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웹 | 지면보기 PDF | 2022.4.7 목요일
바다를 끼고 달리는 전남 영광의 백수해안도로는 길 전체가 해넘이 조망대나 다름없다. 백수해안도로 노을 광장에 설치한 스카이워크 끝에 괭이갈매기를 형상화했다는 날개 모양의 조형물 뒤로 해가 붉게 지고 있다.


종교를 주제로 삼은 여행 이야기이지만, 믿음이 없이 따라와도 무관합니다. 유럽의 고색창연한 성당이나 내로라하는 이름난 절집을 신도들만 찾아가는 건 아니니까요. 믿음과 신앙으로 세운 종교 성지에서는, 성스러운 세상과 내가 사는 일상의 세상이 교유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종교인들에게 순례는 신앙 대상과의 합일을 기원하는 일이라면, 믿지 않는 이들에게 순례는 삶의 가치를 묻는 일에 다름 아닙니다.

4대 종교 유적지가 있는 전남 영광에서 여행 목적지로 익숙한 절집과 성당, 교회 말고, 다소 낯선 원불교의 성지를 둘러봤습니다. 그러고는 칠산 앞바다를 끼고 이어지는 백수 해안을 다른 눈높이에서 볼 수 있는 구수산 종주길을 걸었습니다. 곳곳이 기도처였다는 산속을 걸으며 질문을 생각했습니다. 종교가 추구하는 세상은 어떤 세상이고, 믿음으로 끝내 지키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팬데믹의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오면서 다들 세상의 값어치나 삶의 우선순위가 많이 바뀌었을 겁니다. 그 생각을 가다듬어 보는 데는 여행만 한 게 없습니다. 여행으로 생각을 정리한다면 종교와 걷기만 한 수단이 또 있겠습니까. 그래서 떠난 영광 이야기입니다.


# 원불교 성지 여행을 권하는 까닭

영광에는 원불교 성지(聖地)가 있다. 불교 최초 도래지와 기독교, 천주교 순교지와 함께 ‘4대 종교 유적지’란 이름으로 묶여 영광의 아홉 경치인 ‘영광 9경(景)’ 중에서 제2경으로 꼽히는 곳이다. 종교 성지 차원을 넘어 대중 관광지로 자리매김했다는 뜻이다. 영광의 제2경이 종교 유적지라면, 제1경은 백수해안도로다. 백수해안도로 얘기는 뒤에서 다시. 불교나 기독교, 천주교 얘기도 미뤄두고 낯선 원불교부터 찾아가 보자.

원불교를 ‘불교의 종파 중 하나’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지 않다. 원불교는 1916년 교조(敎祖)인 소태산 박중빈의 깨달음으로 시작된, 불교와는 다른 종교다. 깨달음을 얻을 당시 박중빈의 나이는 스물여섯. 출가한 적도 없고, 스님도 아니었다. 그러나 후에 그는 “발심한 동기로부터 도를 얻은 경로를 돌아본다면 과거 부처님의 행적과 말씀에 부합되는 바 많으므로 나의 연원(淵源)을 부처님에게 정한다”고 했다. 박중빈의 행적을 적은 원불교 경전인 대종경에 나오는 얘기다.

불교와 뭐가 같고, 뭐가 다르다는 것일까. 박대성 원불교 교정원 문화사회부 차장으로부터 도움말을 들었다. 박 차장은 ‘교무’다. 교무란 원불교의 종교지도자. 개신교로 치면 목사다. 박 교무는 “불교와 원불교를 기독교의 구교와 신교처럼 이해하면 쉽다”고 했다. 절대자의 위엄과 그에 대한 경배를 강조하는 전통적 종교에서 벗어나, 실리적이고 개혁적인 종교를 표방하는 게 원불교라는 얘기다. 이 비유가 적절한 듯하지만, 맞지 않는 부분도 있다. 그중 하나가 구교와 신교는 둘 다 기독교 안에 있지만, 원불교는 불교와는 서로 다른 종교라는 것이다.

