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웹 | 지면보기 PDF | 기사 상세 찾기 | 2018.5.23 수요일
직지사 대웅전 옆의 불두화 나무에 치렁치렁한 꽃이 만개했다. 만개한 꽃 아래로 떨어진 꽃잎이 마치 쌀알을 흩뿌려놓은 듯하다. 흩어진 꽃잎이 마치 부처님 앞에 내어놓은 보시(布施) 같다.


경북 김천의 직지사.
법당 앞 단풍나무 숲에 누군가 붙여놓은 한 장의 소원지 앞에 오래 서 있었습니다.
‘우리 아빠, 봄까지 지켜주세요.’ 아무런 단서 없는 딱 한 줄의 문장이었지만, 짐작하는 사연만으로도
그만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은 막 지났습니다만,
오늘 LIFE & STYLE은 절집을 찾아갑니다. 김천의 직지사에서 수많은 이들의
기도로 다져진 숲길을 걸어 암자를 둘러보았고, 청량한 계곡의 폭포 뒤로 숨은 절집 청암사까지 찾아갔습니다.
신록이 녹음으로 번져가는 숲도, 암자에 깃든
이야기도, 데일 듯 뜨거운 기도도
거기서 만났습니다만 그 길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암자와 절집을 찾아가는
긴 숲길 위에서 주어졌던
괄호처럼 빈 시간이었습니다.


# 왕의 태(胎)가 직지사를 지키다

직지사는 ‘태실(胎室)’을 빼고 말할 수 없다. 태조 이성계에 이은 조선의 두 번째 왕, 정종 얘기다. 이성계의 둘째 아들 정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 가장 먼저 한 일은, 다른 곳에 있던 자신의 태실을 경북 김천의 직지사 뒤편 북봉으로 옮긴 것이다. 자고로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하면 태를 땅에 묻고 석물을 세웠다. 그게 ‘태실’이다. 태를 묻은 이가 왕이 되면 태실의 대접도 달라졌다. 주변을 정비하고 석물을 추가로 설치했다. 이렇게 정종이 왕에 등극하면서 태실을 김천으로 옮긴 것이다.

정종은 태실을 옮기고 직지사에 자신의 태실을 수호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직지사가 오래 사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태실 수호의 임무 덕분이었다. 태실은 사찰의 위세뿐만 아니라, 직지사 인근의 숲도 지켜줬다. 조선왕실은 정종 태실을 보호하고자, 태실을 묻은 산을 태봉산으로 봉한 뒤에 직지사 인근 30리 일대에서 벌목과 수렵, 경작을 금했다.

정종은 왜 하필 직지사 뒷산으로 태실을 옮겼던 것일까. 그건 바로 직지사 일대가 태백산 문수봉, 오대산 적멸보궁과 함께 기(氣)를 분출하는 이른바 ‘생기처(生氣處)’인데다 직지사 뒤편 북봉의 정종 태실 자리는 풍수의 길지로 알려진, 뱀이 먹이를 찾아 내려오는 형상의 머리 부분인 ‘사두혈(蛇頭穴)’ 자리였기 때문이다.

정종은 과연 자신의 태를 명당에 묻고 그 효험을 보았을까. 왕위에 오른 지 불과 2년 만에 동생 이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물러났으니 그다지 덕을 본 건 아닌 듯 싶지만, 상왕이 돼서 19년 동안 격구, 사냥, 온천, 연회 등을 즐기며 유유자적 생활하다 세상을 떴다니 권력을 지키며 피비린내 나는 권력 싸움에 휘말린 것보다 그 편이 더 나은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정종은 정안왕후 김 씨와의 사이에서 자식이 없었지만, 나머지 7명의 부인 사이에서 자그마치 15남 8녀를 두기도 했다.

정종이 태실을 묻은 길지와 명당의 효험을 보았는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직지사는 태실 덕에 태실을 수호하는 사찰 지위를 받아 당당한 위세를 누렸다. 직지사에 내려진 태실을 지키라는 명령은 사실상 직지사에 태봉산 일대의 독점적·배타적 이용권을 위임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일제강점기이던 1928년 일제에 의해 파헤쳐져 정종 태실은 서삼릉으로 옮겨졌지만, 지금까지도 직지사가 자그마치 600ha에 달하는 산림을 보유하고 있는 데는 530년 동안 임금의 태를 모셔온 사연이 있다. 직지사 태실은 지금 자취도 없지만, 그 흔적은 직지사 경내에 남아있다. 태를 봉안했던 태석이 직지사 천불선원 앞 안양루 마당에 남아있다. 청풍료 앞에는 난간석도 있다.

