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웹 | 지면보기 PDF | 2021.12.27 월요일
일본식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2층 목조주택 장미사진관. 처음에는 싸전이었다가 모시전, 어물전, 여관, 대폿집, 사진관으로 쓰였다.



1930년 장항선 놓이며 들어선 오일장·우편소·정미소·양조장

1980년대 국토 개발로 쇠락길…건물만 남긴 채 사람들 떠나가


일제강점기 건물 ‘장미사진관’…독특한 외관에 랜드마크 역할

1967년에 문 연 ‘판교극장’엔 ‘맨발의 청춘’ 등 그시절 포스터


일대 건물 7채 등록 문화재로…특정 공간 전체지정은 이례적


뒤돌아서 걸어온 길을 돌아보게 되는 한 해의 끝. 오래전에 쇠락한 낡은 마을을 찾아갑니다. 충남 서천의 판교마을. 추억의 공간과 시간이 박제처럼 남아 있는 곳입니다. 올 한 해도 참으로 힘겹게 건너갑니다. 한 해를 보내는 상념을 떠올리기조차 어려운 시간이었습니다. 내년도 쉽지 않은 날들이겠지요. 가야 할 좌표가 잘 보이지 않을 때, ‘추억’은 위안입니다. 시간이 유물로 남은 마을을 찾아가 오래된 건물과 골목을 기웃거리며 추억의 불씨를 뒤적였던 이유입니다. 혹시 위안이 필요하진 않으신가요.


# 판교마을에 박제된 시간과 공간

충남 서천군 판교면 현암리는 오래전에 시곗바늘이 멈춘 것 같은, 오래된 흑백사진 속 풍경 같은 마을이다. 마을은 죄다 낡고 오래된 것들의 질감으로 가득하다. 녹슬어가는 철 대문과 기울어진 목조건물, 막다른 골목과 펑크 난 리어카, 셀로판지를 떼어낸 자국으로 유리창에 남은 옛 대폿집 상호…. 현암리 골목에는 쇠락한 건물들이 마치 유적처럼 남아 시간을 되돌린 것 같은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현암리를 일러 ‘판교마을’이라고도 부른다. ‘판교’라면 경부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먼저 떠올릴 텐데, 여기 서천의 판교도 성남 판교와 지명 유래가 똑같다. 지금은 폐교된 판교초 앞 물길에다 널빤지로 다리를 놓고 다녔다 해서 ‘널다리’로 부르다가 ‘너더리’가 됐고, 이걸 한자로 옮기면서 ‘널빤지 판(板)’에 ‘다리 교(橋)’ 자를 써 판교라 불렀다. 서천의 판교에는 또 이런 이야기에 한 줄이 덧대어 있다. 한밤중에 호랑이가 마을로 건너온다는 이야기가 돌자 낮에는 널빤지를 놓아 다리로 쓰고, 밤이면 호랑이가 건너오지 못하도록 널빤지를 거둬들였다는 얘기다. 서천 판교마을에는 유독 전해지는 호랑이 얘기가 많다. 주로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얘기다. 호랑이가 출몰했을 만큼 깊고 외딴곳이었던 모양이다.

지금은 판교면이지만, 본래는 비인군 동면에 속한 ‘판교리’였다. 그러던 것이 1930년 장항선 열차가 놓이고 판교역이 들어서면서 마을이 번성하자 ‘판교면’으로 승격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판교면의 중심은 오일장과 우시장이 서던 판교리였는데, 정작 판교역이 들어선 자리는 판교리가 아니라 이웃 현암리였다. 현암리에다 역을 세우면서, 역 이름은 그때까지 인근에서 가장 번성한 마을이었던 판교리를 가져다 쓴 것이다.

기차역이 현암리에 들어서자 판교면의 중심은 판교리에서 급속도로 현암리로 옮겨갔다. 기차역이 서자 이듬해인 1931년 오일장이 현암리로 옮겨왔다. 1935년에는 판교우편소, 1936년에는 판교면사무소, 1942년에는 판교경찰서가 줄줄이 현암리로 이전했다. 제재소와 목공소, 정미소, 양곡상, 양조장이 앞다퉈 현암리에서 문을 열었다. 이따금 악극단 쇼까지 공연하는 극장까지 마을에 들어섰을 정도였으니 전성기에 현암리가 얼마나 흥청거렸는지는 짐작되고도 남는다.

