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웹 | 지면보기 PDF | 기사 상세 찾기 | 2018.5.9 수요일
광주 양림동의 양림쌀롱 여행자 라운지에서 진행하는 ‘광주 1930 양림 달빛 투어’의 모습. 달빛 투어는 1930년대 ‘모던 걸’ 복장을 한 가이드와 함께 등불을 들고 양림동 골목을 둘러보는 여행이다. 투어 코스가 지나는 호랑가시나무 언덕의 팽나무에 매단 등불이 어찌나 몽환적인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준다.


광주에는 양림동이 있습니다. ‘양림(楊林)’. 뜻을 새겨 풀어보면 ‘버드나무 숲’입니다. 지금부터 광주의 변두리였던 양림동 이야기를 들려드리려 합니다. 한때 버드나무 숲이었던, 전염병으로 죽은 아이들을 묻었다던 곳. 그곳에 깃들어 있는 수많은 이야기와 그곳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들의 이야기입니다.

양림동을 특별하게 하는 건 전적으로 ‘유쾌한 근대의 풍경’입니다. 우리의 근대는 일제 식민지의 어두운 그늘 아래 있습니다. 근대를 말하고자 할 때 제국주의의 폭압과 수탈을 이야기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근대를 자산으로 삼고 있는 여행지에서 수시로 마주치는 건 식민지 수탈의 자취입니다. 근대를 가볍게 말하거나 가볍게 즐길 수 없게 된 건 이런 무거운 현실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양림동은 다릅니다. 양림동의 근대는 일찍이 이국 선교사들이 열었고, 이런 연유로 일제도 그 공간을 제 입맛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양림동 거부 집안에서는 적잖은 독립군의 군자금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서양문물의 유입도 식민지에 빚진 바 없고, 압제와 수탈도 피할 수 있었으니 양림동이야말로 식민지 시대에 대한 부채의식 없이 우리의 근대를 되돌아볼 수 있는 곳입니다.

당시 양림동에 정착한 선교사 중 적잖은 이가 우리 땅에 묻혔습니다. 이들은 한국 이름으로 살았습니다. 유진 벨은 ‘배유지’, 윌슨은 ‘우일선’, 쉐핑은 ‘서서평’…. 이들은 우리 땅에서 소외당하고 병든, 낮은 자들을 돌봤습니다. 가족도 버린 한센병 환자의 손을 잡았던 믿기지 않는 헌신의 이야기는 자못 감동적입니다.

이 뒤로 따라오는 건 양림동을 찾아든 문인들의 이야기입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로 시작하는 시, ‘가을의 기도’의 김현승 시인이 이곳에서 나고 자랐고, 시인 서정주도 여기 양림동에 살면서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시 ‘무등을 보며’를 썼습니다. 시인 곽재구도, 소설가 문순태도 자신의 바탕에 여기 양림동이 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새로운 문물이 오가는 곳의 접점에서 이들은 문학을 통해 한 동네, 아니 도시 전체의 정신을 깊고 맑게 만들어낸 것이지요.

이렇듯 수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양림동을 얘기하면서 빠뜨릴 수 없었던 건 ‘그곳을 여행하는 방법’과 ‘그 방법을 배우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양림동이 매력적인 건 그곳이 도시를 어떻게 여행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양림동의 매력을 알아본 문화기획자와 예술가들이 그곳으로 모여들었고, 그들의 자발적인 눈부신 협업을 통해 골목을 걸으며 근대를 떠올릴 수 있는 지금의 양림동이 만들어졌습니다. 문화의 힘을 믿고 여행지로서의 가치를 알아본 정부와 기관의 적잖은 보탬도 있었지요. 고맙게도 말입니다.