태실이 남긴 건 흩어진 석물만이 아니다. 직지사 주변의 소나무 숲 역시 태실이 남긴 유산이다. 소나무야말로 조선의 왕목(王木)이었다. 사찰림 곳곳에 거대한 둥치로 서 있는 거북 등껍질 같은 수피의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각별하다. 어디 이뿐일까. 조선조 말까지 왕의 식탁에 오른 홍시를 생산하던 직지사 설법전 뒷마당의 600년 묵었다는 감나무도, 청풍료 굴뚝 옆의 팔뚝 굵기의 가지로 뻗은 늙은 개나리도 예사롭지 않다.


직지사의 산내암자 은선암의 산신각으로 오르는 청량한 숲길. 은선암은 두 달 전까지만 해도 꼭꼭 닫혀있던 암자다.




# 절집 마당까지 내려온 숲

그건 그렇고. 절 이름이 왜 ‘곧을 직(直)’에 ‘손가락 지(指)’, 직지(直指)일까. 유래가 몇 가지 있다. 첫 번째는 신라에 처음 불교를 전한 아도화상이 선산에 신라 최초의 절집 도리사를 창건하고 황악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절이 들어설 자리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 두 번째는 고려 초 능여스님이 중창할 때 자 대신 손가락으로 측량해 지었다고 해서 이렇게 불렀다는 얘기다.

가장 널리 알려진 유래가 세 번째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에서 유래된 이름이라는 얘기다. 한자의 뜻을 풀어보면 “말이나 글로 설명하지 않으며, 경전이나 책으로 전하지 않는다.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본성을 보아 부처를 이루게 한다”는 뜻. 참선 수행을 통해 누구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선종(禪宗)의 가르침을 담은 문장이다.

격식보다 수행을 앞세운다는 이름의 유래 때문일까. 직지사의 분위기는 다른 절집과는 사뭇 다르다. 우선 절집 안의 건물들이 헐겁다. 엄격한 격식을 따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흩어져 있어 분방한 느낌이다. 딱딱하게 조여진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열린 듯한 느낌이랄까. 그래서 산문을 들어선 이의 동선이 좀처럼 겹치지 않는다. 산문을 들어서는 순간, 편안하고 푸근한 마음이 드는 건 그래서다.

직지사가 여느 절집과 다른 또 한 가지는 숲이다. 직지사에서는 절의 영역과 숲의 영역이 서로 다르지 않다. 여기저기 숲이 법당 마당까지 흘러내렸다. 헐거운 건물과 마당까지 밀고 들어온 숲이 한데 어울려서 다른 절집에서는 볼 수 없는 공간감을 보여준다. 대웅전과 비로전 사이에 숲길이 그런 식이다. 직지사에서는 대웅전을 나와 비로전으로 가려면 단풍나무 숲을 지나게 된다. 경내의 한 통로를 짙은 숲으로 만든 건 직지사가 유일하다.

직지사에서 또 하나 특별한 것은 물이다. 직지사 경내에는 물길이 있다. 대개 절집의 물길은 물을 밖으로 빼내는 역할을 하는데, 직지사는 오히려 계곡의 물길을 절집 마당으로 들여놓았다. 그 물길이 숲길을 따라가고 전각의 담을 끼고 돌기도 한다. 계곡 물이 절집 마당의 수로를 따라 천불암 담벼락을 끼고 황악루 앞을 가로질러 만세루 앞의 소나무 숲을 흘러내린다.


# 암자보다 ‘가는 길’

▲ 직지사 천불선원 앞마당에 남아있는 정종의 태를 담았던 태석.
직지사는 한때 산내 암자만 26개를 거느렸다. 절집의 건축물이 도합 352칸에 달했을 당시의 얘기다. 지금 직지사가 거느린 산내 암자는 모두 다섯. 부속 암자는 직지사가 깃든 황악산 자락에 부챗살처럼 퍼져있다.

직지사를 마주 보고 왼쪽부터 순서대로 다섯 암자의 이름을 적어보면 이렇다. 은선암, 명적암, 중암, 백련암, 운수암. 산자락 깊이 들어선 암자는 어둑한 숲 사이에 놓인 실타래 같은 길로 이어진다. 모든 길이 다 시멘트 포장도로라는 게 아쉽기도 하고, 암자로 향하는 길이 제법 가파르고 길어 숨이 턱까지 차오르기도 하지만, 그래도 숲이 워낙 깊고 짙으니 그 길에서 걷고 숨 쉬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모두 청량해진다.

직지사의 다섯 암자는 사실, 암자 자체의 경관으로만 본다면 이렇다 할 게 없다. 직지사의 암자로 가는 길의 보람은 ‘거기까지 가는 길’ 위에 있다. 직지사에서 암자로 가는 길은, 적막한 숲길을 따라 가빠지는 제 숨소리를 들으며 속도를 늦춰 걷는 길이다. 따져보면 고요한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터벅터벅 걸으면서 저를 돌아본다면, 그게 기도와 뭐 그리 다를까.

