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경의 시:선(詩:選)]뒹굴뒹굴의 시간

기사 정보
문화일보
입력 2023-01-25 11:34
기자 정보
기사 도구
프린트
댓글
폰트
공유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이봐, 야망이 장화 신은 양발에 번갈아 체중을 실으며/ 초조하게 말하지-이제 시작하는 게 어때?// 왜냐하면 내가 거기, 나무들 아래, 이끼 깔린 그늘에 있거든.//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게으름의 손목을 놓아주기가 싫어, 돈에 내 삶을 팔기가 싫어,’

- 메리 올리버 ‘검은 떡갈나무’ (시집 ‘서쪽 바람’)



연말에 이어 연초까지, 사업 정산의 건으로 분주했더랬다. 어긋남 하나 없이 숫자를 맞추고 결과와 효과 예상들을 보고서에 작성해 제출하고 검토받는 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휴식에 대한 바람이었다. 아무 일도 없는 하루가 생기면 하고 싶은 일들이 떠올라서 마냥 행복해졌다.

마침내 정산이 끝났다. 절대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손이 비는 날들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막상 시간이 생기고 나니 나는 태엽이 다 풀려버린 장난감처럼 맥을 못 췄다. ‘책을 읽겠다’ ‘영화를 보겠다’ ‘친구들을 만나 술잔을 기울여 보겠다’ 따위의 계획들은 간곳없이 사라지고 그저 무기력하게, 멍하니 책상 앞에 앉아서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실은, 작년에도 겪었던 아주 익숙한 감각이다. 어쩔 줄 모르겠는, 무엇이든 해야 할 것만 같은 초조함. 이것은 일종의 관성임을,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며 곧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새로이 바빠지면 이 시간을 그리워할 것이며, ‘제대로’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되겠지.

‘제대로’라고? 무심코 떠올린 부사에 화들짝 놀란다. 일과 일 사이의 시간, 이 한가함마저도 계획을 세워 차근차근 보내려 했던 게 아니었나 싶어서. 게으름은 게으름이다. 어떤 시간에는 세세 면밀한 계획이 필요한 것처럼 이것 또한 사람의 시간 아닌가. 나는 다른 부사어를 떠올린다. ‘뒹굴뒹굴’. 몽땅 다 잊고, 며칠만이라도 이렇게 보내리라 다짐하는 것이다.

시인·서점지기
주요뉴스
기사 댓글

댓글 영역은 접힘 상태로 기본 제공되며, ON/OFF 버튼을 통해 댓글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AD
AD
AD

ADVERTISEMENT

서비스 준비중 입니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