도시는 경관만으로 해독되지 않습니다. 자연경관이 특별한 여행지는 ‘여행자를 그 자리에 데려다 놓는 것’만으로 끝납니다만, 도시 여행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도시의 수많은 기호와 형상 중에서 과연 어떤 것을 눈여겨봐야 하는지, 도시의 골목마다 스며 있는 이야기들과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 그곳을 다녀와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양림동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덧붙이자면, 어떻게 해야 관광객들의 소비 공간 차원을 넘어서 도시여행이 지속 가능해지겠는지에 대한 생각도 해봤으면 합니다.


광주 양림동 골목의 한옥을 손봐서 문을 연 ‘양림쌀롱 여행자 라운지’. 하루 이용료 7000원을 내면 카페에서 커피나 차를 마음껏 마시고 여행 책자를 꺼내서 보거나 1930년대 복식을 빌려 입을 수 있다. 여행정보를 제공받거나 코스 등을 안내받고, 짐을 맡겨둘 수도 있다. 양림쌀롱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자연스럽게 여행이 시작된다.




# 양림동에서 여행을 배운다

어떤 도시든 개발의 그늘 아래 소외된 곳은 있게 마련이다. 광주에서는 양림동이 그런 곳이다. 먼저 인근의 충장로가 쇠퇴의 길을 걸었다. 충장로는 한때 광주의 심장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매머드 개발지구로 중심가가 옮아갔고, 급기야 전남도청까지 무안으로 떠났다. 안간힘을 써보지만 별수 없이 충장로는 이미 쇠락한 구도심이다.

충장로에서 불과 몇 발짝. 광주천만 건너면 양림동이다. 과거 양림동은 충장로의 그늘이었다. 전성기에도 충장로와 영광을 나눠 갖지 못했다. 양림동에는 휘황한 충장로 번화가에서, 떠들썩한 남광주시장에서 품을 파는 고단한 인생들이 모여 살았다. 1990년대 초반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이제 기대고 살던 충장로마저 쇠퇴일로를 걷고 있으니, 양림동이라고 무사할 것인가. 그러나 이런 생각은 천만의 말씀. 양림동은 지금 ‘너무도’ 무사하다. 지체됐던 개발로 동네의 매력을 고스란히 남길 수 있었고, 이제 하나둘 그것들이 발견되고 있는 중이다.

누추한 단층 한옥과 복잡한 골목, 세월이 얼룩처럼 남은 시멘트 담벼락과 마당에 내걸린 빨래…. 양림동 일대는 세련된 빌딩과 고층 아파트로 둘러싸인 섬과 같다. 과거 개발의 시대에는 지체된 도시 공간은 가려야 할 치부 혹은 씻을 수 없는 수모에 가까웠지만, 낡고 쇠락한 공간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세상의 속도에 따라붙지 못한 것들이 불러일으키는 건 애잔한 추억이다. 경남 통영의 동피랑 마을도, 동해 묵호항의 논골담길도, 김광석 거리가 들어선 대구의 방천시장도 그런 매력으로 사람을 끌어들였다.

양림동에는 우리가 건너온 근대의 거의 모든 것이 한데 비벼져 있다. 양림동에는 다양한 사람이 살았다. 만석꾼 부자와 이방인 선교사와 날품팔이, 시인, 음악가…. 그들이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양림동의 근대는 수많은 겹을 이룬다. 하나의 겹과 다른 겹 사이에는 이루 다 적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야기가 스며 있다. 양림동을 여행하는 법이, 다른 여행지들과 좀 달라야 하는 이유다.

양림동을 여행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누군가는 ‘뭘 배우면서까지 여행을 해야 하냐’며 손들고 물을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양림동에 한번 가보시라. 가보면 알게 된다. 공부를 해서라도 알고 싶은 것들이 그곳에 얼마나 많은지, 문화와 지역과 사람이 만나서 어떤 것들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또 배워가며 하는 여행이 얼마나 즐거운지 말이다.


