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등 15개 분야에 82종 표준계약… 강제성 없어 ‘권리보호 사각’ 여전[Who, What, Why]

  • 문화일보
  • 입력 2023-03-22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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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그래픽=전승훈 기자



■ What - ‘검정고무신’ 사태로 본 창작자 저작권 계약 실태

창작자는 계약서 앞에서 ‘을’

4000억 부가가치 창출 ‘구름빵’
작가 수익, 원고료 1850만원뿐
출판사에 권리양도 매절계약탓
저작권 반환訴냈지만 결국 패소

‘검정고무신’작가도 분쟁시달려
저작권 넘긴 제작사에 소송당해

2013년부터 마련된 표준계약

정부지원 받는 사업에만 의무화
창작자들이 계약때 요구 힘들어
“컨설팅 등 법률지원 강화” 여론

문체부, 만화분야 표준계약서에
2차 저작권 내용 구체화할 계획
공정위는 불공정 약관 점검키로


“기영이, 기철이, 막내 오덕이와 친구들을 유족 품으로 되돌려 드리겠다.” 지난 20일 한국만화가협회 등 10여 개 만화 단체들이 ‘이우영 작가 사건 대책위원회’를 꾸리고 발표한 성명이다. 이들은 수년간 저작권 분쟁 소송에 시달리다 11일 극단적 선택을 한 ‘검정 고무신’의 이우영 작가를 대신해 나섰다. “모든 역량을 동원해 이 작가의 명예를 되찾고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싸우겠다”고. 이 작가 별세 후 문화체육관광부가 관련 대책을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침묵할 수 없었다. 창작자가 약자가 되어 오던 세상을 더는 지켜볼 수 없다는 것이다. 창작자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표준계약서가 도입된 지 10여 년이 지났다. 불공정한 계약을 방지하는 데는 아직 역부족이고 그사이 한 예술가가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구름빵’부터 ‘검정고무신’까지. 창작자는 왜 늘 약자인가 = ‘검정고무신’은 1992년부터 연재되며 인기를 끌었고 TV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됐다. 그러나 원저작자인 이 작가는 이 만화의 캐릭터를 활용한 2차적 저작물을 사용할 수 없었다. 제작사는 “2차적 사업권 권리를 위임받았다”고 주장했고 오히려 캐릭터를 사용한 이 작가가 소송을 당했다. 2007∼2008년 무렵 맺은 계약에서 2차적 사업권을 포괄한 일체의 작품 활동과 사업에 대한 모든 계약권을 양도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작사는 원작자도 모르게 제작한 검정고무신 애니메이션으로 문체부 주최 콘텐츠 대상을 받기도 했으니 아이러니다.

만화와 출판 분야에 표준계약서가 도입된 2014년. 그 이전과 이후에도 상당수의 창작자들은 이러한 ‘불공정 계약’을 맺고 있다. 자신의 창작물을 하루라도 빨리 세상에 내놓길 원하는 데다, 신인 창작자들은 법률적 지식이 부족해 어려운 말들이 가득한 계약서의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쓰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계약서 앞에서 완전한 ‘을’인 셈이다.

2020년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기념상’을 수상한 백희나 작가의 ‘구름빵’은 ‘검정고무신’에 앞서 사각지대에 있던 창작자의 권리에 관심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백 작가는 2004년 ‘구름빵’ 출간 당시 원고료 1850만 원을 받고 저작권 등 모든 권리를 출판사에 양도하는 매절 계약을 했다. 이후 작품은 애니메이션과 뮤지컬, 캐릭터 상품 등 2차 가공돼 4000억 원대의 부가가치를 올렸지만 백 작가에게 돌아간 건 없다. 이후 ‘구름빵 보호법’이 세 차례나 발의됐으나 논의되지 못한 채 폐기됐고, 저작권을 돌려받기 위한 백 작가의 고군분투는 2020년 최종 패소로 끝났다. 그러다 보니 2차적 저작물을 둘러싼 갈등은 여전히 만화·출판계의 고질적인 문제로 남아있다. 최근엔 손원평 작가의 소설 ‘아몬드’의 출판사가 원작자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연극을 상영하려던 사실이 드러나 절판 사태에 이르기도 했다. ‘구름빵 보호법’이 통과됐으면 어땠을까. 만화·출판계의 저작권 인식과 이를 둘러싼 풍경이 사뭇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제2 검정고무신’ 사태 막는다?… 15개 분야 82종의 표준계약서는 = 법적 공방이 이어지자 이 작가는 2020년 창작 활동을 포기했다. 백 작가 역시 6∼7년간 공백기를 보냈다. 두 사례는 저작권을 돌려받고자 하는 원저작권자의 싸움이라는 측면에서는 근본적으로 같다. 또한, 문체부가 표준계약서를 도입하기 이전에 맺은 계약이라는 점도 같다. 문체부는 이 작가가 별세한 후 ‘제2의 검정고무신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창작자들의 저작권 보호 장치를 강화하겠다고 발표했지만 다소 늦은 감이 있다.

