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루도 쉬어가는 ‘전설의 바위’ 아래… ‘노란색 봄’이 반짝인다[박경일기자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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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입력 2023-03-16 09:12
업데이트 2023-03-16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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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바위로 지은 거대한 테이블처럼 생긴 가산바위. 능선에 우뚝 솟아 산성 성벽의 일부가 된 가산바위는 대구 시내와 낙동강, 그리고 금오산과 유학산의 거대한 산줄기를 조망하는 훌륭한 전망대다.



■ 박경일기자의 여행 - 호젓한 매력 경북 칠곡

활짝 피어나는 봄

가산산성 성벽따라 복수초 군락
세계 최대규모로 주말이면 만개

정상부 자리 잡은 가산바위에선
낙동강·금오산 줄기가 ‘한눈에’

보물 품은 봄

시로 전국민 울렸던 칠곡할매들
벽화속 주인공돼 나들이객 반겨

불국사 버금가는 송림사 마당엔
오층전탑이 ‘보물’의 품격 뽐내


칠곡=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6·25전쟁 당시 치열했던 낙동강 전선의 전투부터 떠올리실지도 모르겠지만, 경북 칠곡에는 봄날의 나른한 정취를 고즈넉하게 즐기기 좋은 숨은 명소가 곳곳에 있습니다. 봄을 알리는 노란 꽃 복수초가 무더기로 피어나는 군락이 있고, ‘칠곡할매’의 소박한 시(詩)를 적어둔 골목이 있으며, 고요한 절집 송림사와 근사한 원림을 거느린 정자 심원정과 별서정원이 있습니다. 다음은 경북 칠곡에서 화창한 봄날에 만난 것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칠곡에는 복수초가 있다.

경북 칠곡에는 ‘복수초(福壽草)’가 있다. 원한을 갚는다는 ‘복수(復讐)’가 아니라, ‘복 복(福)’에 ‘목숨 수(壽)’ 자를 쓴다. 복수초는 이른 봄에 언 땅을 뚫고 나와 노랗게 핀다. 이른 봄에 피는 야생화는 손톱보다 작은 게 보통인데 복수초는 꽃이 크다. 작은 술잔만 하다. 광택이 나는 선명한 노란색의 색감도 인상적이다. 군락을 이뤄 꽃을 피우면 일부러 가꾼 꽃밭을 방불케 할 정도로 볼만 하다는 얘기다.

팔공산의 서북쪽 자락 칠곡 땅에 가산(架山)이 있다. 가산에는 산성이 있어 산 이름 대신 ‘가산산성’이라 불린다. 가산산성 깊은 안쪽에는 2009년에 발견된 세계 최대 규모라는 복수초 대군락이 있다. 지난 주말 군락지의 복수초 개화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으니, 지금쯤 모종을 부어놓은 것처럼 온통 꽃밭을 이루고 있을 터다.

복수초에 앞서 가산산성 이야기부터. 가산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두 번의 전란을 겪고 난 뒤에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 쌓기 시작한 성이다. 인조 때 시작해 영조까지 근 100년의 공사를 거쳐 완공한 성은 여느 성과는 좀 다르다. 보통 산성은 전쟁을 대비해 운용한다. 성안에 식량과 물자를 보관해놓고 있다가 전쟁이 나면 주민들을 성안으로 불러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가산산성은 다르다. 성을 쌓고 아예 산 아랫마을 전체를 통째로 성안으로 옮겨버렸다. 성을 상시거주 방어체계로 재편한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산성 안에 마을을 옮긴 건 전국에서 여기 가산산성과 남한산성, 두 곳뿐이었다. 순조 때 이르러 비로소 마을을 산 아래로 옮겼으니, 자그마치 180년 동안 지금의 도청쯤 되는 도호부를 가산산성 안에 두었던 것이다.

외침을 방비하는 데 효율적이었을지는 몰라도, 좀 무책임한 건 아니었을까. 근본적인 전쟁 대비 대신 백성들이 제가 살던 마을을 버리고 산속으로 숨어들게 한 셈이었으니…. 부역과 세금을 면제해줬다지만 논은커녕 밭조차 제대로 없는 깊은 산 속에서의 백성들의 삶은 얼마나 고단했을까.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경북 칠곡의 가산산성 중문 인근에 피어난 복수초. 주변이 온통 고개를 내민 복수초로 꽃밭을 이루고 있다. 복수초 개화는 이번 주가 절정이다. 팔공산의 북서쪽 자락인 칠곡의 가산 일대는 세계 최대 규모의 복수초 군락지다.



