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웹 | 지면보기 PDF | 2022.1.20 목요일
북마리아나제도 연방의 수도 사이판에서 가장 인기 있는 명소 마나가하섬. 가라판 시내에서 배로 10여 분 거리에 있다.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와중이라 투명한 바다와 순백의 백사장이 있는 섬 전체가 텅 비어 있다시피 해 고즈넉하게 남국의 정취를 누릴 수 있다.


여행 마니아는 아닙니다. 출퇴근이 힘겹거나 일상이 온통 엉켜 있을 때 간혹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리는 정도라 했습니다.

그럼에도 코로나19로 발이 묶인 시간이 꽤 길게 느껴진다고 했습니다. 일상은 지겹고, 일은 뜻대로 안 되고,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에 가로막힌 여행이 금단의 열매처럼 자꾸 아른거리기만 했답니다. 도심이 아닌 자연의 풍경, 노동이 아닌 휴식의 시간, 고민·번민이 아닌 자기 위안과 위로가 필요하다고 느끼자 그는 결국 여행을 떠났습니다. 다음은 그렇게 감행한 그의 여행에 대한 기록입니다. 미국령 북마리아나제도의 사이판으로 떠난 트래블 버블 여행. 사이판은 지금 입국과 출국과정에서 격리 없이 여행할 수 있는 유일한 해외여행 지역입니다. 홀로 다녀온 그 여행을 통해 트래블 버블로 달라진 여행의 방식을 들여다봤습니다.


# 사이판으로 결정했어…그런데 괜찮나?

북마리아나제도 사이판은 한국과 ‘트래블 버블(여행안전권역)’ 협정을 체결·시행하고 있는 유일한 지역이다. 사이판이 트래블 버블 협정을 체결한 곳도 전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하다. 사이판까지 가는 국제선 항공편은 전 세계를 통틀어 사이판∼인천·부산 노선뿐이다. 사이판 공항에 뜨고 내리는 국제선 비행기가 모두 한국 국적 비행기라는 얘기다. 그러니 지금 사이판에는 한국인 말고는 다른 외국인이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팬데믹 시대에 사이판을 여행목적지로 고려하게 된 가장 큰 이유다. 

마리아나 관광청에 따르면 지난해 7월부터 시행된 트래블 버블 이후 사이판을 다녀간 한국인 관광객 수는 8000명에 이른다. 이달 들어 지난 10일부터 16일까지 일주일 사이에 사이판을 방문한 한국인은 약 220명이라고 한다. 팬데믹 이전이던 2019년 9월 한 달간 사이판 관광객 수가 1만9785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다. 트래블 버블로 관광객을 받아들이고 있다지만, 과거의 100분의 1 수준으로 관광객이 줄어들었으니 사이판이 겪는 경제적 고통은 말이 아니겠다. 여행자 입장에서는 거리두기가 저절로 유지되는 상황이다.

마리아나 관광청은 오는 2월까지 트래블 버블을 이용해 사이판을 방문하는 한국인 여행객에게 그동안 제공해오던 혜택을 유지한다. 혜택은 이렇다. 만에 하나 코로나19에 감염되면 치료비 전액을 관광청에서 부담한다. 여행자 1인당 100달러까지 쓸 수 있는 체크카드(트래블벅스)를 준다. 게다가 사이판은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건기에 해당해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날씨라는 점도 감안했다. 

이것보다 몇 배 더 매력적인 건 사이판을 여행하고 한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의무격리가 면제된다는 사실이다. 한국은 싱가포르와도 트래블 버블 협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오미크론 확산 우려로 싱가포르 정부는 싱가포르 출발·도착 국제선 항공권 판매를 중단하고 있는 상황. 그러니 사이판은 자가격리가 면제되는 유일한 지역인 셈이다. 직장인으로서 여행을 위해 휴가를 내는 것도 눈치가 보이는데, 여행 후의 자가격리로 출근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건 웬만한 ‘용자(勇者)’가 아닌 이상 상상조차 못 할 일. 그래서, 사이판이었다.


사이판의 다이빙 명소인 그루토. 동굴처럼 생긴 지형 아래에 빛이 스며들어 푸르게 빛나는 바다가 있다.



