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웹 | 지면보기 PDF | 기사 상세 찾기 | 2017.12.27 수요일
이제 또 한 해를 보냅니다.
올해 ‘LIFE & STYLE’은 묵직한 감동 혹은 눈물로 지어진 공간을 자주 찾았습니다.
감동과 눈물의 근원은 사람이었습니다.
전남 고흥의 소록도에서는 기억을 잡아먹는 시간에 맞서 안간힘을 쓰면서
한센인들의 기억을 붙들고 있는 이들을 보았고,
무주에서는 마음이 따뜻했던 한 건축가가 남기고 간 배려와 공감의 건축을 보았습니다.
강원 고성의 하늬라벤더팜에서는 아름다운 꽃밭이 뜨거운 눈물로 가꿔졌다는 것과
여름의 꽃이 겨울의 눈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여기다가 눈 내리는 날 경북 영양의 반변천 변에 완벽한 아름다움으로 서 있던 모전석탑과
전남 완도수목원의 거대한 동백숲이 보여줬던 감동의 풍경을 끼워 넣습니다.
텅 빈 겨울의 공간에 홀로 서서 눈을 맞고 있는 탑 하나가 빚어내는 공간감은 어찌나 매혹적이던지요.
이렇게 LIFE & STYLE이 다녀온 곳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올해의 여행지 5곳을 뽑아봤습니다.
한 해의 끝에 이렇게 지나온 길을 다시 되돌아보는 건, 이런 장소에 밑줄을 그어놓고
다시 찾아가도 그곳에서 감동과 눈물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여기 소개하는 5곳은 오늘의, 또는 내일의 훌륭한 여행지이기도 합니다.


전남 고흥 소록도의 서생리 마을 폐가. 소록도에서 한센병 환자마을이 최초로 들어섰던 곳이 서생리였다. 섬의 중심이 옮겨가고 주민들이 떠나면서 마을은 빠르게 사라져가고 있다.




#.소멸하는 것에 대해

전남 고흥 소록도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서생리였다. 소록도에 세운 최초의 병원 자혜의원이 있던 마을. 서생리는 새로운 병원이 세워지고 그 병원 주변으로 섬의 중심이 옮아간 뒤에 주민들이 모두 떠나서 비워진 마을이다. 빈 마을의 폐허가 된 건물의 지붕은 무너지고 벽은 쓰러졌다. 거대한 나무뿌리가 건물을 헤집고 담장을 휘감았다.

서생리는 공공건축의 대가로 꼽히는 노 건축가의 마지막 건축작업의 현장이었다. 건축가는 사람이 다 떠난 서생리 마을의 허물어져 사라지기 직전의 건물 외벽에다 강관과 비계를 달았다. 무너져가는 소록도의 건물을, 그리고 마을을 사라지지 않게 하는 것. 그게 소록도 보존작업에 팔 걷고 나선 조성룡 성균건축도시설계원 교수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노 건축가의 이런 작업은 여행자들을 각성시킨다. 소록도에 가면 여행자들은 과연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껴야 하는 것인지를 알려준다는 얘기다.

서생리의 다 쓰러져 가는 교회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의 기도와 소망이 지나갔던 것일까. 소록도에서는 부끄러운 역사도, 사라지고 있는 마을도, 섬 안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 늙은 한센병 환자도, 무너지는 것들을 안간힘을 써서 부축하고 있는 노 건축가의 소망도 다 눈물겨웠다.

기사가 나간 뒤에도 성균건축도시설계원은 소록도의 보존과 관련해 그동안 세미나와 심포지엄을 잇따라 열고 소록도의 진정한 보존과 복원의 정의, 사람과 장소의 기억을 다루는 방법, 공간과 기억이 만나는 방식, 소록도의 유산적 가치 등을 모색했다. 무엇을 어떻게 남겨야 할 것인지, 기억을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들의 이야기는 과연 어떻게 결론이 내려지게 될까. 낡은 건물과 오래된 기억을 싹 다 밀어버리고 소록도를 욕망의 관광지로 만들고자 하는 시도를 막아낼 수 있을 것인가.


아득하게 흩날리는 눈발 속의 경북 영양 산해리오층모전석탑. 내리는 눈이 마치 은하수의 별들처럼 느껴진다.




#. 탑이 빚은 완벽한 아름다움

경북 내륙을 단숨에 가로지르는 상주~영덕 간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신년 벽두에 가까워진 겨울 여행지를 찾아 나선 길이었다. 새 고속도로가 지나는 경북 의성과 안동, 청송, 영양을 부지런히 드나들다가 눈발 속에서 그 탑과 마주쳤다. 낙동강 상류 반변천의 물길 옆 텅 빈 공간에서 쓸쓸한 겨울의 적막을 기단 삼아 딛고 서 있던 경북 영양의 ‘산해리오층모전석탑’ 말이다. 모전탑이란 돌을 벽돌 모양으로 잘라서 소박하게 쌓아 만든 탑을 말한다.

