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웹 | 지면보기 PDF | 기사 상세 찾기 | 2019.9.20 금요일
경북 군위군 고로면 화북 4리 화산마을에서 본 풍경. 해발 800m의 화산마을에서는 군위 일대의 경관이 다 내려다보인다. 특히 요즘처럼 일교차가 심할 때는, 아침 시간에 맞춰 찾아가면 발아래로 운해가 펼쳐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여행자들이 기억해야 하는 이름난 명소가 군위에는 없습니다. 하지만, 군위는 그래서 더 매력적이지요. 바꿔 말하자면 하나의 압도적인 이미지가 다른 것들을 다 빨아들이는 곳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군위의 명소는 맥락 없이 다양합니다. 하나의 명성이 다른 것들을 가리지 않습니다. 군위는 다 고만고만합니다. 경관도, 역사도, 인물도, 이야기도…. 단번에 눈을 확 휘어잡을 만한 건 없습니다. 하지만 찬찬히 듣고 보고 읽으면 새록새록 마음을 붙잡는 곳들이, 군위에는 있습니다. 큰 기대가 없으니, 만족은 선물과도 같답니다.


# 기억해야 할 이름이 없어 매력적인 곳

여행목적지로 경북 군위는 낯설다. ‘군위(軍威)’. ‘군사 군(軍)’에 ‘위엄 위(威)’를 쓴다. 뜻을 풀면 ‘군사의 위엄’이다. 기록을 뒤지니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하러 이곳을 지날 때 고려 군사의 위세가 워낙 당당해서 이런 지명이 붙여졌단다. 하지만 군위란 지명은 고려 이전인 신라 때부터 보이니 근거 없는 허풍이다. 군위는 왕건의 군대가 지나가서 이름 붙여진 땅도 아니고, 치열한 전쟁이나 곡절 많은 역사가 지나갔던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군위에 무슨 이렇다 할 경관이 있는 것도 아니다.

군위에서 딱 하나 특별한 게 있다면 ‘삼국유사’다. 고리타분하고 지루하다 할지도 모르겠으나, 군위가 가장 자랑하는 건 다름 아닌 일연의 삼국유사다. 상주∼영천 고속도로가 지나는 군위 땅의 휴게소 이름이 ‘삼국유사 군위휴게소’라면 알 만하지 않은가. 삼국유사를 쓴 일연 스님은 고려 때 국사(國師)에 책봉돼 강화도, 포항, 대구, 청도 등에서 불법을 닦다가 일흔여덟 나이에 은퇴해 여기 군위로 내려왔다. 당시 아흔다섯의 노모를 모시기 위해 군위의 절집 인각사에 자청해 부임한 것이었다. 이듬해 노모가 세상을 뜬 뒤에도 일연은 군위를 떠나지 않았다. 입적하기 직전까지 일연은 인각사에 머물며 5년 동안 삼국유사를 썼다. 삼국유사가 쓰인 곳. 그게 군위의 가장 큰 자랑이다.

자주적 민족사관을 바탕으로 삼은 삼국유사에는 드라마틱한 신화와 전설이 그득하다. ‘한국판 아라비안나이트’라고나 할까. 이성의 눈으로 보면 다소 황당하다 싶은 이야기들이 적잖긴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통해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건 고대인의 사유와 상상력이다. 삼국유사의 진가는 논리가 아니라, 상상력과 감동에 있다는 얘기다.


# 인각사, 그곳에서 태어난 삼국사기

▲ 경북 군위가 가진 유일한 국보인 군위삼존석굴. 수직 암벽에 굴을 뚫어 삼존불상을 두었다. 경주 석굴암보다 70여 년 남짓 시대가 앞서 석굴암의 원조로 불린다.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를 군위의 절집 인각사에서 썼다. 신라 선덕여왕 때 세워졌다는 사찰. 인각사는 고로면 화북리에 있다. 절 앞으로 위천의 물길이 흐르고 물길 뒤로 거대한 직벽 학소대가 우뚝 솟아있다. 절집의 이름 ‘인각(麟角)’은 ‘기린의 뿔’이라는 뜻. 절이 앉은 자리가 기린의 뿔에 해당한다는 얘긴데 그것까지는 쉽게 수긍할 수 없지만 절집 길 건너편의 바위 절벽 학소대만큼은 인상적이다.

