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웹 | 지면보기 PDF | 기사 상세 찾기 | 2016.12.28 수요일
올 한 해에도 ‘LIFE & Style’은 여러 곳을 다녀왔습니다.
빼어난 풍경은 대부분 ‘일상의 반대’ 쪽에 있었습니다.
화려한 색감으로 출렁이는 곳, 차가운 비장미로 빛나는 풍경은
대개 인적이 없거나 닫히고 끊긴 길 뒤에 있습니다.
손쉽게 닿는 익숙한 곳보다
어렵게 찾아가야 하는 낯선 곳이 더 빼어난 경우가 많았습니다.
공간도 그렇지만 시간도 그랬습니다.
‘낯선 공간’처럼 ‘낯선 시간’에도 아름다움이 숨어 있다는 것이지요.
돌이켜보면 지난 1년 동안 찾아다닌 건 ‘공간’과 ‘시간’이었습니다.
46년 만에 빗장을 연 가을 설악산의 만경대와
곡성의 대황강의 초록 습지가 낯선 공간이었다면
한여름 밤에 산 정상에서 마주한 거제의 황홀한 밤바다와
봄이 당도하기 전의 제주의 경관은 낯선 시간이 만들어낸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한 해 동안 만난 곳 중에서 다섯 곳의 풍경을 추려봤습니다.

지난가을 46년 만에 개방된 설악산 만경대. 내년 봄부터는 좀 더 빼어난 탐방로가 만들어진다. 탐방로의 혼잡을 덜기 위해 탐방예약제도 시행도 검토되고 있다.

내년 봄 다시 개방… 더 절경이 된다 - 설악산 만경대

한 해 가장 뜨거웠던 여행지가 설악산국립공원 오색지구의 만경대였다. 지난 10월 1일부터 11월 15일까지 단풍시즌 동안 만경대 임시 탐방코스가 열렸다. 설악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1970년 이래 46년 동안 닫혀 있었던 만경대가 개방된 것이었다. LIFE & Style은 개방 열흘을 앞두고 만경대를 다녀왔다.

만경대는 낙석 사망사고로 오색지구의 흘림골 탐방로가 통제되면서 대체 탐방구간으로 개방됐다. 통제된 흘림골 탐방로 안전성 조사가 이뤄지는 기간에만 한시적으로 이뤄진 임시개방이었다. 조사 결과 흘림골 탐방로의 안전이 확보돼 닫아두었던 탐방로가 열리면 만경대는 다시 닫기로 했고, 안전 문제로 흘림골을 닫게 되면 대신 만경대를 열어두기로 했던 것이었다.

만경대는 흘림골의 비경에는 못 미치는 ‘대체재’였던 셈이었고, 경관도 전체 탐방코스 중에서 볼 만한 곳은 사실상 만경대 딱 한 곳뿐이었다. 기사로 이런 사실을 알렸지만 개방 기간 단풍 관광객들이 한꺼번에 몰려들면서 만경대 탐방로는 북새통을 이뤘다. 단풍 절정기에는 아예 등산로를 따라 줄지어 선 채 이동해야 했을 정도였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만경대를 찾은 관광객들의 반응은 대체로 ‘실망했다’는 것이었다.

▲ 전남 진도의 작은 섬 관매도에서는 너른 들과 계단식 밭에 온통 흐드러진 메밀꽃을 만났다. 섬 전체가 꽃밭이나 다름없었다. 내년 봄이면 메밀이 거둬진 자리에 노란 유채꽃이 피어난다.
만경대 탐방코스는 내년 봄 다시 열린다. 최근 흘림골 탐방로 안전성 조사 최종결과가 ‘탐방로 재개통 불가’로 나왔기 때문이다. 설악산국립공원사무소는 일단 향후 5년 동안 흘림골 탐방로를 닫아두는 대신 지난가을 한시 개방했던 만경대 탐방코스를 상설 유지하기로 잠정결정했다. 대신 ‘경관이 없다’는 관광객들의 불만을 감안해 주전골에서 용소폭포 오른쪽의 조망 좋은 능선을 따라 만경대로 향하는 탐방코스를 새로 내기로 했다. 이와 함께 인파가 한꺼번에 몰리면서 빚어졌던 탐방로 혼잡을 막기 위해 ‘탐방 예약제’ 도입도 검토하고 있다. 과연 내년에는 좀 더 경관이 나은 코스를 따라 쾌적하게 만경대를 둘러볼 수 있을까.


