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비우지 못하는 것[유희경의 시:선(詩:選)]

  • 문화일보
  • 입력 2023-08-30 11:33
프린트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비운다는 것은/ 철없던 슬하를 떠나보내고/ 그리움도 습관도 내려놓는 것,/ 젊은 날엔 한 해가 멀다 하고 옮겨 사느라/ 짐꾼처럼 이력이 붙었는데/ 지금은 갈 곳 있어도 허둥대니/ 쌓아온 적폐 내다 버릴 일이 걱정인가’

- 김명인 ‘비운다는 것’(시집 ‘오늘은 진행이 빠르다’)


무사히 이사를 마쳤다는 친구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한가득 책 짐을 찍어놓은 사진이 덧붙어 있다. 절로 한숨을 짓게 된다. 읽고 쓰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책이란 숙명이지만 ‘이사’ 앞에서는 골칫거리이기도 한 것이다. 한낱 종이로 만든 것이 어쩜 그리 무거운지, 견적을 내러 온 사람의 한숨과 함께 ‘따블’이 되는 이사 비용은 책과 사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일이다.

집에 놀러 온 조카가 천진하게 물은 적이 있다. “삼촌은 저 책을 다 읽은 거예요?” 그럴 리가. 나는 “책장에 꽂힌 책은 다 읽은 책이 아니라 앞으로 읽을 책이란다” 하고 대답해주었다. 그러자 조카는 “삼촌은 오래오래 살아야겠네요” 하고 대꾸했다. 사실 다 욕심이다. 활자로 가득한 사물에 담긴 이해와 지혜가 내 것이라 여기는 착각이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 붙들고 사는 까닭은 언젠가 내게 그럴 만한 시간과 여유가 찾아올 거라는 믿음 때문이 아닌가. 그러니 온갖 고생에도 이고 지고 다니며 산다.

그러고 보면 책장 한가득한 저 책들은 기대와 바람이다. 미니멀라이프. 덜어내고 비워내고 사는 삶이 더 좋은 줄 알겠다. 실천해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책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버리려 내다 놓은 책을 도로 들고 온 적이 한두 번인가. ‘내가 책 말고 더 바라는 욕심이 무어야.’ ‘살면서 누구나 사치 하나쯤 부리는 거 아닌가.’ 그런 주제에 친구에게는 “책 좀 버리자. 간편하게 살자 우리” 하고 답장을 보냈다. 나도 그도 실천할 리 없는 말이다.

시인·서점지기
주요뉴스
기사댓글
AD
count
AD
AD
AD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