# 드디어 떠난다…그런데 뭘 준비하지?

사이판은 미국령이다. 지도를 보면 위치상 필리핀에서 가깝지만 사이판은 괌과 함께 북마리아나제도에 속한 미국 영토다. 사이판에 가기 위해서는 미국본토를 방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입국을 위한 전자여행허가(ESTA·Electronic System for Travel Authorization)를 신청, 발급받아야 한다. 온라인(esta.cbp.dhs.gov)으로 신청할 수 있고, 발급받는 데는 1인당 14달러의 비용이 든다.

다음으로 백신 접종증명서가 필요하다. 질병관리청 홈페이지에 접속해 영문증명서를 발급받으면 된다. 여기까지 서류가 준비됐다면 입국심사서류인 ‘출발 전 의무 신고서’를 온라인으로 작성하고, 트래블벅스(사이판 정부에서 발급하는 여행지원금·사이판 도착 이후 1인당 100달러를 체크카드로 받을 수 있다)를 역시 온라인으로 신청한다. 모든 신청서류는 종이로 출력해 출국할 때 지참해야 한다. 공항에 도착하면 직원들이 서류를 하나하나 체크한다. 그래도 워낙 승객 수가 적어 입국심사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가장 중요한 건 출국 하루 전에 받아야 하는 코로나19 신속항원검사다. 검사 방식은 유전자증폭(PCR) 검사와 유사한데, PCR 검사는 주로 대형병원에서 할 수 있고 검사결과가 나오는 데 최소 6시간이 소요되는 반면, 신속항원검사 결과는 의원급 의료기관에서도 하고 있는 데다 비용도 저렴하고 결과도 20분 안에 나온다. 영문 신속항원검사 음성 확인서까지 받았다면, 이제 짐만 싸면 된다.


사이판 북단의 만세절벽. 태평양전쟁 중 미국과의 전투에서 패한 일본 병사와 민간인이 미군의 투항권고와 설득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몸을 던졌다. ‘미국이 포로를 잔학하게 살해한다’는 등의 유언비어와 세뇌에 따른 일이었다.



 # 출국일…부산에서 출발해봤니?

오전 8시 비행기라 새벽부터 서둘렀다. 오전 5시 45분쯤 예약해둔 택시를 타고 부산 김해공항 출국장으로 가줄 것을 부탁한다. 그런데 택시기사가 국제선 출국장을 지나쳐 국내선 출국장으로 향했다. 코로나19 이후 국제선으로 가자는 경우는 거의 없어서 지나쳤다는 설명. 국제선 출국장으로 다시 돌아가 청사 안으로 들어섰다. 사이판으로 함께 떠날 사람들이 탑승 수속을 위해 줄을 서 있다. 지루했지만 달콤했던 기다림 끝에 수속을 마쳤다.

김해∼사이판 운항 비행기는 제주항공이다. 켄싱턴 호텔 사이판 등을 운영하는 MRI(미크로네시아 리조트 인코퍼레이션)사가 통째로 전세를 내서 운항하는 비행기다. 여행사가 아니라 호텔이 전세기를 운항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항공 운항편 중단으로 호텔 영업이 거의 불가능해지면서 나온 고육책이지만, 그만큼 사이판의 매력이 뛰어나고 모객에도 자신감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제주항공 전세기 운항은 마무리됐고, 오는 23일부터는 에어부산 전세기를 주 1회 운항한다. 

전세기여서 그럴까. 앞서 다녀온 태국 여행과는 달리 ‘눕코노미’는 보이지 않고 객석 대부분이 채워졌다. 해외여행으로는 비교적 짧은 4시간 남짓의 운항시간이어서인지는 몰라도 마스크를 쓰고 있는 것도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마아일체(마스크와 나는 한 몸)’의 경지를 체험했다.

오랜만의 비행기 냄새. 좌석은 배정 때 요청한 창가 좌석에 앉았다. 김해공항에서 출국하는 것은 처음이다. 비행기가 이륙한 뒤 잊지 못할 광경이 창밖으로 펼쳐진다. 한반도의 남쪽 땅 위에서 이륙한 비행기 밑으로 ‘낙동정맥’(백두대간의 태백산 줄기인 구봉산에서 부산시 다대포의 몰운대에 이르는 산줄기의 옛 이름)이 드러누워 있다. 갈색 산들이 울퉁불퉁, 불규칙한 선으로 이어져 있다. 바다 위로 진입하기 전 단 몇 분간만 허락한 모습이었지만 장관이었다. 혹시 김해공항에서 국제선을 탈 기회가 있다면 놓치지 말라고 권하고 싶다.