다랑밭에 핀 가을 메밀꽃, 봄 유채꽃 - 진도 관매도

전남 진도의 작은 섬, 관매도. 그 섬에서 아쉬웠던 건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섬에 머무는 내내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눈으로 보는 아름다움을 사진에 담지 못했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관매도가 이렇게 매혹적인 풍경을 품고 있음에도 그 아름다움을 누리는 사람들이 ‘너무 적다’는 것이었다. 섬을 다녀온 뒤에도 한동안 아쉬운 마음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가을의 초입에 관매도를 찾아갔던 건 메밀꽃 때문이었다. 부드러운 파도가 연신 밀려드는 고운 백사장의 관매 해수욕장도, 해변 모래톱 뒤편의 초지를 가득 채운 곰솔 숲도 나무랄 데 없었지만 관매 마을의 너른 들과 다랑밭에 온통 피어난 순백의 메밀꽃 물결 앞에 서자 숨이 다 멎을 지경이었다. ‘장관’이란 수식어는 바로 이런 곳에다 붙이는 것이겠다.

관매도의 메밀은 소출을 얻기 위한 게 아니라 꽃의 경관을 위해 심어진 것이다. 이른바 ‘경관 농업’이다. 가을에 흐드러졌던 메밀밭은 봄이 되면 멀미가 날 만큼 샛노란 유채꽃밭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유채꽃 만발한 봄의 경관과 메밀밭 출렁이는 가을의 경관. 둘 중의 하나만 고르라고 한다면 난감할 수밖에 없겠다.

작은 섬 관매도를 다 보려면 섬 한복판에 솟은 돈대산(215m)을 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돈대산의 물고기 지느러미 같은 능선에서 펼쳐지는 바다와 섬의 풍광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관매산 동쪽 관매 마을에는 꽃밭이 있고, 서쪽 관호 마을에는 단정한 돌담을 둘러친 평화로 출렁이는 섬 풍경이 있다. 타박타박 섬을 걷는 내내 펼쳐지는 경관에 반해서 누구든 손목을 붙잡고 끌어 데려오고 싶을 정도였다.

관매도로 향하는 발길이 내내 가볍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돈대산 정상에서는 세월호를 삼켜버린 비극의 동거차도 앞바다, 그러니까 세월호를 삼켜버린 비극의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노랑나비들이 날아다니는 관호 마을 숲길에서 순한 것들의 환생을 떠올렸던 것도, 순백의 메밀꽃 앞에서 마른 눈물을 넉가래로 다듬어 모아둔 소금 결정을 생각했다.


겨울 끝의 잦은 한파와 폭설로 늦어지는 봄을 찾아 나섰던 제주. 봄이 더뎌도 비바람이 거세도 제주에서는 날이 궂어야 비로소 보이는 경관을 찾았다. 파도 거친 날에 서귀포의 법환포구에서 만난 밤바다.

우리 땅에서 가장 먼저 봄 맞이하는 곳 - 제주

올해 봄은 더뎠다. 우리 땅에서 봄이 가장 먼저 당도하는 제주도 마찬가지였다. 겨울 끝에 때늦은 폭설이 쏟아지면서 수선화의 꽃대가 다 부러졌고, 복수초도, 성급했던 매화도 꽃눈을 닫았다. 그리고 겨울비가 내렸다. 게다가 마침 제주에 간 날은 비바람으로 제주공항에 무더기 결항사태가 빚어진 날이었다. 겨울은 아직 제주에 머물고 있었으나, 봄 또한 그곳에 있었다.