# 1930년대로 가는 타임머신…양림쌀롱

▲ 양림동의 박구환 갤러리에서 열린 ‘스타카토 리퍼블릭’이란 예명을 쓰는 기타연주자의 연주회 모습.
양림동 골목에 ‘양림쌀롱 여행자 라운지’가 있다. 골목의 한옥을 세련된 솜씨로 개조해 만든 여행자를 위한 공간이다. 한옥이라지만 대갓집 같은 전통한옥은 아니고 집 장사가 지은, 그래서 더 정이 가는, 손바닥만 한 마당을 가진 근대식 한옥이다. 양림쌀롱은 1930년대의 시공간을 표방한다. 1930년대는 양림동이 가장 빛나는 전성기를 지나던 시간이었다. 선교사들이 근대 건축과 서양 문물을 들여왔고, 일제의 간섭이 덜하다는 이유로 문화와 예술에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만석꾼 부자들이 모여들었다. 그 무렵 양림동은 다양한 문화의 세례를 받으며 개방적인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토대 속에서 근대가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웠던 것이다.

양림쌀롱은 제 맘대로 커피를 내려 마실 수 있는 카페이기도 하고, 여행 책을 골라 펼쳐 들고 읽는 도서관이기도 하고, 개개인의 맞춤형 동선까지 알려주는 여행자 안내소이기도 하며, 짐을 보관해주는 보관소이자 1930년대 복식을 빌려주는 대여소이기도 하다. 간혹 여행 강연도 하고, 광주 밖으로 여행을 계획하기도 한다. 이곳에서는 여행에 푹 빠져 시간을 보내면 된다. 거기서 ‘가야 할 곳’과 ‘거기서 무엇을 봐야 할지’를 듣는 것만으로도 여행은 재미있어진다.

이곳을 운영하는 건 이른바 ‘문화기획자’들이다. 도시 혹은 마을의 바람직한 형태에 대한 기획자들의 고민이, ‘좋은 거주공간 겸 여행지’에 대한 모색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로 만들어진 게 바로 ‘양림쌀롱’이다. 양림쌀롱은 하루 7000원의 이용료를 받는다. 단순히 커피를 내리고, 공간을 내주는 것에 대한 대가가 아니다. 지불하는 비용 안에는 문화 프로그램을 만들고, 여행의 재미를 위한 다양한 요소를 만들어내며, 문화 공간과 음식점, 게스트하우스의 일사불란한 연대까지 만드는 노력의 대가까지 포함돼 있다고 보면 된다. 턱없이 부족하긴 하지만 말이다. 모자라는 돈은 정부가 지원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 사업을 주관하고 있는 한국관광공사가 관광콘텐츠 공모로 선발된 양림쌀롱에 돈을 댔다. 무얼 짓거나 세우지 않고, 보이지 않는 ‘여행의 방식’에다 주머니를 연 셈이다. 양림쌀롱이 성공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지출이 바로 증빙되는 인프라가 아니라, 복합적인 결과물인 콘텐츠를 지원하는 게 결과적으로 옳은 판단이었다는 것을 성공으로 보여줘야 이런 곳들이 다른 지역에 또 생기지 않겠냐는 말이다.


양림동 펭귄 마을의 골목을 장식한 물건들. 남광주시장에서 품을 팔던 이들이 폐품으로 골목을 단장하기 시작한 것이 어느덧 명물이 됐다.


# 식민지의 채무 없이 근대를 추억하다

이제, 양림동을 자세하게 들여다보자. 양림동은 양림산 아래 있다. 양림산은 야트막하지만 제법 숲이 짙다. 양림산은 오래전부터 광주 읍성에 둘 수 없는 혐오스러운 것들을 내다 버리던 장소였다. 읍성 안에서 전염병에 걸려 죽은 아이들의 시신을 양림산에다 버리거나 나무에 묶어두었다. ‘풍장(風葬)’ 그러니까, 바람으로 장사를 지내는 공간이었던 것이었다.