남부러울 것 없는 시간을 보내던 현암리는 1980년대 들어 도시중심의 국토개발로 마을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성장의 속도도 빨랐지만, 쇠퇴의 속도는 훨씬 더 빨랐다. 확인사살처럼 당겨진 마지막 방아쇠가 2018년 장항선 철로 직선화로 인한 판교역 이전이었다. 역으로 번성했던 마을은 역이 빠져나가면서 스러졌다. 여기다가 2009년 서천공주고속도로, 2015년 국도 4호선까지 멀찌감치 비껴가면서 현암리는 교통과 지리적 중요성을 모두 다 잃고 섬이 되고 말았다. 이런 과정에서 성장과 쇠퇴의 시·공간이 마을에 고스란히 박제처럼 남았다. 쇠락의 속도가 너무 빨라 미처 지워지지 않은 예전의 모습. 이게 지금 현암리가 간직하고 있는 풍경이다.

판교극장. 1961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공공행사를 여는 공관(公館)으로 문을 열었다가 1967년부터 극장으로 활용됐다.



# 그 마을의 시간은 왜 멈췄을까

현암리에 남아 있는 과거의 흔적은 쇠락해가는 마을을 서둘러 빠져나간 사람들이 벗어두고 간 번데기 같은 공간들이다. 사람들은 다 사라지고 오래된 공간만 남아 있는 듯한 풍경. 현암리를 일러 ‘시간이 멈춘 마을’이라거나 ‘타임캡슐’이라 부르는 건 그래서다.

쇠퇴의 시간이 왔을 때 그들은 왜 어떻게든 버텨보려 하지 않았을까. 그들이 마을을 지키지 않고 미련 없이 세상의 속도를 따라서 떠났던 건 거기가 고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판교역이 들어서고 현암리가 흥청거리던 무렵 찾아든 사람들이었다. 불이 꺼지자 그들은 이내 떠났다. 현암리가 번영으로 누린 시간은, 주민들이 뿌리를 내리기에는 너무 짧았다.

지금 현암리에 남아 있는 오래된 공간들은 그들이 그때 버리고 간 것들이다. 버텨보려 했다면 어떻게든 고쳐 쓰든가 허물고 다시 지으면서 훼손됐을 텐데, 아예 버리고 가는 바람에 오히려 옛 모습 그대로다. 이렇게 남겨진 옛것의 가치를 알아본 문화재청은 지난 10월 현암리 일대의 건물 7개를 묶어 통째로 국가 등록문화재로 지정했다. 특정 건축물이 아니라 마을의 일정 공간 전체를 등록문화재로 지정한 건 이례적이다. 건물 하나하나뿐만 아니라, 마을에 남겨진 근대의 자취를 보존해보겠다는 뜻이다.

현암리에서는 별다른 계획 없이 그저 등록문화재가 된 건물들을 차례로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오래된 추억의 불씨를 뒤적이는 훌륭한 여행이 된다. 이때 뒤적이게 되는 추억이란, 그곳의 과거가 아니라 가슴에 품고 있는 저마다의 과거다. 현암리에 남겨진 오래된 것들 앞에 서면, 다 잊혀서 차갑게 식어버린 줄 알았던 낡은 기억에 불씨가 댕겨진다.


판교마을 골목에 나란히 잇대어 길게 지어진 건물.




# 장미사진관, 그리고 오래된 술도가

현암리의 건물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옛 판교시장 인근의 ‘장미사진관’이라고 부르는 2층 목조주택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운영하던 쌀 배급소로 지어진 건물인데, 당시로써는 드물게 2층 한옥 상가로 지어진 건물이어서 독특한 외관으로 랜드마크 역할을 해왔다. 장미사진관이 들어선 자리는 판교 오일장과 우시장이 연결되는 곳으로 모시전, 어물전, 싸전, 여관, 대폿집 등이 늘어서 번성했다. 장미사진관도 한때 쌀집이었다가 주산학원, 사진관, 점방, 원불교 예배당 등으로 바뀌어오면서도 옛 모습을 잃지 않았다. 사진관은 진즉 문을 닫았지만 증명사진을 찍어주던 사진관 상호가 곧 건물의 이름이 돼 남았다.

