 이유가 없다. 범죄자의 선의(善意)를 기대하는 허망한 제도를 고집하는 건 거악(巨惡) 처벌을 불가능하게 해 결과적으로 큰 범죄자를 돕는 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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