# 칠곡에는 가산바위가 있다

복수초를 보러 가산에 간다면 길은 간명하다. 가산산성의 들머리는 하나다. 가산산성 진남문 위쪽의 공원주차장이다. 여기서 첫 번째 복수초 군락이 있는 동문까지는 1시간 40분 정도를 걸어야 한다. 동문에서 옛 마을 터와 관아 터를 지나 중성문까지는 30분 정도 소요되는데, 이쪽에도 복수초가 무더기로 피어있다. 중성문에서 성벽을 따라가면 닿는 북문 일대도 온통 복수초 꽃밭이다.

사실 별다른 근거도 없이 ‘세계 최대 규모 복수초 군락지’라고 주장하는 게 좀 의심스러웠는데, 하나둘씩 나타나던 복수초가 무더기로 피어난 모습을 보곤 그런 의심이 싹 사라졌다. 군락지에서는 봄볕 아래 여기저기서 광택 나는 노란 꽃잎을 활짝 연 복수초가 탐스럽게 피어나고 있었다. 놀랐던 건 복수초가 이렇게 꽃밭을 이뤘는데도 ‘아직 다 핀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가산 복수초의 만개는 이번 주말부터라고 했다.

가산에서 운이 좋다면 노루를 볼 수도 있다. 이른 아침 가산산성 길에서 노루와 마주쳤다. 그것도 여러 번. 처음에는 고라니라 생각했는데 뿔이 제법 당당하고 엉덩이 털이 하얗다. 노루는 인기척을 느끼고서도 그다지 경계하는 기색 없이 한참을 숲 속에 멈춰 서서 이쪽을 빤히 바라봤다. 노루가 출몰한다는 건 그만큼 사람들의 발길이 덜 닿아 자연이 살아있다는 뜻.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가산산성을 오르다가 딱 마주친 노루. 이쪽을 한참 바라보다 생고무처럼 튀어 숲 속으로 달아났다.



가산 산행의 종점은 정상보다는 ‘가산바위’로 삼는 것이 낫겠다. 관아 터 갈림길에서 올라가는 가산 정상은 풍경이 좀 밋밋한 편이다. 중성문을 지나 서문을 가기 전에 나타나는 가산바위는 사방이 10m 높이의 절벽이고 정상부가 평평해 마치 테이블처럼 생긴 거대한 바위다. 먼발치에서 볼 때부터 범상찮은 위엄이 느껴지는데, 바위에서는 어떤 에너지가 뿜어나오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신라의 고승 도선이 땅의 기운을 잡기 위해 가산바위 아래 큰 구멍에다 쇠로 만든 소와 말을 넣고 묻었다는 전설도 그래서 만들어진 듯하다.

기이한 생김새와 바위 위에서의 빼어난 조망 등으로 가산산성은 2년 전에 명승으로 지정됐다. 가산바위에 오르면 대구 시내의 전경은 물론이고 낙동강과 구미 금오산, 유학산, 황학산의 산줄기가 펼쳐진다. 가파른 구간이 거의 없지만 거리가 멀어 가산바위까지는 왕복 4시간이 족히 걸리지만, 가산바위가 보여주는 경관은 이런 노고에 충분한 보답이 된다.

# 칠곡에는 ‘할매’가 있다

경북 칠곡에는 ‘칠곡할매’가 있다. 이렇다 할 대표 이미지가 없는 칠곡이지만, 언제부터인가 ‘칠곡’이란 지명 뒤에 ‘할매’가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칠곡할매가 누구냐고? 그 얘길 하자면 1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칠곡에서는 2006년부터 ‘성인문해교육’이 시작됐다. 이런저런 이유로 글을 배우지 못한 노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수업이었다. 수강생은 대부분 ‘할매’였다. 남녀차별 탓에 학교 문턱도 못 밟아본 할매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탓이다. 마을회관 2개에서 시작한 한글 교실은, 2021년에는 22개 마을회관으로 확대됐다.

칠곡할매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건 2015년 칠곡에서 시작된 인문학 사업의 일환으로 시집을 출간하면서부터다. 한글을 배운 칠곡의 88명 할매가 글을 깨치는 도중 연필에 침을 묻혀가며 눌러 쓴 시가 ‘시가 뭐고’란 시집으로 발표됐다. 이 시집의 부제가 ‘칠곡할매, 시를 쓰다’인데, ‘칠곡할매’라는 이름의 기원이 여기다.