원불교와 불교는 제법 많이 다르다. 교무는 스님과 달리 결혼을 하고 육식을 가리지 않는다. 외부인들이 느끼는 가장 큰 차이는 불상이 없다는 것. 절집에는 곳곳에 불상이 있지만, 원불교당에는 불상이 하나도 없다. 원불교에서는 인격 신을 모시지 않기 때문이다. 원불교는 부처님의 형태인 불상 대신, 부처님의 마음을 상징하는 동그라미 형상의 ‘일원상’을 모신다. 동그라미는 부처님의 깨달아 충만한 마음과 우주 만유의 본원을 뜻한다. 우주 만유 전체를 다 부처님으로 모시겠다는 의미다.

원불교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가 배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원불교는 유일신을 믿지 않으니 다른 종교와도 전혀 허물이 없다. 부처님도, 예수님도, 마호메트도 다 훌륭한 선각자라는 입장이다. 방법만 다를 뿐 모두 다 진리와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인정한다. 배타적이지 않으니 믿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위협하거나, 믿으면 무슨 기적이 이뤄진다고 유혹하지도 않는다. 그저 정신의 확장을 통해 물질의 지배를 벗어나자는 차분한 가르침이 있을 따름이다. 원불교 교당을 가보면 어쩐지 마음이 평안해지는 이유이자, 믿음과 관계없이 원불교 성지를 여행지로 권하는 까닭이다.


원불교의 교조 박중빈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전남 영암 길용마을의 대각지.


# 생명의 봄이 성지를 장엄하다

▲ 울창한 동백숲으로 둘러싸인 계단 위로 보이는 정자 칠산정. 시멘트로 지은 정자다.


영광의 원불교 영산성지는 교조 소태산 박중빈이 나고 자란 곳이자 깨달음을 얻은 곳이다. 그가 태어난 생가와 오르내리며 기도했던 산, 깨달음을 얻었던 곳을 비롯해 제자들과 함께 원불교의 토대를 닦았던 구수산 아래 길용리 일대의 분지가 모두 성지가 됐다.

영산성지에서 먼저 가봐야 할 곳은 1916년 5월 2일 이른 새벽에 박중빈이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다는 ‘대각터(大覺址)’. 일원상을 새겨 세운 일원탑과 함께 조선총독기념비를 깎아내고 만들었다는 만고일월(萬古日月)이라 새긴 대각기념비가 있다. 수행 정진 끝에 대각(大覺), 곧 큰 깨달음을 얻은 곳이니 여기야말로 원불교의 출발지점이라고 해도 될 듯하다.

영산성지의 중심은 1891년 박중빈이 태어난 생가다. 초가지붕에 툇마루를 놓은 단정한 네 칸 시골집이다. 본래 집은 6·25전쟁 통에 타버렸고, 지금 있는 생가는 1981년과 2019년, 두 번에 걸쳐 복원한 것이다. 앞마당이 운동장보다 넓다거나 소나무를 비롯한 근사한 나무들이 심어졌다는 것 말고는 생가는 소박하기 짝이 없다. 생가의 방 안에는 생전의 사진 한 장과 작은 상 위에 켜놓은 촛불 두 개, 기도할 때 쓰는 경종과 목탁이 전부. 허름한 생가는 생전의 당부에 따른 것이다. 박중빈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대들은 나의 역사나 경전을 만들 때 절대로 장엄(裝嚴·엄숙하고 위엄 있게 꾸밈)을 실상에 넘치게 하지 말라.” 장엄하지 말라 했지만 생가로 가는 길에는 매화와 산수유꽃이 활짝 피었고, 초지에는 광대나물이며, 현호색, 산자고 같은 야생화들이 융단처럼 깔렸다. 봄의 충만한 기운이 장엄한 셈이다.

종교는 보통 믿음의 징표로 신묘한 사건을 끌어들이고, 기도의 효능을 강조하며 기적을 주장한다. 종교의 힘으로 걷지 못하던 이가 일어서 걷고, 보지 못하던 이가 번쩍 눈을 떴다는 얘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원불교에는 그런 이적이 거의 없는데 딱 한 번의 사건이 있었다. 원불교에서 말하는 ‘백지혈인(白指血印)’의 기적이다.

기적의 내용인즉 이렇다. 박중빈이 구수산 일대 아홉 봉우리에서 기도를 올리던 제자를 불러모아 묻는다. “그대들이 죽어야만 정법회상(正法會上·진리의 바른 법)이 세상에 드러나 구원을 받게 된다면 조금도 여한 없이 죽을 수 있겠느냐.” 제자라고는 하지만 다들 동네 선후배 사이. 주저했을 법도 하건만 모두 목숨을 버리기에 동의했다. 자결하기로 정한 날이 다가오자 박중빈은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뜻의 ‘사무여한(死無餘恨)’이라 쓴 백지에 제자의 손도장을 받았다. 인주 없이 맨손으로 찍은 도장이 기도 도중 핏빛으로 변했다. 이게 바로 백지혈인의 기적이다.

