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을 생각[유희경의 시:선(詩:選)]

  • 문화일보
  • 입력 2023-09-06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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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나무 한 그루가 헐렁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흔드는 것 없이 휘청거려서, 쓰러질 듯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유일해서, 나보다 나무를 앞에 두고 걸었다// 생각하기. 아무 생각하기./ 발미를 감추고 생각하기/ 비할 짝이 없는 생각’

- 이서하 ‘가장 위험한 스티로폼을 훔치고’(시집 ‘조금 진전 있음’)


현관문을 나서면 느닷없이 시원해진 날씨. 계절 사이에도 문이 있는 모양이다. 안과 밖이 문짝 하나 차이이듯 여름과 가을도 하루 차이이지 않을까. 여전히 볕은 뜨겁고 멀리 매미 울음 들리는 것 같고 잎들은 무성하고 푸릇하지만, 구월이 되면 가을.

출근길 버스 안 승객들을 둘러보다가 어제 아침과 다른 점을 발견한다. 그 누구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지 않는 것이다. 대신 멀거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그들의 뒷모습에서 애틋함을 느낀다. 각자 생각이나 마음은 다르겠지만 하여간 걷잡을 수 없는 세월의 무상함을 어느 한편 느끼고 있지 않겠는가. 물론 나도 그들 중 한 명이다. 창밖엔 진한 햇빛과 그만큼 진한 그늘이 있고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자연이 있고 어제와 다를 바 없는 거리 위에는 걷거나 머물러 있는 보통의 사람들. 그럼에도 나의 눈은 자꾸 달라 보이는 것들을 뒤적이고 있다. 그러니까 가을을 만들어가는 것은 나 자신이다. 마음에 단풍이 물들려 한다. 낙엽이 떨어지려 한다. 그러나 아직은 이르다. 이것이 초가을 감각. 초가을 생각. 아직은 쓸쓸해지기 전. 잠깐 동안 상념에 빠져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덧 내려야 하는 정류장.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드는 것은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이 재미난 일이다. 가을은 또 그런 일들로 가득한 계절이고, 그러니 책 읽기에도 좋은 계절. 읽기란 생각의 다른 이름이니까. 좋은 날씨에 책 읽기라니 어불성설이네. 피식 웃는다. 독자로 가득할 오늘의 서점을 은근히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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