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의 시론]진화하는 간첩, 붕괴하는 방첩

  • 문화일보
  • 입력 2023-05-31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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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 논설위원

최근 적발된 간첩단들 특징은
정치계·교육계 고위직 침투에
최첨단 통신과 수사·재판 방해

기존 역량 총동원해도 역부족
수사권 경찰 이전 안보 무력화
국정원법 재개정 등 대책 시급


최근 적발된 간첩단들의 ‘진화’는 등골을 오싹하게 한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정치계와 교육계 침투다. 386 출신 정치권 인사들이 연루된 일심회 사건(2006년) 등이 있었지만, 양적·질적 차이를 보인다.

창원간첩단 ‘자주통일 민중전위’(자통) 사건과 관련, 방첩 당국은 지난 23일 진보당 전 공동대표 A 씨에 대해 이적 표현물 제작 혐의로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A 씨는 북한이 지난해 6월 진보당 공동대표에 당선시키라는 지령을 내린 인물이었고 실제로 한 달 뒤 당선됐다. 진보당 경남도당 정책위원장은 북한 공작금과 지령을 받아 반정부 투쟁을 한 혐의로, 전 제주도당 위원장은 ‘ㅎ ㄱ ㅎ’을 결성한 혐의로 기소됐다. 2021년 적발된 ‘자주통일충북동지회’의 핵심 관계자 4명은 총선과 지방선거에 출마하거나 문재인 대선 캠프 충북지역 노동 특보를 맡는 등 모두 정치권 진입을 시도했다.

전교조 현직 강원지부장 B 씨는 전교조 내 포섭 대상자 신원을 자통에 전달한 혐의로 압수수색 대상에 올랐다. B 씨 역시 북한이 지난해 11월 자통에 전교조 지도부 진출 지령을 내린 지 한 달 만에 강원지부장에 당선됐다. 또 다른 자통 조직원은 경남도 교육감의 인수위원회에서 활동했다. 자통과 연계된 시민단체들은 경남교육청 등으로부터 수억 원의 보조금을 받아 북한 관련 대중 강연 등의 사업을 진행했는데 자통 조직원들이 강사로 초·중학생들에게 반미·친북 교육을 했다.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북한이 좋은 나라였다’는 취지의 후기를 남겼다.

북한과 간첩단 간의 최첨단 통신 기법도 문제다. 통신은 외국계 보안 메일 등을 활용하고 통신 내용은 그림 파일 등에 숨겨 메시지의 존재 자체를 은닉하는 스테가노그래피 방식으로 암호화한다. 압수수색으로 암호키나 지령문을 확보하지 않으면 해독이 불가능하다. 더구나 최근 간첩단들은 문재인 정부 5년간 느슨해진 대공 관련 형사·사법 체계를 적극 활용한다. 수사 중에는 묵비권을 행사하고 재판에서는 혐의를 부인하면서 제출된 모든 증거에 부동의한다. 이 경우 공개적으로 수집된 자료만이 증거 능력을 갖게 되고 법정 공방으로 유무죄를 다퉈야 해 혐의 입증이 어렵고 재판 기간이 한없이 길어진다. 자통은 일반 국민이 방대한 간첩사건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을 악용해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하기도 한다.

이에 따라 기존 역량을 총동원해도 간첩단 수사는 수시로 한계에 부딪힌다. 그런데 7개월 뒤인 2024년부터 국가정보원의 대공수사권이 경찰로 넘어간다. 경찰로는 불감당이다. 최근 적발된 간첩단은 모두 해외에서 북한에 의해 포섭됐다. 간첩의 90% 이상이 제3국을 우회하거나 탈북자로 위장해 침투한다. 경찰은 해외 대공 수사·정보망이 없고 갖출 수도 없다. 법 집행기관이라 해외에서 수사하면 해당 국가 주권 침해가 된다. 최첨단 비밀통신에 접근할 역량은 물론 없다. 대공 수사는 장기간의 경험과 노하우를 갖춘 전문 인력이 수년간의 집요한 추적을 거쳐야 단서를 잡을 수 있다. 그런데 수시로 인사이동이 이뤄지는 데다 일반 수사 분야도 기피하는 게 경찰의 현주소다.

실제로 전국 안보 경찰의 72%는 행정 지원과 탈북민 신변보호 담당이고 수사 인력은 28%에 그친다. 안보 수사 지휘 간부의 절반은 관련 경력이 없다. 정치권에 쉽게 휘둘리는 경찰이 정치권에 침투한 간첩을 제대로 수사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북한과 연계되지 않는 국내 보안정보’의 수집권 박탈도 치명적이다. 대공 정보 특성상 정보 수집과 수사를 거쳐야 판단이 가능한 ‘북한과의 연계’ 여부가 정보 수집의 요건이 된다는 것은 정보 수집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대공 수사 역량이 무력화되면 진화 중인 간첩단이 전국에 걸쳐 모든 분야로 확산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정부·여당은 당장 국정원법 재개정을 추진해야 한다. 여소야대라고 손 놓고 있어선 안 된다. 당면한 안보 위기를 국민에게 호소해 야당을 압박해야 한다. 이번 국회에서 재개정이 안 되면 차기 국회에서라도 추진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 더불어 내년부터 현실화할 대공 수사 공백을 메울 대안을 현행법과 제도 안에서 촘촘하게 마련해야 한다. 안보는 작은 구멍에도 붕괴하는 댐과 같다. 나태한 대응이나 방임은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과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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