양림동의 근대를 가장 크게 바꿔놓은 건 외국인 선교사들이었다. 일제강점기를 전후해 광주에 들어온 외국인 선교사들이 양림동에 자리를 잡았던 건, 광주천만 건너면 광주의 중심으로 접근할 수 있는 위치 때문이었을 것이다. 외국인 선교사가 들어와 예배당과 병원, 학교를 짓자 지역의 토호와 거부들이 뒤따라 들어왔다. 서양 선교사들 덕에 양림동에서는 일제의 간섭을 피할 수 있었다. 양림동의 거부들이 독립군에게 자금을 지원하고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일제도 양림동만큼은 마음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림동은 식민지 시대에 빚진 바 없다. 식민지의 수탈과 치욕이란 채무 없이 근대를 말할 수 있는 공간이란 것만 해도, 양림동은 충분히 특별하다. 양림산 자락에 남아 있는 이국적인 양식의 다양한 선교사 사택과 선교사들의 묘, 그리고 수피아여고 교정 안의 당시 건물에 얽힌 이야기들은 양림동이 얼마나 특별했는지를 보여준다.

양림동에 거주했던 선교사들은 대부분 미국 남장로교 소속 선교사였다. 이들은 저마다 한국 이름을 갖고 있었다. 한국 이름의 어감만으로 선교사의 본명을 짐작할 수 있다. ‘배유지’는 1895년 한국에 들어와 1925년 광주에서 숨진 목사 유진 벨이고, 서서평은 1912년 입국해 1934년 한국 땅에 뼈를 묻은 선교사 쉐핑이다. 그렇다면 양림동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사택에서 살았던 선교사 ‘우일선’은 누구일까. 정답은 의료 선교에 앞장섰던 로버트 M 윌슨이다.

말이 선교활동이지, 선교사들은 양림동 사람들과 ‘함께’ 살았다. 계단 앞에서 누추한 한복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포대기에 쇠약한 아이를 업은 쉐핑 선교사의 흑백사진 한 장이 그걸 말해준다. 이들 선교사의 일화 중 가장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한센병 환자와 관련된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몇 번을 다시 들어도 그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양림동이 독특한 문화공간과 공연 등으로 인기를 모으면서, 세련된 외양의 다양한 레스토랑이나 휴식공간이 골목에 속속 들어서고 있다.


# 이야기 속, 숨은 그림을 찾아가는 여행

사연인즉 이렇다. 광주의 오웬 선교사가 1909년 4월 급성폐렴에 걸린다. 상태가 위중해지자 목포의 선교사 겸 의사 포사이트가 급하게 광주로 파견된다. 광주로 가는 길에서 포사이트는 손발이 짓무른 채 피고름이 묻은 누더기를 입고 쓰러져 있던 여자 한센병 환자를 보게 된다. 동행한 한국인도 손대기를 주저하는 한센병 환자를, 포사이트는 직접 안아 말에 태우는 대신 자신은 걸어서 광주로 향했다. 광주에 도착했을 때 오웬 선교사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고, 포사이트는 오웬 대신 한센병 환자를 정성껏 돌봤다.

포사이트는 광주에서 활동하던 의료선교사 윌슨을 찾아가 자신이 데려온 한센병 환자의 치료와 거처를 부탁하곤 목포로 돌아갔다. 그리고 예기치 않은 상황. 광주에서 선교사들이 한센병 환자를 극진히 보살펴 줬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지면서, 환자들이 광주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광주에 있던 윌슨 선교사는 한센병 환자에게 스스럼없이 손을 내민 포사이트의 모습에서 말할 수 없는 감명을 받는다. 그러고는 몰려든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1912년 광주 외곽에 병원을 세웠다. 포사이트가 한센병 환자를 보살핀 지 4년 만에 세워진 최초의 한센병원이었다. 가장 낮은 자리에 있던 이들을 돌본 한 이방인 선교사의 사랑이 절망에 빠진 이에게 마지막 희망이 됐던 이야기다.