사이판 남부해안에 그림 같은 골프코스를 갖고 있는 코럴 오션 리조트의 수영장.




# 사이판의 바다…이젠 느껴볼까

드디어 도착했다. 입고 간 겨울옷부터 벗어 던졌다.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고 이젠 사이판을 호흡한다.

먼저 바다. 사이판의 최대 번화가인 가라판(지금은 과연 이곳이 번화가가 맞나 의심이 들 정도로 조용하다)에서 배를 타고 15분쯤 이동하면 북마리아나제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사이판 서쪽 해안의 작은 섬, 마나가하가 있다. 섬까지 가는 길에서는 바다색이 보석처럼 영롱하다. 새삼 놀라게 되는 건 파란색이 이렇게 다양한 채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마나가하는 둘레가 1.5㎞ 남짓한 작은 섬이다. 투명한 에메랄드색 바다 위에 사뿐히 내려앉은 듯한 섬의 선착장에 내린다.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진 마나가하는 자연을 보존하기 위해 방문객에게 환경세를 징수한다. 1인당 10달러를 내야 섬에 들어갈 수 있다. 여행사에 예약해 왕복 교통편 등을 포함, 반나절 투어로 다녀오는 게 보통이다. 이날 마나가하 투어에 참석한 건 한국인 스무 명이 채 안 된다. 마나가하에 다른 여행자는 없었으니 이들이 섬 전체를 통째로 전세 낸 셈이다. 작은 섬은 아름답고 조용하고 평화롭다. 팬데믹 이전에 섬 가득 관광객들로 북적였던 곳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먼바다 쪽의 산호초 군락이 파도를 막아줘서 섬 주위의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하다. 특히 선착장 쪽은 수심도 얕아 초보자들이 스노클링 하기에도 안성맞춤. 반대편은 수심이 좀 더 깊어 더욱 다양한 어종을 볼 수 있다. 구명조끼만 빌려서 간다면 수영 따위(?)는 못해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스노클링을 시작하자마자 모험담이 줄을 잇는다. 팔뚝만 한 물고기를 봤다는 이들도 있고, 물고기가 너무 커서 무서울 정도라는 이들도 있다. 몇 년 전 마나가하섬을 방문한 적이 있다는 이는 “그때 봤던 물고기보다 엄청 크다”고 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사람들이 많이 안 오니까 물고기들이 스트레스를 덜 받은 듯하다”는 것. 마나가하에서 커진 건 물고기만은 아닌 듯하다. 섬 안쪽 나무와 풀들이 잔뜩 우거져서 조금 과장하자면 밀림을 연상케 한다. 숲속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부서진 대포 등의 잔해가 남아 있어 아름다운 자연과 기묘한 대조를 이룬다.

숲에는 또 사이판 남쪽의 산호섬에 살다가 거대한 태풍으로 섬이 사라지자 부족을 이끌고 사이판으로 건너온 아그후르브 추장 동상이 있다. 사이판에 새로운 마을을 만들고 부족을 위해 헌신하다 죽은 추장이 “마나가하 섬에서 영원히 머물게 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는데, 그건 아마도 마나가하 섬이 아름다워서가 아니었을까. 산호초가 그득한 서태평양 위 섬나라 추장이 아름답다고 느꼈다면, 그곳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켄싱턴호텔 사이판의 한적한 프라이빗 비치에서 본 석양.



 # 해변 숙소에서 멍때리기…그래서 힐링

사이판에서는 남부 해안에 위치한 코럴 오션 리조트와 북부에 있는 켄싱턴호텔 사이판에서 머물렀다. 이곳의 모든 객실은 바다가 바라다보이는 ‘오션뷰’다. 이곳에서는 눈 돌리는 곳이 다 바다이니, 바다에 인색할 이유가 없다.  