인각사에는 보각국사 탑비가 있다. 다 부서져 밑동만 남아있는 초라한 비석이다. ‘보각국사’란 일연 스님에게 내려진 칭호. 탑비는 일연 스님의 일대기를 담고 있다. 명필 중의 명필이었던 중국의 왕희지 글씨만 모아 새긴 것이라는데, 글씨에 감탄한 당시 선비들이 줄을 서서 탁본을 해갔다고 전한다. 급기야 탁본을 잘 뜨기 위해 비석을 넘어뜨리기까지 했단다.

탁본해 간 건 우리 선비들뿐만이 아니었다. 탑비에는 중국에도 없다는 왕희지 글씨가 포함돼 있어서 중국 사신들도 우리나라에 오면 인각사에 들러 비석의 왕희지 글씨를 탁본해가는 게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다고도 전해진다. 어찌나 많이 탁본을 떴던지 비석은 크게 훼손됐지만, 탁본 글씨는 지금까지도 흔하다. 이 탁본을 토대로 일연 스님 탄생 800주년이었던 지난 2006년 훼손된 탑비를 원형대로 다시 만들어 극락전 뒤편의 옛 절터에 세워두었다.

인각사에는 비바람에 얼굴이 무너진 석불좌상도 있고, 소박한 맵시의 삼층석탑도 있다. 일주문도 담장도 없는 황량한 절집 인각사는 겹쳐진 시간이 느껴지는 공간이다. 오래전에 일연 스님은 그곳에서, 그보다 더 오래전의 얘기를 책에 기록했다. 일연 스님의 여든넷 삶은 그가 쓴 삼국유사만으로도 빛난다. 자칫 잊힐 뻔했던 과거를 삼국유사가, 아니 일연 스님이 이곳에서 살려냈던 것이었다. 절집 안에 초라한 가건물로 서 있는 일연기념관에 들러 일연 스님 아니, 속명(俗名) 김견명의 생애와 삼국유사의 흔적을 더듬어보자. 과시하고 치장하지 않아서 좀 쓸쓸한, 그런 경관이 참 고즈넉하다.


# 화산마을, 운해를 딛고 서는 자리

삼국유사 얘기 때문에 뒤로 접어두었지만, 사실 군위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곳은 화산마을이었다. 누군가 군위의 여행 명소 한 곳에만 점을 찍으라고 한다면 단연코 여기다. 화산마을은 말 그대로 산에 있다. 군위군 고로면 화북 4리. 군위와 영천의 경계에 우뚝 솟은 화산(華山·828m) 자락에 있다고 화산마을이라고 불린다. 여기는 가보면 누구나 입을 딱 벌리게 된다. 차를 타고 7.6㎞에 이르는 인적없는 산길을 따라 꼬불꼬불 올라가면 그 끝의 해발 800m 고지대에 거짓말처럼 ‘하늘 아래 첫 동네’ 화산마을이 있으니 말이다.

마을에 서면 모두 발아래다. 첩첩이 이어진 산 능선이 모두 발아래 있다. 요즘처럼 일교차가 큰 날에 오전 나절 화산마을에 오르면 운해를 볼 수 있다. 발아래가 마치 솜으로 짠 양탄자처럼 구름과 안개로 뒤덮인다. 화산마을 전망의 정점에는 풍차가 세워져 있다. 뜬금없는 풍차는 그것만으로는 촌스러운데, 어쩐지 이곳에서만큼은 잘 어울리는 듯하다.

화산마을 주민들은 고랭지채소를 주로 재배한다. 단정하고 가지런한 고랭지 밭의 풍경이며, 띄엄띄엄 들어선 소박한 집들이 마치 동화 속 풍경 같다. 화산마을의 경관은 정겹고 푸근하고 또, 자연스럽다. 발아래로 그림 같은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마을 길을 걸으면 이국적인 그림 속으로 들어온 듯하다. 그 느낌이 어쩐지 참으로 평화롭다. 다른 관광지에서는 쉽게 느낄 수 없는, 그런 기분이다.