장미사진관 근처에는 ‘동일주조장’이 있다. 시멘트 건물에다 나무문을 매달았다. 주조장이 들어선 건물은 1932년 지어진 것. 동일주조장은 1950년대부터 여기서 술을 빚기 시작했다. 주조장 뒤쪽 건물에 정미소까지 함께 운영하면서 거기서 찧은 쌀로 막걸리를 담가 팔았다. 시골에서 정미소와 양조장을 운영한다면 그 지역의 유지였음이 틀림없다. 처음 주조장을 시작한 초대 사장 박호성은 정미소, 양조장과 함께 학교를 운영했다. 1956년 판교중을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재직했다. 동일주조장에서 멀잖은 곳에 있는 판교중은 지금도 운영 중이다. 판교중은 전체 인구가 2000명을 겨우 넘는, 그중에서 65세 이상 비율이 절반이 넘는 면 단위의 시골 중학교다.

3대에 걸쳐 술을 빚어오던 동일주조장은 지난 2000년 문을 닫았다. 주조장 건물이 어찌나 초라하게 쇠락했는지 20년 전까지만 해도 여기서 술을 빚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그런 인상을 주는 데는 시멘트벽의 ‘동일주조장’ 상호 아래에 고딕체로 굵게 새겨진 전화 번호가 한몫한다. ‘TEL 45’. 전화 번호가 두 자릿수 ‘45’번이다. 그러고 보니 골목 초입 한약방 전화 번호는 ‘29’번이었고, 삼화정미소는 ‘52’번이었다. 자석식 교환 전화가 있었던 아득한 시절의 전화 번호다. 그때는 교환수가 전화를 연결해줬다. 동일주조장을 기웃거리면서 터무니없는 상상을 했다. 두 자릿수 전화 번호가 있던 시간으로 되돌아가 그 시절의 누군가와 통화할 수 있다면 교환수에게 누구를 대달라고 할까. 그 시절의 그에게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을까.

판교마을 시장골목 초입의 삼화정미소. 오 씨 성을 가진 이가 운영했다고 해서 주민들은 ‘오방앗간’이라고 불렀다.



# 낡은 극장 앞에서 추억과 만나다

현암리에서 추억을 가장 강력하게 환기하는 곳은 마을 안쪽의 판교극장이다. 판교극장은 현암리의 다른 건축물들과는 결이 좀 다르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현암리 건물 대부분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것. 그 건물들이 근대의 풍경을 보여주는 공간이라면, 이곳 판교극장은 1960년대 지어져 1970년대 지역의 번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60년대 당시 정부는 지방에 집회시설로 활용할 공회당 건립을 행정적으로 지원했다. 판교극장도 1961년 판교면이 모범시군에 선정되면서 지원받은 돈으로 지은 것이었다. 처음에는 지역주민들이 공공행사를 여는 공관(公館)으로 문을 열었다가 1967년부터 극장으로 활용됐다. 판교극장은 전형적인 근대식 극장의 외관이라 한눈에도 극장건물임을 알아볼 수 있는데, 서툰 솜씨긴 하지만 군데군데 영화 포스터를 붙여놓고 매표소까지 꾸며놓아 실감이 더하다.

극장 외벽에는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며 ‘맨발의 청춘’ ‘저 하늘에도 슬픔이’ 같은 흘러간 시절의 영화 포스터가 붙어 있다. 이런 영화들이 ‘만원사례’ 간판을 내걸던 시절의 극장은 어땠을까. 유명가수의 쇼프로 공연과 콩쿠르가 열리던 시절의 풍경은 또 어땠을까. 영화를 보러, 극장 쇼를 보러 미산, 옥산, 문산, 비인, 서면 등 인근 지역은 물론이고 멀게는 부여나 보령 사람들까지도 몰려들었다. 낡고 오래된 극장은 월남전 이후 TV가 보급되면서 문을 닫았다. 이후에 호신술이며 차력, 쌍절곤 따위를 가르치는 무술 도장이 됐다가 한때 가내수공업 공장으로 쓰이기도 했다는데, 지금은 그마저도 문을 닫은 지 십수 년이 됐다. 이젠 껍데기만 남은 텅 빈 건물이지만, 마을을 찾아온 여행자들은 그 앞에서 가장 오래 서 있다.