선교사 얘기 말고도 양림동에는 이야기가 한 보따리다. 양림동에는 시인 김현승이 있고, 서정주가 있다. 시인 문병란도, 소설가 문순태도 여기서 글을 썼다. 중국의 3대 작곡가로 꼽히는 정율성도, 검은 머리의 차이콥스키라고 불리는 정추도 양림동에서 자랐다. 김현승은 골목의 벽화에서 까까머리 중학생으로 등장한다. 교복 이름표에 이름 석 자가 뚜렷하다. 양림동이 숨겨 놓은 그림 찾기 중의 하나다.

양림동에는 수시로 음악회가 열리는 미술관도 있고, 밀랍으로 만든 매화인 윤회매를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며, 조선 시대 아비와 아들 사이를 오가며 우편배달부 역할을 하던 충견을 기리는 충견상도 있다. 남광주시장에서 품을 팔던 이들이 모여 살던 침수 저지대를 마을 주민의 정크아트로 만들어낸 인기 만점의 관광지 ‘펭귄 마을’도 양림동에 있다. 매주 토요일 밤 1930년대 ‘모던걸’ 복장을 한 가이드를 길잡이 삼아 등불을 켜 들고 나서는 1시간짜리 시간여행 ‘광주 1930 양림 달빛투어’도 있다. 수피아여고 교정에는 1963년 졸업생이 나무를 심어 20년 뒤에 만나자던 약속을 지키고, 다시 20년 후에 약속을 지킨 사연도 있다. 양림쌀롱을 찾으면 골목 곳곳에서 숨은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양림쌀롱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마치 마술처럼 근대로의 여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 여행정보

양림동에서는 호랑가시나무언덕 게스트하우스(062-654-0976)가 최고의 숙소다. 양림동 언덕 위 호랑가시나무 자생지 부근의 선교사 사택을 손을 봐서 게스트하우스로 만든 곳인데 2인실과 3인실도 있다. 시내 한복판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우거진 양림산의 숲을 뒤로 두고 있다. 방은 수도자의 방처럼 소박하고 정갈하다.

게스트하우스에는 ‘호슐랭 가이드’가 있다. 짐작하다시피 ‘미슐랭 가이드’를 풍자적으로 패러디한 양림동 맛집 안내서다. 전남도나 광주시 등에서 내놓은 광주 맛집 목록이 있긴 하지만, 이런 것들은 믿을 만하지 않다. 관이 펴낸 맛집 정보의 목적은 ‘맛있는 식당 골라주기’가 아니라 ‘공평하기’다. 그도 그럴 것이 맛집 목록에서 순위가 뒤로 밀리거나 아예 빠진 식당들의 항의와 반발을 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의 두루뭉술한 식당 추천이 이뤄지게 마련이다.

호슐랭 가이드는 다르다.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이 개인적으로 추천한 것이니 책임질 일도 없고, 항의받을 일도 없다. 추천한 식당 몇 곳을 들러보니 과연 믿을만했다. 편파적이지만 정확하다. 이게 여행자들에게 가장 좋은 정보다. 호슐랭 가이드가 별점 4개를 매긴 양림동의 맛집 중 몇 곳. 반찬 하나하나에 전라도 손맛이 담겨 있는 한옥식당(062-675-8886)은 돼지고기 주물럭과 생고기 비빔밥이 인기가 많고 애호박 찌개도 좋다. 마리오 셰프(062-682-5595)는 이탈리아 골목의 오래된 식당 같은 내부 분위기와 따스한 불빛이 매력적인 곳. 파스타와 리소토, 스테이크 등 이탈리아 요리를 낸다. 입소문이 나서 대기시간이 길어질 수 있으니 예약하고 가는 편이 낫다. 분식집 하늘이네(062-671-4194)와 뚱스낵(062-675-7724), 영스낵(062-672-6486)은 수피아여고, 기독간호대, 호남신학대 학생들로부터 사랑받는 이른바 ‘분식 삼대천왕’이다. 하늘이네는 찜닭이, 한식과 분식을 겸하는 뚱스낵은 닭볶음탕과 떡볶이가 이름났다.


광주=글·사진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
게재 일자 : 2018년 5월 9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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