고풍스러운 돌담과 단정한 고택, 정갈한 대청이 아름다운 군위의 전통마을인 한밤마을.


# 높고 먼 산에 마을이 있는 까닭

멋진 조망을 품고 있는 아기자기한 화산 마을의 정취가 외부로 점차 알려지면서 최근 알음알음 외지인들이 찾아들기 시작하고 있다. 관광객이 늘어난대도 변변한 가게 하나 없으니 돈 될 일도 거의 없지만, 주민들은 이 먼 곳까지 찾아주는 관광객들이 그저 반갑고 고맙다. 지난여름에 주민들이 하늘과 닿은 구릉에다 해바라기밭을 가꿨던 것도 순전히 마을을 찾아오는 이들을 위해서였다.

화산마을 주민들은 대체 어쩌자고 이리 높고 먼 곳까지 올라와 살게 됐을까. 집집 마다 차가 있는 이즈음에도 먼 곳인데, 시장이라도 한 번 나가려면 이틀을 꼬박 걸어야 했던 과거에는 대체 이곳은 얼마나 먼 오지였을까.

마을 주민에게 물어서 들은 이야기를 정리하면 이렇다. 1919년 무렵 화산마을에는 서너 가구가 고작인 자연부락이 있었는데, 1962년 정부의 산지개간 정책에 따라 180가구가 무상으로 임야를 받아 집단으로 이주했다. 이주해온 이들은 4개 지구로 나눠 정착했는데, 고된 노동과 산중 생활의 불편을 견디지 못한 이들이 하나둘 나가서 3개 지구는 사라졌고, 1개 지구만 지금 화산마을로 남아있다.

화산마을 아래에는 조선 시대에 축성되다가 중단된 화산산성과 산성의 배수로인 수구문이 있다. 화산산성은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 숙종 때 병마절도사 윤숙이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짓기 시작했다. 산성을 쌓던 중 흉년이 들면서 산성 쌓기가 중단돼 성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짓다가 중단한 산성의 느낌은, 허물어진 성과는 사뭇 다르다. 화산산성을 보면서 ‘어쩐지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서의 느낌이 겹쳐졌다’고 말한다면, 동의할 사람이 있을까.


영화 ‘리틀 포레스트’ 주인공 혜원의 집. 군위군 우보면 미성리에 있다. 촬영세트로 쓰인 곳이지만, 영화 속의 분위기가 그대로 느껴진다.


# 석굴과 마을과 역, 그리고 집

십중팔구는 그럴 것 같다. 군위 사람에게 물으면 군위의 최고 명소로 ‘삼존석굴’을 꼽는 이가 가장 많으리라. ‘제2석굴암’이라고도 불리는 삼존석굴은 수직의 천연 암벽 20m 높이에 굴을 만들어 아미타여래 삼존상을 모시고 있다. 우리나라 석굴사원 중 유일하게 자연암벽으로 이용해 조성된 삼존석굴은 훗날 경주 석굴암 조성의 모태가 됐다. 삼존석굴은 1300여 년 전 통일신라 초기에 조성됐다. 석굴암보다 빠르다. 그러니 ‘두 번째’로 읽히는 ‘제2석굴암’이란 별명은 적합하지 않은 셈이다. 석굴까지 계단이 놓여있지만, 훼손의 우려 때문에 참배단에서 올려다봐야 하는 게 좀 아쉽긴 하지만, 군위에 갔다면 군위의 유일한 국보인 삼존석굴을 빼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군위에서 또 둘러봐야 할 곳이 부계면의 한밤마을이다. 부림 홍 씨의 집성촌인 한밤마을은 4㎞가 넘는 돌담과 그윽한 정취의 고택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마을이다. 한밤마을에서는 ‘산책’이 가장 잘 어울리는 일인데, 마을 들머리 도로에 치켜 올려 세워진 ‘진동단(鎭洞壇)’이란 화강암 솟대, 야트막하지만 길게 쌓아둔 돌담, 그리고 마을 중심에 있는 남천고택과 대청(大廳)을 산책코스에 끼워 넣자.

