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테카 원주민, 책 그리고 민주화… 틀라텔롤코에 새겨진‘학살의 기록’[지식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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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입력 2023-02-06 09:13
업데이트 2023-02-06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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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멕시코시티의 팔라시오 데 벨라스 아르테스 극장 전경. 멕시코 문화와 예술의 상징적 공간이다. 게티이미지뱅크



■ 지식카페 - 장은수의 도시와 문학 - (23) 멕시코시티

9000년 전 호수에 지은 섬, 대형 피라미드 등 메소아메리카 신화 유래… 마야·톨테카 문명 이어지며 ‘명성’
스페인 침략 이후 역사·신앙 말살 당하고 전염병에 ‘몸살’… 독립 후에도 무정부 상태·민주화 시위 등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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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시티는 미국 뉴욕, 중국 상하이(上海), 인도 뭄바이 등과 함께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도시에 속한다. 해발 2240m 고원지대에 약 2200만 명이 어울려 사는 거대 도시는 아스테카 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이 자리 잡아 번영한 곳이었다. “도시는 호수 속 섬에 있습니다. 살라망카 대광장보다 크기가 두 배 정도로 커 보이는 광장이 있는데, 둘레엔 상점이 빽빽이 들어차 있고, 날마다 6만 명 이상의 사람이 찾아와 물건을 사고팝니다.”

1521년 스페인 침략군을 이끌고 아스테카 제국을 무너뜨린 에르난 코르테스는 말했다. 인구 20만의 테노치티틀란은 파리, 나폴리, 콘스탄티노폴리스 등 당대 유럽 어느 도시보다 번영했다. “우린 넋을 잃었다. 이곳은 중세 기사 소설에 나오는 마법의 땅과 비슷했다.” 그들은 황금의 도시를 약탈하고 파괴했다.

시장이 있던 곳이 틀라텔롤코 광장이다. 이곳에서 세 차례 학살이 일어났다. 첫 번째 학살은 1521년 아스테카 제국이 멸망한 날에 벌어졌다. “길거리와 광장에는 구더기가 들끓고,/ 담벼락은 뇌수로 범벅이 되었다./ 염색한 듯이 시뻘건 물,/ 그 물을 마시니 소금물을 들이켠 듯하다.”

멕시코시티에 처음 사람이 정착한 것은 약 9000년 전이다. 아시아계 유목민이 텍스코코 호수 기슭에 마을을 이룬 것이다. 약 3000년 전, 북으로 50㎞ 정도 떨어진 곳에 테오티우아칸이 건설됐다. 아스테카어로 ‘신의 탄생지’를 뜻하는 이 도시는 거대한 계단식 피라미드인 태양의 신전과 달의 신전, 죽은 자의 거리 등으로 이뤄져 있다. 깃털 달린 뱀인 케찰코아틀을 숭배하고, 인간 심장을 제물로 바치는 등 메소아메리카 특유의 신화 체계가 이 문명에서 유래해 마야(4∼9세기), 톨테카(9∼12세기)로 이어졌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멕시코시티 외곽의 테오티우아칸 피라미드. 게티이미지뱅크



“부싯돌 해(1116년)에 우리는 꼭 필요한 것만 지닌 후,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 신성한 동굴에 도착했다. 신은 우리에게 예정된 땅, ‘선인장 위에 독수리가 앉아 있는 곳’을 향해 떠나라 했다. 우리는 신에게 선택된 사람들이었다.”

아스테카 서사시 ‘여정의 두루마리’는 노래한다. 1325년 아스테카인은 예언의 땅에 테노치티틀란을 건설한 후 도시국가 멕시카를 세웠다. 멕시카는 강대한 도시 국가인 텍스코코, 틀라코판과 삼각동맹을 맺고, 주변 여러 도시를 정복하는 등 세력을 길러 1500년 무렵 메소아메리카 전역을 호령하는 제국이 되었다.

“행복할지어다/ 흑요석 칼날에 희생된/ 사람이여/ 전쟁에서 죽은 사람이여.” 아스테카 제국의 멸망에는 인신공희가 큰 영향을 끼쳤다. 아스테카인들은 심장을 제물로 바치지 않으면, 태양이 식어 세계가 종말에 이른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갈수록 더 많은 심장을 바치려 했고, 제물 마련을 위해 정복 전쟁을 벌였다. 이는 피지배자들의 반발과 분노를 가져왔다. 통역사였던 말린체를 통해 이 사실을 알아낸 코르테스는 부족 간 원한과 복수를 부추겨 내부 분열을 조장함으로써 제국을 무너뜨리는 촉매로 삼았다.