만화 분야 표준계약서는 6종이다. 문체부는 이 중 ‘매니지먼트 위임계약서’를 개정하고 ‘2차적 저작물 작성권 이용허락계약서’와 ‘양도 계약서’를 신설한다는 방침이다. 개정된 표준계약서는 6월 고시 예정으로 2차적 저작물 작성권의 내용을 구체화하고, 제3자 계약 시 사전동의 의무 규정을 포함해 창작자의 저작권 보호 장치를 마련한다는 취지다. 이와 함께 문체부 소관 전체 표준계약서의 내용도 전반적으로 재점검하고 창작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내용을 개선해 공정한 계약환경을 만들어 나가겠다고 밝혔다. 현재 영화(8개)·대중문화(6개)·만화(6개)·방송(6개)·출판(10개)·저작권(4개)·공연예술(5개)·게임(5개)·미술(12개)·애니메이션(4개)·e스포츠(3개)·직장운동경기부(2개)·프로스포츠(5개)·공예(5개)·관광(1개) 15개 분야에 총 82종의 표준계약서가 있다.

2013년 공연예술과 대중문화를 중심으로 시작돼 해마다 그 영역을 넓히고 있는 표준계약서는 문체부가 창작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창작자가 불공정 계약을 맺지 않도록 공정한 계약서의 표본·기준으로 제시하는 계약서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사안이 터져야만 기존 계약서를 수정하거나 신설하는 등 뒤늦은 문체부의 대응을 지적한다. 백 작가의 소송은 2015년부터, 이 작가가 제작사와 법적 공방을 벌인 것도 2019년부터의 일이다. 각기 2003년, 2007년 맺은 계약이지만 분쟁 과정에서 적절한 표준계약서가 존재했더라면 어땠을까. 이미 맺은 ‘불공정 계약’이 상식과 한참 거리가 멀다는 걸 보다 명확히 알 수 있었을 테고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표준계약서 강제할 수 없어” = 이우영 작가가 저작권 때문에 분투하다 세상을 떠난 사실이 알려지면서 ‘공정한 보상’의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표준계약서 점검 필요성 등이 제기되지만, 사실 문체부 제시 표준계약서는 강제성이 없다. 엄밀히 출판사와 작가·만화가와 제작사 사이의 계약은 사적인 계약이고 그로 인한 책임도 고스란히 개인에게 돌아간다. 또 일부를 제외하면, 창작자 대부분은 계약 시 표준계약서를 쓰자고 강력하게 주장하기 어렵다.

문체부는 표준계약서 사용 독려를 위해 애써왔으나 부족했음을 인정하고 실효적인 방식을 모색한다는 방침이다. 과거 문체부는 한국콘텐츠진흥원(KOCCA)의 공모 사업 신청 등 정부 지원을 받는 사업에는 반드시 표준계약서 사용을 의무화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는 업계에서 표준계약서 사용을 일부 늘릴지는 몰라도 창작자 주도의 계약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보다는 법률 지원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KOCCA 내 이를 돕는 공정상생센터가 존재하지만 지난해 이곳에서 소송 비용과 컨설팅 등을 지원받은 횟수는 8건에 불과했다.

문체부 관계자는 “창작자가 자신의 권리를 인지하고 공정한 계약을 맺을 수 있도록 교육에도 힘쓰겠다”고 했다. 만화·웹툰 분야 등 창작자를 대상으로 한 맞춤형 저작권 교육을 연 80명에서 올해 500명으로 확대하고 ‘찾아가는 표준계약서 교육’을 실시, ‘알기 쉬운 저작권 계약 사례 핵심 가이드’도 책자로 만들어 배포할 예정이다. 만화 분야 불공정 상담창구로 존재했으나 큰 역할을 못했던 ‘만화인 헬프데스크’도 보다 적극적인 운영을 지원한다고 밝혔다. 유명무실했던 공정상생센터의 협력단체도 13개에서 16개로 늘린다.

◇확장하는 K-콘텐츠… 웹툰·웹소설 분야는 = K-콘텐츠의 확장과 성장으로 문화 영역 표준계약서 분야는 더욱 늘어나고 종류도 보다 세분화될 전망이다. 특히, 관련 업계가 IP 확보와 확장에 승부를 걸면서 그 원천이 되는 웹툰과 웹소설 분야의 계약 문제가 큰 관심사다.

이와 관련해 연간 40% 이상 고성장하며 이미 연매출 1조5000억 원이 넘는 규모의 산업이 된 웹툰이 이제야 만화로 정의됐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는 만화 분야에서 6개의 표준계약서 사용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웹툰 표준계약서에는 휴재 권한 등이 명시될 예정이며 이미 공정 시비나 과도한 업무량에 대한 비판이 높아 문체부의 표준계약서 개정뿐만 아니라 각 플랫폼 사들이 자체적으로 휴재 권한 보장, 무급 휴재 정책 등을 발표하고 있다. 연 2조 원에 가까운 매출 규모의 웹소설도 표준계약서 신설을 확정하고 세부 내용을 검토중에 있다. 웹소설이 웹툰과 유사한 연재형 온라인콘텐츠라는 점을 감안해 만화 분야 표준계약서를 기반으로 할 것으로 보인다.

문체부는 만화 표준계약서에 2차적 저작권 내용을 구체화하고 공정위는 출판사와 콘텐츠 제작사의 불공정 약관 실태를 집중적으로 점검하기로 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저작권 불공정 관행을 근절할 법률 제정이 더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제2의 검정고무신 사태’를 막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제2의 검정고무신’과 같은 뛰어난 작품이 다시 나오게 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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