기능을 다 잃고 무너져가고 있는 허름한 시골 극장 앞에서 여행자들이 마주하게 되는 건 각자 자기의 추억이다. 낡고 오래된 공간을 여행한다는 건 그 오래된 공간에 자신의 과거 추억을 겹쳐보는 일과 다름없다. 풍경과 공간을 찾아왔지만, 실은 그곳에서 자신의 과거와 추억을 보게 되는 것이다. 바깥이 아니라 안을 보게 하는 것. 그게 낡고 오래된 것들이 가진 힘이다.


동일주조장. 3대에 걸쳐 술을 빚어오다가 지난 2000년 문을 닫은 양조장이다.



# 오래된 공간에 깃든 사소한 이야기들

장미사진관 동일주조장, 판교극장 말고도 현암리에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눈여겨볼 만한 건축물이 더 있다. 1930년대 문을 열었다는 삼화정미소는 목조건축물의 외관에서부터 시간의 깊이가 묻어난다. 오 씨 일가가 삼대에 걸쳐 운영해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는 ‘오방앗간’이라고 불리는데, ‘삼화(三和)’란 상호는 삼형제가 의좋게 운영하라는 아버지의 소망을 담아 지은 것이란다. 한창때 현암리에는 방앗간만 여섯 개나 있었다는데, 그중 오방앗간이 가장 장사가 잘 돼 명절이면 100명이 넘는 손님이 줄을 설 정도였다고 했다.

대한적십자사 사무실로 지어져 한때 예비군 동대본부로 사용됐던 구 적십자사건물도 등록문화재 중 하나다. 이 건물은 지역에 연고가 있는 보령제약 창업주 김승호 회장의 기부로 지어진 것. 건물이 지어진 게 1964년이니 올해 구순의 김 회장이 서른세 살 약관의 나이일 때다. 그해에 보령제약은 처음으로 약 ‘오렌지 아스피린’을 생산하고 도매상에서 제약사로 발돋움했으니 기업 입장에서도 기념비적인 건물이겠다. 건물 외벽에는 ‘김승호 사장’이름이 새겨진 판석을 박아놓았다. 건물 앞 시멘트 바닥에 흰 자갈돌로 박아 쓴 ‘멸공’이란 글자는 예비군 동대본부 시절 흔적이리라.

문화재로 지정된 것들뿐만 아니다. 시간의 더께가 문화재가 될 정도는 아니더라도, 현암리에는 추억을 떠올리기에는 모자람이 없는 공간이 마을 곳곳에 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폐업한 건강원과 촌닭집의 흔적이 나란히 붙어 있는 마을 안쪽의 가로로 긴 양철지붕의 목조 건물도 그렇고, 지금은 ‘판교특화음식촌’으로 탈바꿈한 옛 판교역 앞마당에서 마주 보고 있는 ‘판교역전슈퍼’와 ‘공영슈퍼’의 허름한 모습도 그렇다. 소박하다 못해 초라한 오일장이 서는 판교시장이나 옛 우시장 자리의 담벽에 그려진 장날 풍경 벽화도 아련하면서도 애잔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 고향보다 더 고향 같은 곳

옛 판교역 마당에 오래되지도, 잘생기지도 않은 소나무 한그루가 서 있다. 1930년대 마을 주민 ‘신봉균’과 ‘박동진’이 심은 것이다. 나무를 심은 이의 이름이 뚜렷한 건 그 아래로 사람을 불러모으던 나무의 존재감 때문이리라. 이 나무 아래서 광대와 약장수, 동동구리무(크림) 장수들이 기차를 기다리던 사람들을 불러모아 장사를 했다. 이 나무는 기차역 앞에서 일제강점기 강제 징용으로, 혹은 위안부로 끌려가는 이들을 봤을 것이고, 1970년대에는 꿈을 안고 무작정 도시로 떠났던 젊은이들의 뒷모습을 지켜봤을 것이었다.