틀린 맞춤법과 사투리를 그대로 둔 칠곡할매의 시는, 읽다 보면 마치 ‘음성지원’이 되는 듯하다. 할매의 육성을 듣는 듯하다는 얘기다. 첫 시집 ‘시가 뭐고’의 표제작을 읽어보자. “논에 들에/할 일도 많은데/공부시간이라고/일도 놓고/헛둥지둥 왔는데/시를 쓰라 하네/시가 뭐고/나는 시금치씨/배추씨만 아는데.”<소화자 ‘시가 뭐고’ 전문> 칠곡할매의 시 속에는 기막히게 살아온 젊은 날과 평화롭게 늙어가는 노년의 시간이, 남들만큼 못 해줘 미안한 자식과 고생만 하다 먼저 간 남편이 있다. 고되지만 보람있는 농사일도, 글을 배우는 즐거움도 있다.

시집은 소위 ‘대박’이 났다. 정가 9000원짜리 시집 초판 2000부가 한 달 반 만에 완판돼 2쇄를 찍었고, 그것도 다 팔려서 3쇄를 찍었다. 두 번째 시집 ‘콩이나 쪼매 심고 놀지 머’와 세 번째 시집 ‘내 친구 이름은 배말남, 얼구리 애뻐요’가 잇따라 나왔다. 2019년에는 다큐멘터리 영화 ‘칠곡 가시나들’이 만들어져 극장에서 개봉했다.

2020년에는 다섯 명 칠곡할매의 손글씨를 바탕으로 개발한 다섯 개 디지털 서체가 한글과 컴퓨터에 이어 마이크로소프트사의 글꼴로 탑재됐다. 글꼴 주인인 다섯 명 할머니가 각각의 서체로 감회를 적어놓은 병풍이 칠곡군청에 있다. 그중에서 ‘이원순체’의 주인공 이원순 할매가 쓴 글이 가슴 뭉클하다. “…궁금하다면서 아들이 집에 왔어. 내가 글 쓴 걸 보고 우리 아들이 울었어. 우리 아들이 참 착해….”

칠곡할매 글꼴은 지난 신년 초 윤석열 대통령이 각계 원로와 주요인사, 국가유공자에게 발송한 신년 연하장에 사용되면서 다시 화제가 됐다. 대통령 연하장의 글씨는 칠곡할매 중 한 명인 권안자(79) 할매의 손글씨로 만든 서체인 ‘권안자체’다. 권 할매는 76세의 늦은 나이에 한글 교실에서 한글을 배웠다.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칠곡 약목면 두만천 변 벽화거리에 그려진 칠곡할매. 벽화거리에는 칠곡할매의 시도 적어놓았다.



# 칠곡에는 약목시장이 있다

경북 칠곡에는 ‘시와 그림이 있는 칠곡 가시나들 벽화거리’가 있다. 벽화거리는 2019년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칠곡 가시나들’의 실제 주인공인 칠곡할매의 시와 그림을 모티브로 칠곡 약목면 약목시장 부근의 두만천 변에 조성했다. 낮고 긴 담에는 읽고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따뜻해지는 시와 그림이 그려져 있다. 여러 편의 시 중에서 노란색으로 칠해진 긴 블록담에 적어놓은 시 한 편 앞에서 발길이 멈춰졌다.

“야야 와 그래 차를 세우노/엄마요, 앞에 더디 걷는 할매 보이/엄마 생각이 나네/우리 엄마도 조래 걸어가겠지 싶어서/빵빵거리도 못하고/딸이 그 말을 하니 내 눈에 눈물이 난다.” <강금연 ‘우리 엄마’ 전문>

두만천 변의 벽화 골목은 200m 남짓에 불과하다. 주변에 볼 게 많은 것도 아니고 그림이 화려하다거나, 근사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마음이 가는 건 누추한 시골 담벼락의 그림과 시에서 칠곡할매들의 소박한 마음이 느껴져서다. 벽화나 시 옆에는 QR코드가 있는데 스마트폰 카메라를 가져다 대면 유튜브 영상으로 연결된다. 영상 속에서 시를 쓴 할매가 등장하는가 하면, 영화 속의 한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영화 주제가 녹음 장면도 있고, 소설가 이문열의 칠곡할매 문학강연이 재생되기도 한다.

