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와 근대 사이 지성史 공백?… ‘아랍의 1000년’ 있었다[북리뷰]

  • 문화일보
  • 입력 2023-06-02 09:00
프린트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속 초록 망토와 터번을 두른 이븐 루시드(왼쪽)는 고대 그리스의 마지막 학자와 라파엘로 사이 1000년의 시간 동안 번성했던 아랍 학계를 나타낸다. 고대 그리스의 학자 유클리드(오른쪽)가 집필한 ‘원론’은 루시드와 같은 아랍 학자들의 손으로 번역되고 연구되면서 지중해 전역으로 확산했다.



■ 지식의 지도
바이얼릿 몰러 지음│김승진 옮김│마농지

500년경 로마 제국의 몰락 이후
학문의 중심 바그다드로 넘어와

유클리드·갈레노스가 남긴 저술
칼리파들이 보존·번역하며 발전
15세기 베네치아까지 명맥 이어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서
무슬림 학자 루시드 그려내기도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라파엘로의 명화 ‘아테네 학당’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유클리드 등 그리스를 대표하는 학자들이 그려져 있다. 고대 열풍이 불었던 16세기 초 르네상스 시대의 지적 풍경을 반영한 결과다. 유일한 예외는 터번을 쓴 인물인 무슬림 학자 이븐 루시드다. 루시드는 5세기 중엽부터 약 1000년 동안 번성한 이슬람 문명의 지성을 상징한다. 아랍 학자들은 그리스 문명의 성취를 이어받고, 이를 발전시켜 인류사에 빛나는 업적을 이룩했다.

‘지식의 지도’에서 영국 역사학자 바이얼릿 몰러는 지리와 역사를 결합한 독특한 형식을 빌려 인류 지성사에 남긴 이슬람 문명의 굵직한 흔적을 추적한다. 풍부한 지식, 생동감 넘치는 문장으로 저자는 알렉산드리아, 바그다드, 코르도바, 톨레도, 살레르노, 팔레르모, 베네치아 등을 여행하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 유클리드, 갈레노스, 프톨레마이오스 등 고대 과학의 정수가 어떻게 현재까지 이어졌는지를 보여준다. 500년경 로마 제국이 몰락한 이후부터 1500년까지 1000년 동안 유클리드의 ‘원론’,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 갈레노스의 해부학과 약리학 저술은 아랍 학자들 손으로 번역되어 보존되고 각색되고 연구되면서 지중해 전역으로 퍼져 근대의 수학, 천문학, 의학으로 발전하는 토대를 구축한다.

저자의 여정은 고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작된다. 기원전 300년경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건설한 이 도시는 ‘도서관 도시’였다. 왕은 도서관 삼각 지붕 아래에 책을 수십만 권 모았고, 이를 연구하고 토론하는 학자들을 지원했다. 생계 걱정 없는 활발한 지적 교류는 뛰어난 성과로 이어지는 법이다. 국가가 학문을 장려한 이 도시에서 도서관 건립 직후엔 유클리드가, 서기 2세기엔 프톨레마이오스가 활동하며 각각 고대 수학과 천문학을 집약한 저술을 남겼다. 의술의 도시 페르가몬 출신의 갈레노스도 프톨레마이오스와 같은 시기에 이곳에 유학해 의학 관련 지식을 쌓고, 로마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저술을 남겼다. 세 학자의 책은 529년 아테네의 플라톤 아카데메이아가 폐쇄되고, 학자들이 책을 들고 페르시아로 도망칠 때까지 수백 년 동안 로마 제국의 지적 중심에 놓였다. 유럽 문화가 기독교로 전환하면서 알렉산드리아는 파괴되고, 이들의 위업은 사실상 잊혔다. 알렉산드리아를 이어 학문의 도시가 된 곳은 바그다드였다.

이슬람은 과학에 호의적이었다. 예언자 무함마드는 “과학을 배우고 가르치는 자를 보는 일보다 좋은 일은 없다”고 가르쳤다. 이를 받들어 칼리파들은 ‘지혜의 집’에 온 세상 서적 100만 권을 수집한 후 아랍어로 번역하고, 때마침 들여온 제지술과 인쇄술을 활용해 퍼뜨렸다. 아랍은 수학, 천문학, 의학 등 고대 그리스 과학을 보존하고, 인도와 중국의 과학 지식과 결합해 이를 크게 발전시켰다.

몽골 군대가 바그다드를 짓밟은 후엔 이베리아반도 이슬람 왕조의 코르도바가 지식의 수도가 되었다. 알람브라궁전으로 유명한 이 도시엔 우마이야 칼리파 후원 아래 학자들이 구름처럼 몰려 유클리드, 프톨레마이오스, 갈레노스의 책을 주해하고 비판하면서 발전시켰다. 마이모니데스와 이븐 루시드는 이 시기를 대표하는 학자다.

1236년 기독교가 코르도바를 정복한 후 그 지적 성과를 이어받은 도시가 톨레도다. 크레모나의 제라르도 이래, 톨레도 학자들은 아랍 학문과 과학의 성취를 라틴어로 옮기는 데 열중했다. 비슷한 시기에 이탈리아 남부의 살레르노에선 북아프리카의 아랍어 의학 문헌을, 시칠리아 팔레르모에선 유클리드와 프톨레마이오스의 그리스어 저술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이들은 그리스-아랍 문화와 라틴 유럽 문화를 잇는 다리가 되었다. 저자의 여정은 15세기 베네치아에서 끝난다. 지중해 무역을 지배하던 이 해상 왕국은 세계의 시장이었다. 위대한 편집자 알두스 마누티우스 등은 유럽 전역에서 수집한 필사본, 위의 세 도시에서 번역한 라틴어 문헌을 모아 엄밀히 교감한 후 최첨단 기술인 인쇄를 이용해 대량으로 생산했다. 이는 지식의 광범위한 보급으로 이어져 16세기 과학 혁명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암흑시대는 없다. 고대 그리스 과학은 아랍 문명을 거쳐 보존되고 변형되고 발전되면서 근대로 이어졌다. 르네상스는 그리스, 로마의 부활이면서 아랍 문명의 위대함에 대한 발견이다.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이를 모른 체했던 것은 아마도 오리엔탈리즘 탓일 터이다. 428쪽, 2만5000원.

장은수 출판평론가
주요뉴스
기사댓글
AD
count
AD
AD
AD
AD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