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와 시각]‘민생 오월동주’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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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완 정치부 차장

1987년 대통령직선제 도입 후 역대 대통령은 짧게는 취임 당일(문재인 전 대통령), 길게는 110일(김영삼 전 대통령) 만에 제1야당 대표와 첫 회동을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경우 당시 야당인 민주당이 대선을 마치고 2주 뒤 당 대표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를 치러 첫 영수회담이 늦춰졌다. 이 밖에 김대중(2일)-노무현(15일)-박근혜(46일)-이명박(59일) 전 대통령은 취임 후 첫 영수회담을 늦어도 두 달 안에는 진행했다. 이처럼 모든 대통령이 취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야당 대표를 만난 건 사실상 야당 도움 없이는 원활한 국정 운영이 불가능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23일 현재 취임 289일을 맞았지만, 지금까지도 야당 대표와 만나지 않고 있다. 시쳇말로 ‘넘사벽’의 경지에 돌입하면서 연일 새로운 기록이 수립되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지금과 같은 정국이라면 윤 대통령과 야당 대표의 첫 회동은 빨라야 내년 4월 총선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란 전망마저 나온다. 총선 결과에 따른 ‘당 지도부 변경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인데, 윤 대통령이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피의자 신분’이라는 이유로 만남을 꺼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배경이 깔렸다. 물론 윤 대통령이 이와 관련한 발언을 직접 내놓은 적은 없다. 하지만 이미 정치권에서는 여야를 막론하고 이러한 관측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대통령이 야당 대표를 만나는 것은 단순한 만남에 그치지 않는다. 특히, 지금과 같이 여야가 극단의 대립으로 ‘정치가 실종됐다’는 평가를 받는 상황에서는 해빙 분위기를 조성하고, 여야에는 협치를 당부하는 메시지가 될 수 있다. 심지어 과거 전쟁 한복판에서도 이뤄진 것이 바로 이해 당사국 간의 대면협상이다. 최일선에서는 총과 칼을 겨누며 싸우는 와중에도 물밑에서는 상호 피해를 최소화하고, 서로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교류가 이뤄졌다.

요즘 우리 국민은 저성장·저고용·고물가라는 ‘생활형 전쟁’을 치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소외된 이웃을 돌보고, 국가적으로는 각 분야의 ‘초격차’를 위한 정책 뒷받침을 실현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윤석열 정부가 출범 후 정부 국정과제를 실현하고자 발의한 법안 5건 중 4건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계류돼 있다. 현 정부가 야당을 무시하고 정치 탄압에만 몰두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야당은 향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는 법안들 처리에만 골몰하고 있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게 해 정치적 타격을 주겠다는 건데, 이러한 소모적 정치에 의한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이 떠안게 된다.

피의자 신분인 이 대표를 만나는 것이 부적절하다면, 법안 처리 문제를 책임지는 ‘야당 원내대표’와 만나 정국 해법 모색을 위한 회동을 하는 것도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앞서 박홍근 원내대표도 별도의 자리에서 “대통령과의 만남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면서도 “당 대표보다 먼저 대통령을 만나는 것에 대한 부담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이 대표가 양보하고, 대통령이 승낙한다면 물꼬가 트일 수 있다는 뜻이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오월동주(吳越同舟)의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