벽화거리를 보는 재미의 팔 할쯤은, 벽화가 아니라 ‘약목시장’에 있다. 벽화거리 뒷골목과 약목시장 일대는 마치 시간이 박제된 듯하다. 골목의 낡고 오래된 집 시멘트 벽에는 ‘1973년 7월 27일’이란 날짜가 적힌 50년 전 낙서가 선명하다. 약목면의 유일한 책방 ‘광학당서점’은 가게 밖 거리에 신문가판대를 놓고 신문을 팔고 있다. 고즈넉한 시골마을에서 외지인은 금방 눈에 띄었다. 문 닫은 ‘백만불 노래방’을 지나서 약목시장으로 들어서려는데 마을 주민들이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동네구경을 하러 온 여행자’라고 했더니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 안달이 났다. 자전거수리점 주인이 나오고, 시장 식품 사장님이 나오고, 지나가던 할매 두엇까지 끼어들어 삽시간에 토론회가 열렸다.

여행자를 앞에 놓고 주민들의 청하지 않은 이야기보따리가 풀렸다. ‘이제 여기에 자전거를 탈 만큼 젊은 사람이 없다’는 자전거수리점 할배의 한탄부터, 다섯 딸을 낳은 뒤에 보게 된 아들에게 가게를 물려준 시장 식품 할매의 얘기까지 사연은 끝이 없다. 더 이상 자랑할 게 없었는지 화분에다 심은 작약의 막 돋은 여린 싹까지 꺼내 보여주고서야 이야기가 끝났다. 시장이나 골목 사진을 찍는 건 조심스러운 일인데, 여기서는 주민들이 ‘사진을 찍어달라’며 웃으며 포즈를 취해줬다. 약목시장을 둘러보고 나오면서 칠곡할매가 써낸 시가 어디서 왔는지 어렴풋이 느껴졌다. 칠곡할매의 시적 상상력이나 리듬은 문화적 소양이 아니라 ‘생활’에서 나오는 것이었구나….

# 칠곡에는 송림사가 있다

칠곡을 대표하는 사찰은 송림사다. 대구 동화사의 말사인 송림사는 산속이 아니라, 편안한 평지에 자리 잡고 있다. 절집의 내력은 통일신라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대각국사 의천이 중수했고, 보감국사 혼구가 주지로 머물렀던 고려 때 사세가 가장 번창했다. 그때 송림사는 불국사나 법주사에 버금갔다는 주장도 있다.

송림사가 자랑하는 건 대웅전 앞마당의 오층전탑이다. 전탑이란 흙을 구워 만든 벽돌로 쌓은 탑을 말하는데, 벽돌을 만드는 일이 쉽지 않은 기술이었던데다가 어찌어찌 탑을 세웠다 해도 벽돌로 쌓은 탑은 작은 충격에도 뒤틀리거나 무너지는 일이 잦았다. 지금껏 남아있는 전탑이 전국에 6개에 불과한 이유다.

남아있는 전탑 중에서 원형을 잃고 완전히 허물어졌다가 1968년에 마구잡이로 쌓아놓은 경북 청도의 불령사 전탑을 빼고, 나머지 5개는 모두 국보이거나 보물이다. 송림사 오층전탑도 보물이다. 해체보수 당시 기단 등 원형이 훼손됐다는 사실이 확인돼 국보승격이 무산되긴 했지만, 탑의 당당한 위용과 자태에서 국보에 버금가는 품격이 느껴진다.

송림사에서 또 눈에 띄는 건 큼지막한 대웅전의 편액이다. 대웅전의 건물 규모가 작은 건 아닌데도 4개의 나무판자를 붙여서 만든 가로 366㎝, 세로 160㎝의 초대형 편액을 걸어놓으니 왜소해 보일 정도다. 부드러운 느낌의 편액 글씨는 조선 숙종이 하사한 어필이라고 전한다.

송림사 대웅전의 것과 똑같은 필치의 편액이 경주 불국사 대웅전에도 걸려있다. 글씨는 거의 같고 불국사 편액에는 틀 부분의 문양과 구름무늬 조각장식이 있다는 것만 다르다. 절집의 위세를 보면 불국사 것을 송림사가 베껴서 쓴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그 반대다. 여러 정황을 보면 불국사가 송림사의 편액 글씨를 베껴 달았다는 혐의가 짙다. 숙종 때 불국사 대웅전의 기와를 바꾸고 기둥을 교체한 기록이 있으니, 불국사가 당시 따로 숙종의 글씨를 구했을 수도 있겠다.