두 번째 틀라텔롤코 학살은 1529년에 일어났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불의 기억’에서 고발했다. “횃불을 치켜든 가톨릭 사제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책이 쌓인 곳으로 다가갔고, 그 많은 책은 곧 재로 변했다.” 멕시코 초대 주교 후안 데 수마라가가 문서보관소에 있던 기록들, 경전들, 작품들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불살라버린 것이다. 책의 학살이었다.

스페인 침략자들은 책을 불태운 곳에 성서를 내밀고, 궁궐과 신전을 부순 자리에 관청과 교회를 지었다. 멕시코시티 심장부를 이루는 소칼로 광장 주변은 아스테카의 신전과 궁궐이 있던 장소였다. 침략 이후, 원주민들은 역사를 말살당하고, 신앙을 빼앗겼으며, 광산과 농장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천연두 같은 유럽산 전염병으로 죽임을 당했다.

‘초상화에게’에서 메소아메리카 문학의 장을 연 페미니스트 시인 소르 후아나는 절망적으로 탄식했다. “그것은 어리석게 빗나간 노력/ 공연한 헛수고, 아무리 좋게 보아도/ 시체, 먼지, 그림자, 그리고 무(無)일 뿐.” 그녀의 시에는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출세할 수 없는 식민 지식인의 환멸, 가부장제 사회에서 공부조차 금지당한 채 억압받는 여성의 좌절 등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겨 있다.

차별과 억압은 1810년 미겔 이달고가 독립을 선언할 때까지 300년 동안 계속됐다. 최초의 소설 ‘엘 페리키요 사르니엔토’(1816)에서 페르난데스 데 리사르디는 “금광의 씨가 마르면 아메리카는 행복할 것”이라고 탄식하면서 봉기를 촉구한다. “올바른 국민이라면 국가 안녕이 위태로울 때 무기를 들어야 한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멕시코시티 랜드마크 중 하나인 ‘독립의 천사’ 기념비. 게티이미지뱅크



1821년 멕시코시티는 수도가 되지만, 독립은 또 다른 혼란의 출발이었다. 가브리엘 마르케스는 말했다. “해방은 우리를 광기에서 해방하진 못했습니다.” 자유파와 보수파의 대립, 군벌의 쟁투로 인해 50년 동안 30번 이상 대통령이 바뀌는 등 무정부 상태가 이어졌다. 1848년 미국은 혼란에 빠진 멕시코를 침략해 멕시코시티를 점령한 후, 텍사스에서 캘리포니아를 거쳐 유타에 이르는 영토를 헐값 구매 형태로 빼앗아갔다. 멕시코 영토의 절반이 넘는 땅이었다.

무정부 상태를 수습한 사람은 최초의 원주민 출신 대통령 베니토 후아레스였다. 1857년 집권하자마자 그는 성직자와 군인의 특권을 폐지하고, 교회와 귀족의 토지를 몰수하는 등 개혁을 실행함으로써 국가 기틀을 확립했다. 노동자·농민의 권리가 보장되는 등 근대 민주주의 체제가 완전히 도입된 것은 한참 후인 멕시코 혁명 헌법(1917)에서부터다.

1910년 에밀리아노 사파타와 판초 비야의 지휘 아래 노동자·농민은 포르피리오 디아스 독재 체제를 타도하고 농지 개혁과 빈부격차 해소를 위해 일어섰다. 혁명은 지방 족벌 제거, 농지 개혁 추진 등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고, 유럽 문화 추종을 넘어 원주민 문화에 대한 자부를 일으켰다. 옥타비오 파스는 말했다. “혁명은 우리 자신에 대한 탐색이자 어머니를 향한 회귀를 뜻한다.” 멕시코시티 곳곳을 장식한 디에고 리베라 등의 벽화운동은 변화된 현실을 반영한다.