제주의 아름다움은 맑은 날의 푸른 바다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날이 궂고 바람이 거칠어진 뒤에야 보이는 것들도 있다. 이를테면 저문 뒤의 밤바다나 중산간의 바람 소리, 촉촉하게 젖은 난대림의 숲, 비 오는 밤바다의 정취, 오름을 휘감은 안개…. 이런 것들이었다. 제주가 갖고 있는 풍경들이 이토록 다양하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겨울의 잔설이 남아 있는 중산간 오름에는 야생화들이 그제야 하나둘 피어나고 있었고, 대정읍의 들판에는 눈밭 위로 수선화가 다시 힘겹게 꽃대를 일으키고 있었다. 복수초부터 변산바람꽃, 노루귀, 산자고까지 봄 야생화들로 꽃밭을 이루고 이루는 절물자연휴양림 건너편 민오름의 야생화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제주 일대를 샅샅이 뒤져 봄꽃이 이르게 피는 곳을 찾아낼 수 있었던 건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천지연 폭포 바로 위쪽의 물길 솜반천을 끼고 있는 걸매생태공원과 대정읍 구억리의 노리매공원은 그렇게 찾아낸 곳이었다. 한림공원의 홍매화 ‘설중매’가 가장 먼저 꽃을 피운다는 것도 그때 알게 됐다.

법환포구에서 매월 둘째·넷째주 금요일에 열리는 작은 시장인 ‘소랑장’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세화 해변의 ‘벨롱장’이나 대평리의 ‘소소장’, 신흥리의 ‘신흥마켓’을 둘러보는 소소한 즐거움도 비가 내리지 않았더라면 알지 못했을 것이었다. 화려한 곳은 화려한 대로, 소박한 곳은 소박한 대로 제주는 이렇게 여러 겹의 아름다움을 두르고 있다.


한여름 경남 거제 최남단 여차∼홍포 해안도로에서 본 밤바다의 경관. 대병대도와 소병대도가 그림처럼 떠 있는 바다의 수평선에 오징어잡이 배가 환하게 불을 밝혔다.

여름 산에 올라 푸른 밤바다를 굽어보다 - 경남 거제

익숙한 여행지도 다른 계절과 다른 시간대에 가보면 미처 짐작하지 못했던 의외의 낯선 경관과 마주할 때가 있다. 수없이 가보았던 여행지라도 ‘다 봤다’고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경남 거제야 해금강으로, 외도로, 여차∼홍포 해안도로로 익히 알려진 명소. 피서객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휴가철의 거제는 더 익숙하다.

거제가 품은 낯선 풍경은 밤바다였다. 거제의 바다를 내려다보는 노자산에서 가라산으로, 거기서 다시 망산으로 건너가는 산길을 다 걷고서야 알 수 있었다. 한여름 거제의 밤바다 풍경이 얼마나 매혹적인지…. 노자산을 낮과 밤, 두 번 올랐다. 낮에는 노자산에서 가라산으로 넘었고, 밤에는 노자산 전망대까지만 다녀왔다. 가라산으로 넘어가는 능선을 따라 양옆으로 펼쳐지는 바다 풍경에 찬탄을 금치 못했지만, 그건 거제의 매혹적인 밤바다를 보기 전이었다.

노자산 정상에 오르면 거제 동남쪽의 학동 해변 앞바다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능선 아래로 밀려들어온 바다와 학동 해변, 바람의 언덕과 거제 해금강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푸른 어둠 속에서 학동 해변의 불야성이 발밑 아래서 비현실적으로 반짝이고, 수평선에는 그보다 더 밝은 집어등의 불빛이 휘황했다.