# 칠곡에는 심원정이 있다

송림사와 좁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숲 속에 근사한 별서정원을 거느린 정자 ‘심원정(心遠亭)’이 숨어있다. 건물과 숲에 가려져 있어 거기 정자가 있는 줄 모르고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자리다. 정자는 그리 오래된 건 아니다. 일제 강점기인 1937년에 한학자였던 기헌 조병선이 정자를 지었고, 주변을 다듬고 나무를 심어 원림을 조성했다.

심원정 원림에 들어서면 한 눈에도 ‘작심하고 만들었다’는 게 느껴진다. 전체 면적이 2378㎡(720여 평)에 불과하지만, 자연경관을 생활공간으로 끌고 들어와 산과 수목을 장식했으며 정자와 누각, 연못과 다리, 폭포와 입석을 세웠다. 말 그대로 ‘별유천지(別有天地)’다.

정자는 물길을 끼고 있는 천변의 반석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T자형으로 지어 얹었다. 이름으로 내건 ‘심원(心遠)’은 도연명의 시 ‘음주(飮酒)’의 한 구절인 ‘심원지자편(心遠地自偏)’에서 가져왔다. “마음이 욕심에서 멀어지면, 사는 곳 또한 저절로 외딴곳이 된다’는 뜻이다. 정자 주인 조병선은 정자 안에 다섯 곳, 정자 밖의 자연지형 아홉 곳과 인공으로 조성한 열한 곳 등 모두 스물다섯 곳에 풍류 넘치는 이름을 붙여주고 ‘심원정 25영’이란 시를 지었다.

별서정원은 영남지역에서 귀하디귀하다. 전남 담양의 소쇄원이나 보길도의 세연정, 강진의 다산초당 같은 이름난 별서정원은 대부분 전라도에 있다. 전라도는 유배지가 많아 세상을 등지고 앉은 이들이 만든 원림이 곳곳에 있었지만, 유배문화가 없다시피 한 영남에는 이만한 규모나 형태를 갖춘 원림을 찾아보기 어렵다. 비록 근대에 조성한 정자와 원림이지만,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해야 하는 이유다.

원형을 잘 보전한다면 기막힌 명소가 될 법한데, 안타깝게도 심원정과 원림은 퇴락해가고 있다. 현판은 빛이 바래고, 담은 허물어졌다. 토지 소유권 분쟁 탓이다. 사연인즉 이렇다. 조병선은 본래 송림사 땅을 자신의 땅과 맞교환해 거기다 정자를 지었는데, 6·25전쟁을 거치면서 문서가 소실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1960년을 전후해 조병선과 그 아들이 한꺼번에 세상을 뜨면서 정자 땅의 소유 사실을 증명할 수 없게 됐다. 토지소유권이 정리되지 않으니 문화재등록이 불가능하게 됐고, 결국 후손들이 제 땅이 아닌 자리의 정자와 관리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관리가 여의치 않자 조병선의 손자인 호현(61) 씨는 기헌선생기념사업회를 세우고, 2015년 심원정을 문화유산보호단체인 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 기증했다. 땅을 되찾겠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두면 허물어져 없어져 버릴 정자와 원림을 어떻게든 지켜야겠다는 생각에서다. 공간을 소유하지 않고 나누겠다는 생각은 조병선의 생전 생각이었다. 그가 지은 ‘심원정 25영’의 한 대목에도 그 얘기가 나온다. “가지고 있는 건 모두 자연인데/다만 자기는 일시적인 관리자일세/남에게 주는 것이 어렵다 하지 마라/찾아오는 사람들과 다 함께하리라.”

그리고 8년이 지났지만 토지소유권 문제는 여전히 진전이 없다. 결국 심원정은 문을 닫아걸었다. 가뜩이나 관리도 어려운데 자칫 무분별한 출입으로 더 크게 훼손될까 우려해서다. ‘찾아오는 사람과 다 함께하리라’던 유지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아쉽고, 또 아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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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체험 해볼까

6·25전쟁 중 낙동강 전투의 격전지였던 칠곡은 ‘호국의 고장’으로 불린다. 전쟁박물관 격인 호국평화기념관과 다부동전적기념관, 왜관철교가 대표적인 호국 유적지다. 호국평화기념관은 ‘따분할 것’이란 선입견을 뒤집기 위해 다양한 전투체험 공간을 마련하는 등 제법 재미있게 꾸몄다. 칠곡에는 종교 명소도 많다. 조선 시대 천주교 박해를 피해 숨어든 신자들의 순교지인 한티순교성지와 신나무골 성지가 있고,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과 소박한 건축미가 돋보이는 가실성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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