산해리오층모전석탑은 무심하고 쓸쓸했으며 귀족적인 세련미도, 섬세한 아름다움도 없었다. 하지만 넓게 비워진 빈터와 늙은 느티나무, 반변천 맞은편의 갈모산 석벽이 흑회색의 탑과 어우러져 깊은 공간감을 만들어냈다. 탑만 보아서는 탑이 보이지 않았고, 마침 석탑 주위로 눈발이 흩날렸는데, 점점 더 굵어지는 눈송이들이 마치 아득한 시간의 저편에서 온 은하수 별들처럼 느껴졌다.

모든 치장을 다 벗어버린 가장 황량한 계절. 소박하면서도 단아한 모전석탑의 균형미에는 늙고 누추한 것의 ‘아득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었다. 영양의 모전 석탑은 다른 계절에도 아름답지만, 모든 것들의 뼈대만 남아있는 겨울에 더 아름다웠다.

1500년의 시간을 건너온 탑은 지금도 노루울음 소리 들리는 반변천 변의 빈터를 지키고 있으니 언제 찾아가도 그 아름다움과 마주할 수 있다.

눈발 흩날리는 날, 모전석탑을 보고 온다면 그 광경이 한동안 마음에 인화돼 지워지지 않을 게 틀림없다. 마음 안에 이런 풍경 하나 담아두고 때때로 꺼내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안이 될까.

상주~영덕 간 고속도로 인근의 안동 땅에 있는 동화작가 고 권정생 생가에서의 감동도 잔상이 오래 남았다. 평생을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으며 글을 썼던 그는, 생전에 교회 종지기로 낮은 삶을 살며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을 따스하게 보듬었다. 10여 년 전 집 주인은 세상을 떠났지만 작고 누추한 오두막집에는 지금까지도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 건축에 담긴 따뜻한 마음

▲ 건축가 정기용이 설계한 무주반디랜드의 곤충박물관. 박물관 지붕에서 야외공간으로 외부경사로를 따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동선이 특징적인 건축물이다.
전북 무주에서 주목했던 것도 건축이었다. 소록도에서 건축은 ‘무너지는 시간과 기억을 지탱하는 일’을 했지만, 여기 무주에서 건축은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렸다.

건축의 주재료는 시멘트와 철근이지만, ‘공간의 시인’이라고 불렸던 건축가 고 정기용이 무주에 남긴 건축물의 진짜 질료는 ‘따뜻한 마음’이었다. 생전에 10여 년 동안 전북 무주의 공공건축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무주에 지은 건축물만 31개. 그는 면사무소, 박물관은 물론이고 납골당과 버스정류소까지 설계했다.

건축물이 무슨 여행목적지가 될까 의문을 갖는다면 유럽여행을 생각해보자. 유럽여행에서 대부분의 일정을 할애하는 성당과 광장이 곧 건축이다. 건축과 그 건축 위로 지나간 시간이야말로 여행의 가장 풍성한 주제라는 얘기다. 무주 땅을 돌며 하나하나 건축물을 찾아가는 기행은 충분히 흥미로웠다.

정기용의 건축은 단순히 형태와 미감만으로 읽어낼 수 없다. 그의 건축에는 교감과 이해가 있다. 행사 때마다 뙤약볕에 앉는 주민을 배려해 운동장 관중석에 등나무를 심어 그늘을 드리우도록 한 ‘등나무 운동장’에서도, 목욕탕이 멀어 불편했던 주민들을 위해 목욕탕을 들여놓은 ‘목욕탕 면사무소’에서도, 유순한 시골 마을의 경관을 마술처럼 건축의 액자 안에 들여놓은 작은 버스정류장에서도 작고한 건축가가 지켜왔던 건축에 대한 신념과 정신이 느껴진다.

그의 건축은 미학적인 선이 아니라 사람들을 향한 마음과 도리로 빛난다. 무주를 목적지 삼아 정기용의 건축을 보러 가는 여정이 건축학도의 것이 아닌 이유는, 그것이 한 건축가의 따뜻한 마음을 보러 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여행도 있음을, 여행이 때로는 지리(地理)가 아니라 인문(人文)의 영역에 관계한다는 사실을 그곳에서 새삼 깨달을 수도 있겠다.




#. 눈물로 키운 꽃밭

▲ 강원 고성의 하늬라벤더팜. 해마다 초여름이면 라벤더꽃과 꽃양귀비 등이 활짝 피어나서 이국적인 꽃밭을 이룬다.
꽃만 봐서는 알 수 없다. 눈부신 꽃들이 무엇으로 가꿔졌는지를….

강원 고성의 진부령 아래 동화 속 풍경 같은 꽃밭이 숨어있었다. 초여름 딱 보름 동안 만개해 비현실적인 색감의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보라색 라벤더 꽃밭이다. 이 꽃밭은 한 사내가 뿌린 13년의 땀과 눈물로 만들어졌다. 찾아온 이들에게는 그저 낭만적인 꽃밭일 뿐이지만, 가꿔낸 이에게 꽃밭은 고된 노동과 거듭되는 실패, 포기에 대한 망설임의 긴 행로를 거쳐 비로소 이룬 성취다.