거제의 비경 중의 비경으로 꼽히는 최남단의 여차∼홍포 해안도로. 3.5㎞의 해안도로에서 마주하는 밤바다도 매혹적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여차에서 홍포 방면으로 이어지는 길의 세 번째 전망대에서 보는 밤바다 풍경이 가장 아름다웠다. 대병대도, 소병대도, 매물도….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민 달이 수면에 은빛 물살로 반짝거리면서 어둠 속에서 섬들의 윤곽이 드러났다. 바다는 오징어잡이 배가 켠 집어등 불빛으로 온통 환했다. 어둠이 내린 거친 바다 위에서의 고단한 어획의 노동은 어쩌자고 이리도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일까. 가슴속에 진하게 인화된 사진은 여름밤 거제의 바다 위로 별이 뜨는 광경이었다. 그 바다에서 별은 마치 아이맥스 영화 스크린처럼 시선의 정면으로 떴다.


5월 전남 곡성의 반구정 습지에서 만난 이른 아침 풍경. 아침 볕으로 붉게 물든 안개가 습지를 떠다니면서 황홀한 아름다움을 빚어냈다. 곡성의 대황강은 오래전에 잊은 우리 강의 원형을 보여준다.

순정한 강의 원형과 빛으로 단청한 누각 - 전남 곡성

가장 아름다운 계절 5월, 흥행기록을 세운 범죄 스릴러 영화 ‘곡성(哭聲)’의 개봉에 맞춰 전남 곡성(谷城)을 찾았던 건 곡성군수가 지역 신문에 쓴 기고문 때문이었다. 지역주민들이 지역명과 똑같은 제목을 쓰는 음산한 내용의 영화 개봉을 우려하는 가운데 군수는 “우려를 뒤집어 생각하면 기회의 순간이 온다”며 “영화 개봉으로 지역 인지도를 높여 ‘남는 장사’를 하자”고 팔을 걷어붙였다.

군청에서 만난 군수는 곡성의 매력 8할이 섬진강과 대황강에 있다며 강이 녹음이 짙어지기 시작하는 무렵인 5월이 가장 아름답다고 했다. 초록의 습지가 펼쳐진 곡성의 대황강에서 마주하게 되는 건 손대지 않은 우리 옛 강의 감격적인 원형이었다. 버드나무들이 밀생한 촉촉한 습지와 온통 초록으로 우거진 강변, 느리게 흘러가는 강물, 그리고 그 강을 끼고 이어지는 낡은 시골 마을 ….

곡성에서 가장 빼어난 경관은 순천과 경계를 이루는 목사동면 대황강 상류의 ‘반구정 습지’에 있었다. 푸른 강물과 초록빛으로 빛나는 물 위의 숲이 어우러진 반구정 습지의 풍경은 무딘 붓끝으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이다. 이른 아침 아미산(587m) 정상 턱밑의 암자 천태암 능선에 오르면 습지를 뒤덮은 안개 바다를 만날 수 있다.

곡성에는 화엄사와 송광사를 말사로 거느렸다던 태안사도 있고, 옥과미술관 옆에 들어서 미술관을 닮아가는 사찰 성륜사도 있다. 그런데 꼭 가보라고 권하고 싶었던 곳은 숨어 있는 절집 관음사였다. 관음사에는 작은 개울을 건너 절집으로 들어가는 다리이자 누각인 ‘금랑각’이 있다. 금랑각 단청 위로 개울의 수면이 반사돼 일렁이는 아지랑이 같은 빛이 누각의 단청을 마치 조명처럼 비췄다. 과연 지은 이의 의도였을까. ‘비단 금(錦)’에 ‘물결 랑(浪)’이란 이름은 그래서 붙여진 것일까. 금랑각 누각 단청이 수면에 반사된 빛으로 일렁이는 광경 앞에 서면 누구든 한동안 넋을 잃고 서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글·사진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
게재 일자 : 2016년 12월 28일 수요일
페이스북트위터밴드구글  인쇄
회사소개 | 광고안내 | 사업안내 | 이용안내 | 구독안내 | 독자참여 | 회원서비스 | 고충처리 | 개인정보취급방침 | 청소년보호정책(책임자:최중홍) | Site Map
주소 : 서울시 중구 새문안로 22 | 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아01697 | 등록일자 : 2011년 7월 15일 | 제호 : 문화일보 | 발행·편집인 : 이병규 | 발행연월일 : 1997년 1월 1일
Copyright ⓒ 문화일보.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