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의 촉진할 ‘탈정치 심판’ 필요하다[시평]

  • 문화일보
  • 입력 2023-09-21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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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사회적 합의 대부분 쉽지 않아
첫 단계는 사실에 대한 공감대
전망과 목표 합의는 더 어려워

중립적 전문가 집단 역할 중요
국회 사실확인特委 설치하고
여론은 합리적 합의 추동해야


무릇 사회적 합의는 쉽지가 않다. 왜 그럴까? 합의가 안 되는 이유 탐구는 미래의 합의를 위해 꼭 필요하다. 예컨대, 아내와 내일 저녁에 갈 식당에 합의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인식의 차이다. 식당 선택의 기준은 대체로 맛·가격·소요시간 정도인데, 두 사람이 이에 대한 식당 정보를 다르게 알고 있으면 합의할 수 없다. 식당 정보야 휴대전화 검색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정책 이슈는 그렇지 않다. 예컨대, 일본의 오염처리수 방류에 대한 입장이 갈리는 것은 오염수의 위험성에 대한 인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합의의 첫 단계는 사실(팩트)에 대한 것이다.

사실에 대한 합의보다 더 어려운 건 전망에 대한 합의다. 맛과 가격은 평점을 보면 되지만, 내일 저녁 식당까지의 소요시간 전망은 시위 등 돌발 상황도 있어 더 어렵다. 정책 이슈에선 말할 것도 없다. 탈(脫)원전 논란 때 원전의 안전성과 전기료 인상 폭에 대한 전망 차이는 합의를 막는 핵심 이유였다. KTX와 SRT를 분리·경쟁시키는 것과 통합·운영하는 게 열차의 요금과 서비스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여기에 해당한다.

사실과 전망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좁히는 것은 전문가의 영역이다. 그러나 과학은 만능이 아니다. 더구나 전문가들이 이념이나 이해관계의 포로가 되면 과학은 쓸모가 없어진다. 많은 국책 연구기관과 데이터베이스(DB)를 가진 행정부가 그 역할을 해줘야 하지만, 야당은 그 중립성을 의심한다. 그래서 오염처리수가 위험하지 않다는 국무총리의 담화문도 수용하지 않는다. 지난 정부의 통계 조작 논란은 행정부에 대한 신뢰를 더욱 실추시킨다.

반면 대학은 중립성은 있으나, 여야가 관여하지 않아 합의에 활용되지 못한다. 결국, 국회가 중심이 돼야 한다. 국회 안에 여야 공동으로 사실확인특별위원회를 둘 것을 제안한다. 사안별 분과위를 구성해 의원과 전문가들이 투명하게 논의하다 보면 누가 이념과 이해관계의 포로가 돼 사실을 외면하는지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를 판별할 중립적 전문가가 필요하다.

둘째, 합의를 통해 얻으려는 목표나 가치관의 차이다. A 식당은 값이 싸고 B 식당은 이동 거리가 가깝다는 사실 인식은 두 사람이 공유했다 하더라도 한 사람은 가격을 중시하고, 다른 사람은 소요시간을 중시하면 합의가 어려워진다. 예컨대, 노란봉투법은 노사 중 누구의 교섭력 강화를 목표로 하는지에 따라 찬반이 나뉜다. 선거구 관련 합의가 어려운 것도 의석수 극대화라는 목표가 여야 간에 충돌하기 때문이다.

정책 목표가 달라도 이해관계 조정을 통해 합의가 가능하다. 그러나 이를 가로막는 두 가지 행태가 있다. 목표 수준에 미달하는 합의는 무조건 배격하는 행태, 합의 없이 목표 수준을 100% 달성할 수 있다는 확증편향이 그것이다.(문화일보 7월 25일자 ‘시평-정치 양극화, 유권자가 바뀌어야 한다’ 참조) 하지만 협상에 임하는 목적이 합의가 아니라 다른 것이라면 합의가 불가능하다. 다른 목적의 예는 결렬 명분 축적, 시간 벌기, 협상자의 충성심 과시, 상대 흠집 내기 등이다. 북한이 2003∼2007년 북핵 6자회담에 임할 때의 주목적은 시간 벌기였다. 최저임금위원회가 합의하지 못하는 것은, 일부 위원이 자신이 속한 진영에 충성심을 보이려 하기 때문이다. 장관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가 파행되는 경우는, 문제 후보를 무조건 지키면서 대통령에게 충성을 보여 주려 하거나(여당), 큰 문제 없는 후보임에도 대통령에 대한 흠집 내기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야당).

합의 외 다른 목적을 가진 사람이나 정파를 합의로 이끄는 유일한 방법은, 합의 결렬 때 그들이 매우 불리해지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여론의 역할이다. 합리적 합의가 가능한데도 다른 목적을 가지고 합의를 무조건 거부하는 정파는 비난을 받아야 한다. 그러자면 합의안을 제시하고 비난 대상 정파를 가려내는 심판이 있어야 한다.

합의를 하려면 공동의 인식을 바탕으로 서로의 정책 목표를 조율하되, 합의 외 다른 목적이 없어야 한다. 그러자면 국민에게 신뢰받는 중립적 전문가와 언론이 많아져야 한다. 그래야 합의를 통한 대한민국의 발전적 변화가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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