직지사 다섯 암자 중에서 적막하기로는 은선암이 으뜸이다. 나머지 네 개의 암자가 하나의 길에서 가지 치듯이 이어진 숲길 끝에 있는데, 은선암은 반대편 산자락에 홀로 뚝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은선암까지 가는 산길도 길고 가파르다. 은선암은 최근까지 아예 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30년 넘게 암자를 지키던 노스님이 앓아 누우면서 사람을 들이지 않았던 것. 오랜 투병 끝에 두 달 전쯤 스님은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겼고, 노스님이 떠난 자리에 상좌스님이 들어왔다.

은선암에 들어섰을 때 군 입대를 앞두고 머리를 바짝 치켜 깎은 청년이 연상됐다. 노스님의 병환으로 오래 방치해 덥수룩하던 잡초와 덩굴을 쳐내면서 꽃과 나뭇가지를 바투 잘라내 그래 보였다. 하지만 소쩍새 울음소리 들리는 법당 마당 앞에는 작약꽃이 온통 만개했고 작약꽃 지고 나면 노스님이 가장 좋아했다는 능소화가 암자 이곳저곳에서 지천으로 꽃을 피울 것이니, 거기까지 온 보람은 그것으로도 충분해 보였다.


# 특별할 게 없어서 특별한 곳

▲ 고즈넉한 절집 청암사 들머리의 물길에 내걸린 청아한 폭포.
은선암에서 되돌아 나와 반대 방면으로 다시 길을 잡는다. 다섯 암자 중에서 은선암을 뺀, 네 곳의 암자로 이어지는 길은 해발 1111m의 황악산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와 거의 겹쳐진다. 그 길에 올라 가장 먼저 만나는 명적암은 근래 지어진 암자. 이렇다 할 볼거리도 이야기도 없지만 터덜터덜 돌아 나오는 길가에 세워진 작은 팻말 하나가 발길을 붙잡는다. 거기 적힌 법구경의 구절을 다시 읽는다. “잠 못 이루는 사람에게 밤은 길고, 지친 나그네에게 길은 멀어라.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은 자에게는 생사의 길은 멀고 길어라.” 깊은 산중 적막한 암자에서의 정진은, 이 길을 찾기 위함이리라.

명적암에 이어 곧 중암이다. 중암은 수행 정진을 내건 도량이라 한 달에 한 번, 음력 24일에만 외부인에게 개방한다. 출입금지 표지판 앞에서 드는 의문 하나. 문을 걸어 잠그지 않는다 해도 여기 암자까지 찾아올 이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그래서일까. 개방하는 날이 아니라도 여럿이 몰려가거나 소란스럽게만 하지 않는다면, 조용하게 찾아와 경내를 들여다보는 것까지 막지는 않는다. 중암에서는 마당을 빙 둘러 심은 붉은 적송이 특히 인상적이다. 가지를 뒤틀고 선 적송의 비범한 자태에서, 중암에서 정진 중인 스님의 서슬 퍼런 기세가 느껴진다.

중암을 나와 백련암과 운수암으로 이어지는 길은 단풍나무로 울창하다. 단풍 숲이 어찌나 깊은지 가을에 꼭 한 번 다시 찾아오겠노라고 다짐하게 된다. 백련암과 운수암은 두 곳 모두 비구니 스님의 암자다. 그래서일까. 마당이 잘 키운 야생화들로 화사하다. 작은 마당을 두른 소박한 백련암도 그렇고, 성벽처럼 높은 돌담을 두르고 있는 운수암도 그저 적막할 따름이다. 직지사의 산내 암자는 근사한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니고, 화려한 치장을 뽐내는 곳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런 암자에 마음을 내려놓게 되는 것은 눈과 마음을 빼앗을 만한 특별한 것이 없어서이기도 하고, 제 마음의 기척을 세심하게 느낄 수 있을 만큼 고요해서이기도 하다. 더불어 직지사의 암자가 가진 가장 큰 미덕은 딱 하나, ‘오래 숲길을 걷게 한다’는 것이다.


직지사의 암자 중 하나인 중암의 중심건물인 영산보전의 화려한 꽃 문살.


# 숨어든 왕후를 지켜주다

김천을 대표하는 절집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직지사다. 그 명성에 밀려 청암사는 낯설다. 하지만 절집의 내력과 뿜어내는 청량한 기운으로 치자면 청암사도 이에 못지않다. 청암사는 왠지 비밀스러운 느낌으로 그득하다. 일주문을 지나 절집으로 오르는 길부터가 그렇다. 들머리는 작은 폭포가 흘러내리는 협곡이다. 그 옆의 돌계단을 딛고 올라서서 물길을 건너면 절집 마당을 들어서게 된다.

