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수건[유희경의 시:선(詩:選)]

  • 문화일보
  • 입력 2024-06-12 11:36
프린트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수건은 시간을 옮긴다 냄새를 옮긴다/ 수건이 수건에서 빠져나온다/ 내가 발을 닦은 수건으로/ 남편이 얼굴을 닦는다/ 발을 닦은 수건이 얼굴을 닦은 수건보다 더러울 것 같진 않은데/ 발이 알면 억울할 일/ 말하지 않기로 한다’

- 이소연 ‘우리 집 수건’ (시집 ‘콜리플라워’)


유월 달력을 일별한다. 때를 놓쳐 곤혹스러웠던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지만, 달력 살피기는 좀처럼 습관이 되질 않는다. 이달에는 별일 없구나. 그렇다고 안심하지는 못한다. 달력을 한 장 더 넘겨본다. 칠월 첫날에 커다란 동그라미가 쳐 있다.

그날이 무슨 날인지는 적혀 있지 않다. 당황했다가 피식 웃었다. 내가 운영하는 서점의 생일, ‘창립기념일’이다. 벌써 팔 년이 되었다니. 감탄은 이내 고민으로 돌변한다. 작은 기념품이라도 만들어야 할 텐데 막막하다.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이어올 수 없었을 터다. 이런 때라도 선물을 건네며 감사를 전해야 할 일이다. 자금도 넉넉지 않고 아이디어도 없다. 비싸지 않으면서 자주 쓰는 사물. 쓸 때마다 서점이 생각날 만한 무언가. 문득, 수건이다 싶었다. 수건, 언제나 부족한 물품. 우리 집 욕실에는 각종 기념일 수건이 가득 차 있다. 세수를 하고 잘 마른 수건을 펴면서, 나는 조카의 나이를 확인하고, 친구 어머니의 안부를 궁금해하고, 지인 회사의 번영을 기원한다. 어떤 수건을 쓸 때는 발 닦기가 영 겸연쩍고, 어떤 수건은 낡아가는 모양에 애틋해지기도 한다. 내 삶의 한 면모가 욕실 안에 차곡차곡 포개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실은 오 주년 때쯤 수건을 선물한 적이 있다. 이번에는 주방용 핸드타월을 해보면 어떨까. 욕실에서도 한 번 생각해주고, 주방에서도 한 번 생각해주면 기쁠 것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팔 년도 후딱인데, 한 달은 눈 깜짝할 새이다.

시인·서점지기
주요뉴스
기사댓글
AD
count
AD
AD
AD
AD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