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경의 시:선(詩:選)]노안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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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입력 2023-03-22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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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초점 렌즈가 펼쳐 보인 시계(視界)/ 미로처럼 꼬인 잔손금을 들여다보다/ 날뛰는 길들을 손바닥 깊숙이 묶고/ 만화경 속에서 나를 건져냈다// 가까운 세계/ 먼 세계// 새 안경은 어떠냐고 묻는 P에게/ 나는 토막 난 길에서 휘청였던 얘기는 잘라먹고 “숏컷 잘 어울리네”라고만 했다’

- 이동우 ‘두 세계’(시집 ‘서로의 우는 소리를 배운 건 우연이었을까’)


오랜만에 만난 선배는 갓 염색을 한 듯했다. “회춘했네?” 웃음기 가득한 내 말에 정색하면서 “하기 싫었는데 자꾸 아내가” 한다. 보기 좋아서 그런 거라고 달래본다.

시시콜콜한 안부를 주고받다가, 나는 펼쳐놓은 내 일의 세계로, 선배는 책장 가득 꽂혀 있는 시집의 세계로 간다. 한참의 고요. 그가 거기 있고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에 묘한 안심 속에서 고개를 들어보았다. 그가 엄지와 검지로 슬쩍 안경을 들어 올리고 시집을 살피고 있다. 노안이 왔구나, 선배. 평소 같으면 깔깔 웃으며 놀려볼 텐데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찌르르 한 감각이 가슴 어디께부터 손끝을 타고 밀려왔다. 초면이었다면 그가 몇 살쯤으로 보였으려나. 그러나 내 눈에 선배는 우리가 처음 만났던 스무 해 전쯤 그대로인 것만 같은데. 나이란 신체적인 시간만을 이르는 것은 아닐 터였다. 원효대사의 해골 물이나, 무학대사의 촌철살인까지는 아니더라도 결국은 마음의 문제, 보기의 문제가 아닐까. 한편 내가 그를 한창때 모습으로 여기는 것이 다른 의미의 노안(老眼)일 수 있으리라.

잠시 뒤 그가 한 권의 시집을 계산하러 왔을 때 나는 그가 무안해하지 않도록, 다초점 안경을 하나 맞추는 것이 어떻겠느냐 물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안경집을 꺼내 보여준다. 그 안에는 이미 그 안경이 들어 있다. 나이 먹는 것보다 더 적응이 안 되더라는 그의 넉살에 다시 한 번 웃었다. 그렇게 나이 들어간다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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