코럴 오션 리조트는 골프 리조트에서 올 1월 웰니스 힐링을 내걸고 리노베이션해 재개장했다. 팬데믹 기간을 리조트 리뉴얼 기간으로 활용한 셈이다. 잘 관리된 골프장의 초록 잔디 너머로 푸른 바다가 출렁이고 그 너머에는 티니안 섬이 있다. 골프코스로 내려가 라운드하는 이들이 없는 틈을 타 그린 위를 걸어봤다. 차례차례 걷다가 경관이 가장 아름다운 7번 홀에 닿았다. 티샷 후 샤크 베이를 가로질러야만 온 그린 할 수 있는 이곳이 골프장의 시그니처 코스라고 한다. 바닷가 바로 옆에서 넓고 푹신한 잔디밭을 걷는 기분이 색다르다.

코럴 오션 리조트에서는 그냥 꼼짝도 하지 않고 침잠해 있고 싶어 객실에만 있어도 바다가 나를 찾아오는 느낌이다. 에메랄드빛 잔잔한 바다와 더 멀리 하얀 거품을 일렁이며 밀려오는 짙푸른 바다까지…. 그냥 발코니에 나가 바다를 바라보고만 있어도 한국에서의 우울·긴장·고민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 것 같다. 물론 사라지는 ‘것 같을 뿐’이지, 사라진다는 건 아니다. 잡념이 끼어들지 않은 상태로, 소위 ‘멍때리기’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어두워지면 파도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책장을 넘겨보는 것도 좋다. 한 줄, 한 장 넘기기가 힘들었던 한국에서의 독서와는 달리 집중이 잘 되는 시간이다.

사이판에서의 최고의 힐링은 일몰 풍경이다. 구름이 낀 날도 좋고, 쨍하게 맑은 날도 좋다. 날마다 다른 색깔을 뽐내니 매일 저녁, 노을을 기다리게 된다. 하늘에서 시작해 바다까지 붉은색으로 붓칠해가는 태양의 솜씨가 그저 감탄을 자아낸다. 잿빛 구름이 찬조 출연까지 하는 날의 낙조풍경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그야말로 힐링의 순간들이다.




마지막 사이판전투가 벌어졌던 공간에 세워진 한국인 위령평화탑.



 # 사이판에 새겨져 있는 한민족의 아픔…잊지 말자

태평양전쟁의 상처가 오롯이 남아 있는 곳이 사이판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가볼 곳이 사이판 북쪽 마피산 정상부근 일본군 최후사령부에서 남쪽으로 약 50m 떨어진 곳에 있는 ‘한국인 위령 평화탑’이다. 태평양전쟁 중 사이판 최후의 격전이 벌어졌던 ‘일본군최후사령부’는 천연동굴을 이용해 만든 요새. 미군에 맞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일본군 기지다. 최후사령부 주변에는 전쟁 당시의 녹슨 탱크와 야포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 곁에 세운 탑은 강제징병으로 사이판까지 끌려와 강제노역을 하거나 위안부로 있다가 전쟁 중 억울하게 희생당한 한국인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1981년 해외희생동포추념사업회 주도로 세운 것이다.

위령탑에는 5각 6층의 기단 위에 탑신이 얹혀 있고 꼭대기에는 비둘기 형상이 조각돼 있다. 비둘기가 향하고 있는 쪽이 한국 방향이다. 이건 좀 다른 얘기. 위령탑 건립기념비 뒷면 위쪽에는 1㎝ 깊이로 길쭉하게 파인 부분이 있다. 위령탑에는 건립을 위해 기부한 이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파낸 자리에는 천문학적 규모의 어음 사기사건으로 유명한 이철희·장영자 부부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단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만세 절벽. 1944년 7월 사이판 전투 중 미군의 투항권고와 설득에도 불구하고 전세를 되돌릴 수 없다고 판단한 일본군과 노인·부녀자 등 민간인들이 몸을 날려 자살했다는 80m 높이 절벽이다. 미군에게 잡히면 끔찍하게 살해된다는 유언비어에 속은 일본인들은 여기서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죽었다.

만세 절벽에서 뒤돌아보면 깎아지른 수직의 벼랑으로 솟구친 산이 있다. 그 벼랑이 자살 절벽이다. 이곳 역시 일본인들이 미군에 투항하지 않고 집단 자살한 곳이다. 그중에는 이곳까지 흘러들어온 수많은 조선인도 있었는데, 그들은 이곳에서 억지로 죽음을 강요당했다. 징병·징용·위안부의 멍에를 안고 죽음마저 강요당했던 그들을 우리는 어찌 잊을 수가 있을까. ‘수평선 해거름 지는 사이판에 가면/ 자살절벽 있다지 봉숭아 물든 조선처녀들/ 꽃잎처럼 몸 던진 자살절벽 있다지’(민병일 시 ‘사이판에 가면’ 중 일부). 그래서 시인은 사이판을 이렇게 처절하게 읊었나 보다.