군위에는 중앙선 철도의 아담한 간이역인 화본역도 있다. 옛 역사와 잘 어울리는 ‘복고’를 주제로 마을미술프로젝트가 진행됐던 곳이어서 색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한 곳 더. 임순례 감독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봤다면, 아마도 여행의 순서를 다시 짜야 할지도 모르겠다. 여정의 맨 앞에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무대인 우보면 미성리의 ‘혜원의 집’부터 찾아가고 싶어질 것이니 말이다. 리틀 포레스트는 도시생활에 지친 ‘혜원’(김태리)이 고향 집으로 돌아와 사계절을 보내는 과정을 담은 영화. 영화가 주목하는 건 계절의 아름다움과 다채로운 음식이다.

영화에서 계절과 음식은 더없이 매혹적으로 다뤄지는데, 그 배경이 바로 혜원의 집이다. 집은 개방돼 있으면서도 영화 촬영 당시 그대로 잘 관리되고 있다. 누구나 혜원의 집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주인공이 타던 자전거도 자유롭게 탈 수 있다. 자전거는 영화에 등장한 것 말고도 세 대가 더 있다. 주민들이 방문객을 위해 사서 비치해 놓은 것이다. 이런 배려 덕분에 여기서는 누구나 영화 속으로 들어간 것 같은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혜원의 집 부엌. 누구나 들어가 볼 수 있다.


# 군위와 엄홍도, 그리고 단종

군위에서 뜻밖의 인물 ‘엄홍도’와 만났다. 군위군 산성면 면사무소 뒤편 야산에는 잡풀로 뒤덮인 엄홍도의 묘가 있다. 엄홍도는 조선 세조 때, 강원 영월에서 지금의 ‘면장(面長)’쯤 되는 호장(戶長) 벼슬을 한 인물이다. 자그마치 550여 년 전 지방의 말단 관리의 이름을 아직 기억하는 건, 그가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에 유배돼 처참한 최후를 맞은 단종의 시신을, 죽음을 무릅쓰고 수습했기 때문이었다.

서슬 퍼런 권력교체기. 정당성을 갖지 못한 권력은 극도로 포악했다. 길거리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누구도 거두지 못했다. 거둬 묻기는커녕 통곡조차 할 수 없었다. 역모의 죄로 다스려질 게 뻔한 상황이었으니 모두 쉬쉬하며 단종의 죽음을 지나쳤다. 그때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이가 호장 엄홍도였다. 그가 없었다면 단종의 주검은 유실되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단종 묘인 장릉도 없었을 것이었다. 죽음의 실체가 없었다면, 단종의 기억도 지금보다는 훨씬 더 흐릿했을 것이었다.

엄홍도는 영월에 묻힌 거로 돼 있다. 단종의 묘인 영월 장릉에서 머지않은 팔괴리에는 버젓이 충신 엄홍도 묘가 있다. 그런데 엄홍도 묘가 여기 군위에도 있다. 둘 중의 하나는 가짜다. 그럼 어떤 게 진짜고 어떤 게 가짜일까. 논란은 아직 진행 중이다. 다만 개인적인 의견을 말한다면, 여기 군위에 있는 엄홍도 묘가 진짜라는 데 기꺼이 한 표를 던진다.

먼저 영월의 묘가 진짜일 리 없다는 주장의 주된 근거.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 단종의 시신을 거둔 엄홍도가 영월 땅에서 목숨을 부지하며 살다 죽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단종과 관련한 밀고가 횡행했던 시절이었다. 혼돈의 시기. 새로운 권력에 인정받기 위해서는 이전의 권력을 배신해야 했다. 밀고는 이전 권력을 배신하고 새로운 권력에 줄을 섰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권력의 주변에는 밀고로 한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이들로 들끓었다. 이런 판국에 단종의 시신을 수습했다는, 당시로써는 역모에 가까운 행위를 했던 엄홍도가 영월에서 여생을 무사히 마치고 묘까지 썼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 이정표도 안내판도 없는 무덤

엄홍도와는 연고 하나 없는 군위 땅에 엄홍도의 묘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엄홍도와 함께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정사종이 군위 현감을 지냈다는 데 주목한다. 정사종이 산간벽지인 군위의 산성면 일대를 소개하고 그곳에 은둔 도피를 권했을 것이란 얘기다. 여기에다 군위에 은거하는 의흥 엄 씨의 300년 전 기록에 엄홍도의 묘소 얘기가 전해진다는 점도 주요한 근거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편에도 ‘엄홍도의 후손이 영남에 있다 하니…’라는 문구가 나온다.