자동차 부품회사의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하덕호(56)는 회사를 퇴직하고 2005년 고성으로 내려와 지금의 꽃밭을 일구기까지 그가 바친 노고는 가슴이 다 뭉클해질 정도였다. 만개한 꽃밭 앞에서 지나온 시간을 얘기하며 그는 수시로 눈시울을 붉혔다.

그가 하필 강원 북단의 고성 땅을 택한 건 구릉의 경관이 빼어나다는 이유도 있지만,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린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싹이 트는 이른 봄에 충분한 수분이 필요한 라벤더는 겨우내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에서 잘 자란다. 꽃을 보러온 사람들은 꽃 좋은 여름에 만개한 꽃밭의 아름다움만 보지만, 그걸 정성껏 키우는 사람들은 꽃이 다 지고 난 뒤의 황량한 들판에서 겨울에 눈을 기다린다. 지금 라벤더 밭은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다. 몇 번의 폭설이 더 지나간 뒤에 봄이 오면 라벤더는 싹을 틔우고 여름의 초입에 다시 환한 꽃을 피우리라.

라벤더 농원의 꽃밭을 가꾸는 일은 그림을 그리는 일과 매한가지다. 붓으로 물감을 찍어 그리듯 색색의 꽃을 심어 꽃밭을 가꾼다. 솜씨는 갈수록 좋아지니 대개 내년의 꽃밭은 올해의 꽃밭보다 좋다. 보라색 라벤더와 붉은 꽃양귀비, 흰 메밀꽃, 갈색 호밀로 내년 여름에는 또 어떤 그림을 그려낼까. 라벤더 꽃이 지고 난 뒤 일본 홋카이도의 라벤더 꽃밭을 드나들었던 농원주인은 폭설 속에서 칩거하며 내년에 꽃으로 그려낼 낭만적인 그림을 구상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 상록림의 압도적 풍경

▲ 전남 완도의 완도수목원 동백나무 숲. 상왕봉 아래 우거진 천연림에서 활엽수와 키큰 나무를 간벌해서 다듬어낸 매혹적인 숲이다.
올해 전남 완도를 두 번이나 찾아갔다. 이른 봄에 한 번, 초겨울에 또 한 번. 봄에는 본섬을, 그리고 겨울에는 장보고대교 개통으로 길이 열린 부속 섬을 찾았다. 완도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국내 최대규모의 난대림이 펼쳐진 완도수목원이었다. 완도수목원은 특히 늦가을부터 이른 봄까지 매혹적인 풍경을 보여주는 곳이다. 그럼에도 찾는 이들이 많지 않아 ‘숨은 보석’이란 표현이 잘 어울린다.

완도수목원은 난류의 남쪽 바다가 키워낸 거대한 상록활엽수로 그득하다. 겨울에도 초록색을 잃지 않는 난대림의 풍경도 감탄스럽지만, 그보다 놀라운 건 상상을 초월하는 완도수목원의 면적이다. 수목원 전체 면적이 자그마치 2050ha에 달한다. 완도 본섬 면적의 3분의 1 크기다. 섬의 3분의 1이 수목원이라는 얘기다.

완도수목원의 하이라이트는 전남청소년수련관 건너편 능선 일대에 조성해 놓은 거대한 동백숲이다. 새로 나무를 심어 만든 게 아니라, 동백나무가 자연 번식하는 숲에서 낙엽활엽수와 키 큰 나무를 간벌해 동백나무가 드러나도록 가지런히 다듬어 만든 숲이다. 이렇게 만든 동백 숲이 5만㎡(1만5000여 평)에 달한다. 동백숲의 전체 규모는 훨씬 더 크지만 예산 부족으로 일단 이 정도만 다듬었다고 했다. 동글동글한 동백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라는 압도적인 풍경이 뜻밖에도 이국적이다. 이달 초 완도수목원장이 “동백이 하나둘씩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고 알려왔지만, 그래도 만개는 아직 멀었다.

기대되는 건 상왕봉 아래 장도 일대가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짓고 있던 완도수목원 숙소다. 객실 하나가 하나의 세련된 독립 건물로 지어진 숙소는 숲의 한가운데서 청해진 장보고 유적이 있는 완도 동해안 일대가 다 내려다보이는 기가 막힌 자리에 있다. 숙소 공사는 이미 마쳤지만 행정 절차 때문에 내년 늦봄쯤에나 손님을 받을 계획이란다. 이곳에서의 하룻밤은 누구에게나 로망이 되기에 충분하다.


글·사진=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
게재 일자 : 2017년 12월 27일 수요일
페이스북트위터밴드구글  인쇄
회사소개 | 광고안내 | 사업안내 | 이용안내 | 구독안내 | 독자참여 | 회원서비스 | 고충처리 | 개인정보취급방침 | 청소년보호정책(책임자:최중홍) | Site Map
제호 : 문화일보 | 주소 : 서울시 중구 새문안로 22 | 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아01697 | 등록일자 : 2011년 7월 15일 | 발행·편집인 : 이병규 | 발행연월일 : 1997년 1월 1일
Copyright ⓒ 문화일보. All Rights Reserved. ☎ 02) 3701-5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