청암사는 기사환국 때 궁궐에서 쫓겨나 서인으로 강등된 인현왕후가 숨어들었던 곳이다. 장희빈의 간계로 궁궐에서 쫓겨났다가 5년 뒤 갑술옥사 때 다시 왕후로 복귀했던 숙종의 계비, 그 인현왕후 말이다. 청암사는 지금도 제법 깊은 산중인데, 인현왕후가 몸을 숨기던 시절이야 오죽했을까. 첩첩산중의 절집에서 폐위돼 비탄에 빠진 왕후의 기도는 얼마나 간절했을까.

특이한 건 청암사의 몇몇 법당 건물들이 반가 고택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웅전 양 옆의 진영각과 육화전이 그렇고, 별당 격인 극락전 건물도 그렇다. 그중 눈길을 끄는 곳이 따로 대문을 달고 뚝 떨어져 있는 극락전이다. 여기가 바로 궁궐에서 쫓겨난 인현왕후가 기거했던 곳이다. 사대부 한옥의 양식으로 극락전을 지은 건 왕후를 배려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궁중의 상궁들은 주위의 눈을 피해 폐위당한 인현왕후를 만나러 청암사를 드나들었다고 전한다. 상궁들은 왕후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왕후를 돕기 위해 청암사에 시주를 바치기도 했다. 극락전 중창과정에서 나온 시주록 명단에 이름을 올린 궁중 상궁만 26명이다.

청암사와 상궁의 인연은 훗날에도 이어진다. 고종의 넷째 아들 영친왕의 생모 엄비의 총애를 받았던 영친왕의 보모상궁이었던 최송설당. 김천 출신인 그는 빈민구제 사업을 벌이기도 했고, 독립자금을 대기도 했던 여걸이었다. 그는 말년에 전 재산을 바쳐 학교를 지었다. 화재로 잿더미가 된 청암사의 중창도 한때 불교에 귀의해 정진했다는 그의 시줏돈이 큰 보탬이 됐단다.

누구는 그곳에 자신의 태를 묻었고, 누구는 그곳으로 숨어들었다가 다시 세상으로 나갔으며, 또 출가를 꿈꿨던 누구는 모은 돈을 불전에다 바쳤다. 얼마나 많은 인연과 기도가 그곳을 지나갔을까.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음에도 직지사와 다섯 암자, 그리고 청암사는 번져가는 녹음 속에서 그저 고즈넉할 뿐이다.


■ 여행정보

직지사·청암사 가는 길 = 직지사를 찾아가려면 경부고속도로 김천 IC보다 추풍령 IC로 나가는 게 더 빠르다. 추풍령 IC로 나가서 광천삼거리에서 김천 방면으로 우회전해 4번 국도를 탄다. 덕천사거리에서 우회전해 대항면사무소와 직지사우체국을 지나면 이내 직지사다. 직지사가 김천 북쪽에 있다면 청암사는 김천 남쪽에 있어 차로 1시간 가까이 걸린다. 직지사에서 903번 지방도로를 타고 동구지산과 삼성산 사이의 계곡을 타고 넘어 구성면사무소까지 가서 3번 국도로 갈아타고 감천의 물길을 따라간다. 지례면을 지난 뒤 903번 지방도로에 올라 증산면사무소까지 가면 거기서 청암사가 지척이다.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직지사 입구 주차장 인근의 파크호텔(054-437-8000)을 추천한다. 직지사 입구에 민박집들도 많다. 김천 혁신도시에 로제니아 호텔(054-429-4700)이 있다. 청암사나 수도암 부근에도 인근 수도산 등산객을 위한 모텔, 민박집들이 많다.

지례면은 흑돼지구이로 이름났다. 주민들이 1980년대 후반 지례의 명물이던 흑돼지 복원에 나서면서 면 소재지에 스무 곳에 달하는 흑돼지 전문식당이 생겨나 ‘흑돼지 거리’가 됐다. 지례 흑돼지는 크기는 작지만, 맛은 뛰어나다. 감문면의 배신식당(053-430-5834)도 돼지구이로 이름난 60년 내력의 맛집이다. 연탄불에 석쇠를 올려 돼지고기를 구워낸다. 오단이꼬마김밥(054-434-7924)과 중국만두(054-434-2581)는 간식으로 괜찮다. 김밥에는 어묵, 단무지, 오이. 이렇게 딱 세 가지만 들어가는데도 자꾸 당기는 맛이다. 중국만두는 상호처럼 진짜 중국식은 아니지만 만두소의 육즙이 제법 촉촉하다.


김천 = 글·사진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
게재 일자 : 2018년 5월 23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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