그러거나 말거나 국가로부터 공인받은 엄홍도의 묘소는, 군위가 아니라 영월에 있다. 훗날 단종이 복위된 뒤 엄홍도는 충신으로 치켜세워져 호장이었던 벼슬이, 죽어서 좌랑으로, 참판으로, 급기야 판서로 승진했다. 살아서 면장이었던 이가 죽어서 장관이 된 셈이었다. 영월의 엄홍도 문중에는 벼슬이 내려지고, 가문은 대를 이어 직위를 받았다. 종손은 병역과 세금 납부를 면제받기도 했다. 그러나 군위의 후손들은 남이 알아주든 말든 아무런 혜택도 없이 550년이 넘도록 묵묵하게 엄홍도의 묘를 돌봐왔다.

엄홍도의 무덤은 숨어있다시피 하다. 이정표도, 안내판도 없다. 금양 1리에서 산성면사무소로 이어지는 길가에 야산을 오르는 나무 덱이 설치돼 있는데, 이 덱이 이정표나 화살표 하나 없이 엄홍도 무덤으로 이어진다. 무덤은 3기다. 앞의 2기의 무덤은 파헤쳐져 부관참시 될 것에 대비해 만든 가짜 묘이고, 뒤쪽에 비석과 석등, 돌사자를 거느린 묘가 엄홍도의 것이다. 뒤쪽 무덤의 비석에 새겨진 엄홍도의 이름이 뚜렷하다. 그는 죽어서 이렇게 숨었고, 단종의 죽음은 그로 인해 영월의 장릉으로 남았다.


■ 여행정보

경북 군위는 숙소사정이 극히 열악하다. 숙소 대부분이 낡고 오래된 이른바 ‘장급’ 여관들이다. 그나마 백송스파비스 관광호텔이 있긴 하지만, 이곳도 ‘신식’은 아니다. 호텔에는 백송온천이 있는데, 온천시설 역시 낡았지만 강알칼리성이라는 온천물만큼은 나무랄 데 없다. 군위를 가겠다면 대구나 영천, 혹은 칠곡 쪽에서 숙소를 구하는 게 더 나을 듯하다.

군위에는 제법 이름난 한우 식당이 두 곳 있다. 두 곳 모두 정육식당 겸 직판장인데 가격대비 만족도가 높아 대구에서도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다. ‘이로운한우’(054-382-9800)와 ‘참좋은 한우(054-382-8260). 이웃해 있는 두 집은 옆집이나 다름없다. 화본역 주변의 ‘화본국수전문점’(054-383-1003)은 화본역이나 ‘엄마아빠 어렸을 적에’ 박물관을 찾은 관광객들 사이에서 제법 입소문이 난 곳이다. 이곳은 특이하게도 제주 서귀포의 ‘수모루국수’ 본점이다. 제주 향토 음식인 고기국수를 비롯해 된장시래기국수, 화본국수, 비빔국수 등을 낸다.

메기매운탕과 잡어매운탕을 칼칼하게 끓여 돌솥밥과 함께 내놓는 ‘효령매운탕’(054-383-9088)도 추천한다. 군위읍 ‘솔밭집’(054-382-1277)의 닭볶음탕도 지역주민들이 알아준다. 팔공산 자락의 ‘청포도마을’(054-383-0802)은 닭과 오리백숙으로 이름난 곳인데, 삼겹살 바비큐와 오리 불고기, 닭백숙 등을 순서대로 내오는 이른바 ‘세트메뉴’가 인기다. 칠곡에서 군위로 넘어오는 한티재 부근의 ‘동화속으로’(054-383-7979)도 오리백숙 맛집으로 꼽힌다.


군위 =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게재 일자 : 2019년 9월 20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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