제가 떠나온 고향이 아니더라도, 그리고 꼭 시골이 고향이 아니더라도, 옛 기차역 광장에서는 자연스럽게 고향을 떠올리게 된다. 판교마을은 진짜 고향보다 더 고향 같다. 떠나온 고향은 이제 상전벽해가 돼서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지만, 여기 판교마을에 사라지고 없는 고향 마을의 옛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다.

이 모습은 과연 언제까지 남아 있을까. 판교마을에서는 문화체육관광부 유휴공간문화재생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의 매입작업이 진행되고 있고, 마을 한쪽에 등록문화재의 내력과 옛 마을 풍경을 담은 사진을 전시하는 소박한 갤러리도 들어섰다. 문화재생사업이 이뤄지고 나면 이곳은 또 어떻게 변할까. 낡은 건물의 외피를 빌린 낭만적인 카페를 넘어, 고향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추억을 되새김할 수 있는 위로의 공간이 될 수 있을까.



■ 현암리 소문난 맛집

고소한 콩국수 ‘매력’… 시원한 냉면도 ‘별미’

기차역이 옮겨가고 도로가 비껴가면서 쇠퇴한 현암리에 아직도 꾸준하게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있는 건 음식점이다. 현암리에서 가장 이름난 식당은 1978년에 개업한 콩국수를 내는 ‘진미식당’(사진)이다. 마을은 고즈넉한데 식당 안에는 늘 손님들이 있다. 여름에는 동네 주민 수보다 더 많은 손님이 문 앞에 줄을 선다. 메뉴는 콩국수와 막국수, 콩전. 이게 전부다. 진한 콩물의 콩국수도 좋고, 누룽지처럼 구워낸 콩전의 고소한 맛도 좋다. 작년까지는 4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 딱 5개월만 하고 문을 닫았는데, 올해부터는 연중 문을 연다. 이제 언제 가도 콩국수 맛을 볼 수 있다.

현암리의 중국집 ‘동생춘’도 제법 이름이 알려진 곳이다. 팔순을 목전에 둔 60년 경력의 수타면 장인이 자그마치 49년째 한자리에서 운영하고 있는 중국집이다. 충남 예산의 중국집에서 수타 기술을 배워 현암리가 한창 경기가 좋던 시절에 이곳에서 개업했다. 자장면도, 볶음밥도 훌륭하다. 다만 이곳에서는 세 그릇 이상 주문이 있을 때만 면을 친다.

현암리는 냉면집으로도 유명하다. 진미식당 건너편에는 둘 다 ‘원조’의 간판을 높게 매단 ‘수정식당’과 ‘삼성냉면’이 마주 보고 있다. 두 곳 모두 도토리가루와 고구마 전분으로 면을 뽑아 냉면을 내는 집이다. 질긴 면발의 냉면인데 정통파 냉면이라기보다는 시장통 냉면 혹은 분식집 냉면 스타일에 가깝다.







■ 장항선 간이역 풍경

장항선 선로 직선화 사업으로 선로가 옮겨가면서 문을 닫은 간이역 주변에는 오래된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일찌감치 역으로의 기능을 상실한 채 버려져 있다가 쓸쓸하게 사라진 폐역도 있고, 역사(驛舍)가 사라진 뒤에도 녹슨 이정표와 자그마한 대합실만 남아 있는 곳도 있다. 주산역, 기동역, 삼산역, 오가역, 주교역, 간치역…. 옛 주산역에 있었다는, 지금은 문을 닫은 대폿집 ‘풍년옥’에 대한 마을 주민의 추억 한마디. “막걸리 몇 순배에 불콰하게 취해 기적이 울리면 그게 몇 시 차인지도 모르면서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곤 했어.”


※ 현암리 판교마을의 오래된 건물 그림은 문화체육관광부 유휴공간문화재생사업 진행 과정에서 우편엽서를 만들기 위해 그려진 것이다.

서천 =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게재 일자 : 2021년 12월 23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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