사이판에 새겨져 있는 태평양전쟁의 상흔은 도처에 있다. 해발 474m로 사이판에서 가장 높은 타포차우산에도 그때의 기록이 표지판으로 세워져 있다. 일본군의 패전 기록과 미군의 승전 기록의 표지판이 나란하다. 미군 쪽 표지판에는 사진이 새겨져 있다. 사이판에 상륙한 미군과 2차대전 후에도 종전을 받아들이지 않고 게릴라전을 펼치던 일본군 지휘관 오바가 미군에 항복하는 순간을 기록한 사진도 있다.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하는 사진이었다. 이곳을 안내한 가이드 소상원 씨는 “‘태평양의 기적-폭스라 불렸던 남자’라는 제목의 영화를 보면 일본군 오바의 항복 과정을 자세하게 볼 수 있다”며 “태평양 전쟁 당시의 사이판을 이해하는 데는 영화 니컬러스 케이지 주연의 ‘윈드 토커’와 ‘USS인디애나 폴리스’를 보면 좋을 것”이라고 추천했다.




관광객은 없고 지역주민뿐이었던 가라판 시내의 벼룩시장.



# 사이판에서 얻은 뜻밖의 선물…희망

사이판 섬의 중앙에는 2차 대전 당시 사이판에 쏟아진 맹렬한 폭격을 피해 용케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산타 루데스 성당이 있다. 이전에는 원주민 토속신앙의 성지였지만, 주민 대부분이 가톨릭교로 개종하면서 지금은 주로 원주민들이 찾는 가톨릭 성지가 됐다. 성모상과 십자가를 감싸 안고 있는듯한 거대한 보리수나무의 위용이 대단하다. 원주민들은 성당이 포탄을 피할 수 있었던 것도 보리수나무의 신성한 가호로 믿고 있다고 한다.

사이판의 해안 도로 곁에는 대부분 초록색 잔디와 나무들이 자란다. 가로수 개념의 가꿔진 나무가 아니라 스스로 자라난 나무들이다. 차창 밖으로 나무들을 바라보는데 기이하게 자라는 나무가 자주 눈에 띈다. 굵은 나무 둥치가 쓰러진 위로 다시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형상이다. 지난 2018년 10월 사이판을 휩쓸고 지나갔던 초강력 태풍 ‘위투’의 위력에 쓰러졌던 나무들이다. 미처 치우지 못하고 방치된 나무 둥치에서 다시 가지가 자라나고 이파리가 매달린 것이다. 자연이 가진 치유의 힘에 경외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모습이다.

상처 위로 돋는 새살처럼, 쓰러진 둥치에서 자라난 나뭇가지에서 희망을 본다. 사이판은 태풍 피해가 다 복구되기도 전에 코로나19를 맞았다. 재앙 뒤에 더 큰 재앙이 덮친 셈이다. 그래도 태풍으로 쓰러진 둥치에서 다시 싹이 돋듯, 코로나19의 긴 터널의 끝도 이제 멀지 않았으리라. 태풍 피해를 스스로 극복해가고 있는 자연에서 희망을 본다.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던 건 앞으로의 상황이 점점 더 나아질 것이란 희망 섞인 기대와 함께 자연이 가진 치유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 타포차우의 십자가

북마리아나제도 사이판에서 가장 높은 산은 타포차우산이다. 이 산에 서면 사이판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 정상에는 하얀 예수상이 있고, 오른쪽 낮은 봉우리에는 낡은 나무 십자가가 있다. 해마다 부활절이면 원주민들이 산 밑에서부터 십자가를 지고 올라와 새로운 십자가를 언덕에 세운다고 한다. 예수가 골고다 언덕을 올랐을 때의 고통을 직접 재연함으로써 항상 예수와 함께한다는 마음을 다지는 듯하다.


사이판 = 글·사진 홍혜정 기자
게재 일자 : 2022년 1월 20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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