“승리가 달성되면, 혁명은 자신을 배반한다.” ‘아르테미오의 최후’에서 카를로스 푸엔테스는 화자인 아르테미오 크루스를 통해 혁명의 타락 과정을 보여준다. 그는 토지개혁에 반대해 지주가 되고, 미국 기업과 거래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등 타락한 삶을 산다. 하지만 죽음을 앞두고 그가 떠올리는 건 혁명 기간에 사랑했던 여인이다. 돈과 권력이 아니라 순수한 이상과 사랑이 더 소중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혁명의 실체는 껍데기뿐이었다. 농지를 분배받은 농민은 거의 없었고, 석유산업 국유화 등은 미국 내정간섭으로 누더기가 됐고, 빈부격차는 해소되지 않았으며, 부패와 범죄는 극심하고, 억압적인 사회 체제는 계속됐다. 저항이 다시 시작됐다.

1968년 틀라텔롤코에서 세 번째 학살이 벌어졌다.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하던 학생에게 경찰이 총격을 퍼부어 350명이 목숨을 잃었다. ‘부적’에서 로베르토 볼라뇨는 군대가 멕시코국립자치대를 점거했을 때, 보름 동안 화장실에 숨어 수돗물만 마시면서 버텼던 한 여학생의 실화를 소설로 재현한다. 임박한 폭력과 죽음의 공포에 떨면서 아욱실리오는 폭압과 공포에 맞서 시를 읽는다. “시는 사라지지 않아. 그 무력함은 다른 형태로 돌아올 거야.” 작품에서 시는 희생자들에 대한 위무이자 악몽의 습격에 저항하는 부적이다. 문학은 기억으로 기록과 싸우고, 상상으로 현실에 대항한다.

1980년대 들어 멕시코는 과도한 외채 탓에 경제 위기에 빠져든다. ‘세계 아닌 세계’에서 호르헤 볼피는 말했다. “국제통화기금(IMF)에서 제니퍼는 군대 지휘관처럼 생각하는 법을 터득했다. 협정 임무가 탱크가 하는 일과 구별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정복은 매우 은밀하지만, 폭력적이지 않은 건 아니었다.”

1994년 그 폭력의 희생자인 치아파스 원주민들이 가난을 견디지 못하고 무장봉기를 일으킨다. 사파티스타 혁명군 부사령관 마르코스는 말했다. “우리가 건설하는 나라는 모든 공동체와 모든 언어가 어울리는 나라, 모든 발걸음이 걸을 수 있는 나라, 모든 사람이 웃을 수 있는 나라입니다.”

멕시코시티는 돈과 신분에 따라 거주지가 나뉘어 있다. 부유하고 쾌적한 중심부와 더럽고 불결한 산동네 판자촌은 스페인 침략 이후 이 도시의 뒤틀린 역사를 반영한다. 옛날엔 쫓겨난 원주민이 주린 배를 움켜쥔 채 광장 주변의 스페인인 거주지를 원한에 차서 바라봤을 테다. 구획을 제거하고 격차를 해소하지 않는 한 봉기는 막을 수 없고, 세계 최악의 공기 오염이나 마약과의 전쟁 등 사회문제도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용어설명

벽화 운동

벽화 운동은 혁명 이후 멕시코에서 일어난 예술 운동이다. 혁명 권력을 틀어쥔 알바로 오브레곤은 화가들에게 의뢰해 거리 곳곳에 벽화를 그려 혁명의 대의와 이상을 알리려 했다. 디에고 리베라,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 등은 관공서, 국립대학 등의 벽면에 아스테카 민족 서사시를 재현함으로써 멕시코의 정체성을 환기하는 한편, 일하는 노동자 등을 그림으로써 일하는 사람들의 건강한 활력 등을 보여주었다.


사파티스타

사파티스타의 근거지인 치아파스는 인구의 25%가 원주민인 멕시코 최빈곤 지역이다. 사파티스타는 본래 이 지역에서 지주들이 고용한 폭력 사병 조직으로부터 농민들을 노예화하지 못하도록 보호하는 활동을 해오던 일종의 주민 자치 조직이었다. 1990년대 초, 멕시코 정부는 옥수수 수입 제한, 커피 가격 보조금 지급 등 농민 생존권 정책을 포기하고, 1917년 혁명 헌법이 보장한 공동 토지 소유 조항도 폐지했다. 몇 차례 대규모 평화 시위가 아무 효과가 없자, 죽을 위기에 내몰린 농민들은 봉기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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