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에도 없고 쓰지도 않는 말… ‘나만의 단어장’을 만들자[정신과 의사의 서재]

  • 문화일보
  • 입력 2024-06-07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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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과 의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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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날씨가 참 좋다. 해가 길어지고 노을이 지는 저녁나절에 시원한 바람이 불고, 한껏 푸르른 나무 이파리가 흔들린다. 여느 해보다 파랗게 보이는 청명함에 자꾸 눈이 하늘로 가고 사진을 찍어 이 순간을 남기고 싶다. “아, 좋다”는 말이 무조건 반사로 나온다. 그런데 좋다는 감탄은 지금을 설명하기에는 평범하고 뻔하다. 딱 떨어지는 단어가 없을까 아쉬움이 든다. 우리말로 떠오르지 않자 외국어를 찾아봤다. 발길 닿는 대로 걸으며 들리는 소리와 풍경을 즐기는 건 그리스어로 ‘볼타’,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은 일본어로 ‘고모레비’다. 지금 나는 볼타하면서 고모레비를 느끼는 중이다. 이제 친구들과 호프집 야외 테이블에서 맥주 한 잔을 놓고 떠들 텐데 스페인어로 ‘소브레메사’다. 단어로 정의하니 답답한 가슴이 뚫리고 마음이 정리된 느낌이다.

여기에 더 나아가서 나만의 언어 사전을 만들면 된다는 사람이 있다. 존 케닉은 2009년부터 ‘슬픔에 이름 붙이기’ 프로젝트를 시작해서 언어학적 지식과 유려한 필체로 블로그와 유튜브에 콘텐츠를 올리기 시작해 공감을 얻었고, 이번에 동명의 책을 출간했다.

비트겐슈타인은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상의 한계다’라고 했다. 우리는 한계를 확장하기 위해 책을 읽고, 외국어를 공부하고, 글을 쓰다 막히면 사전을 뒤적인다. 겨우 발견한 단어가 지금 내 마음을 아주 정확하게 묘사하고 설명해 주지 못할 수 있다. 그 아쉬움을 새 단어를 만드는 것으로 풀어본 것이다. 여러 나라의 언어, 라틴어 단어들의 파편을 조합해 만든 단어로 머릿속의 황야에 외견상의 질서가 만들어지기를 바랐다고 저자는 기대했다.

비행기를 타고 창문을 통해서 본 세상은 일상에서 보기 힘든 시야각이고, 내가 날고 있다는 멋진 착각이 일어난다. 이 경험을 라틴어 날다(volare)와 지도를 보관하는 상자(solander)를 합쳐서 보란더(volander)로 명명한다. 새로운 곳에 가서 처음 보는 놀라운 풍경을 보면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자신하던 세상이 얼마나 좁았고 지식이 얄팍했나 싶어서 놀란다. 내가 경험할 수 있는 세상이 실은 꽤나 작다는 걸 실감하는 것은 ‘오니즘’이다. “저는 평범해요”, 겸손을 담아 말하지만 누가 내게 ‘넌 평범해’라고 말하면 기분이 나빠진다. 평범과 비범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기를 원하지만 평범한 삶을 살고 말았다며 자조할까 봐 안간힘을 쓰며 산다. 그 감정을 고대 그리스어의 평범함 케이노스에 포비아를 더해 케이노포비아라는 단어로 정리한다. 모두 사전에 없고 어디서도 쓰이지 않는 것들이다.

저자는 이런 작업을 하며 이제 우리 머리가 사전이 규정한 단어에 정의당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라는 경고를 하는 수준까지 나아간다. 사전이 부여한 의미에 갇혀서는 안 되고, 스스로 세상에 나만의 의미를 부여하는 정도로 가보면 좋겠다는 것이다. 세상이 부과한 모델에 사로잡히지 않고, 나만의 단어를 만들어 스스로 정의할 용기를 갖는다면, 있는 줄도 몰랐던 내 앞의 벽이 사라지고 세상이 열릴 것이라 말한다.

하지현 건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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