이런 기적이 일어난 자리가 ‘구간도실(九間道室)’ 터다. 생가에서 가깝다. 구간도실은 ‘도를 공부하는 아홉 칸의 집’이라는 뜻. 건물은 신도들이 공동생활을 했던 자리로 옮겨 ‘영산전’이란 현판을 달았고, 건물을 옮겨간 빈터에 백지혈인의 기적이 여기서 있었다는 기념조형물을 세워놓았다. 생가를 지나서 구간도실까지 산책하며 생각해 본다. 그들에게 죽음까지 무릅쓰게 한 건 과연 무엇이었을까.

박 교무에게 “이 얘기를 믿느냐”고 물었다. 곧바로 “믿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유일한 증거는 백지혈인을 한 종이일 텐데 박중빈은 그걸 태워버렸다고 했다. 박 교무는 “그게 얼마나 다행이냐”고 했다. 만일 그걸 남겨놓았더라면 얼마나 많은 참칭과 논란이 있었겠냐는 설명이다.


박중빈의 첫 여성 제자가 살았다는 신성실.


# 삶과 수행이 하나의 걸음이라

‘소태산(少太山)’이란 박중빈의 호는 한자의 뜻이 아니라 발음으로 이해해야 한다. 소태산이란 ‘솥에 산’이란 발음에서 나왔다. ‘솥에 들어가야 산다’는 뜻이다. 그는 평소 ‘나는 만생(萬生)을 살리는 솥이 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가 말하는 솥이란 곧, 밥에 목숨을 걸고 사는 우리 공동체의 뿌리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리라.

박중빈이 전북 김제의 금산사에 머물 때의 일화 한 토막. 미륵전 옆에서 머물며 짚신을 삼던 그가 하루는 미륵대불에게 호통을 쳤단다. “만날 서 있기만 하고 불공만 받으면 되겠냐. 짚신을 신고 나가서 일을 해야 미륵이지.” 그는 늘 생활 속의 수행을 말했다. 깊은 산중이나 적막한 수도처가 아니라 제가 살고 있는 자리에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열심히 일하고 최선을 다해 생활하며 신앙과 수행을 해야 한다는 얘기다. 수도의 삶과 육신의 삶을 함께 온전히 완성해야 한다는 ‘영육쌍전(靈肉雙全)’의 정신이다.

이런 일화를 보면 박중빈이 도를 깨친 뒤 먼저 한 일이 ‘당장 먹고사는 일’이었던 건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그는 동네 사람들을 설득해 간척사업에 나섰다. 전쟁의 와중에 목탄 값이 폭등하자 구수산 골짜기의 숲을 죄다 사들여 1년 만에 10배의 이익을 거뒀는데, 이 돈에다 자신의 전 재산까지 모두 간척사업에 쏟아 넣었다. 그리고 1년 만에 2만6000여 평의 논을 만들었다. 종교와 기도가 아니라 피땀 흘린 노동으로 이룬 기적이었다.

그렇게 만든 농지가 ‘정관평(貞觀坪)’이다. ‘정관(貞觀)’이란 태평성대를 이룬 중국 당 태종의 연호를 가져다 지은 이름인데, 간척으로 만든 땅을 낙원으로 만들겠다는 의지가 새겨져 있다. 정관평 주변에는 연을 심어놓은 작은 연못이 있다. 연못에는 제법 운치 있는 정자도 있다.

박중빈과 제자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살던 영산성지의 작은 마을에는 영산선학대학을 비롯해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여러 건물이 있다. 얼마나 쓸고 닦았는지, 지은 지 100년 남짓의 건물들이 다 말갛게 세수한 듯하다. 인상적이었던 곳은 절집의 대웅전 격인 대각전. 1936년에 완공한 목조 건물인데 티끌 하나 없는 마루가 이렇게 정갈할 수 없다. 첫 여성 제자인 이원화가 살았다는 세 칸 집인 신성실은 굽은 나무로만 지어져 단정한 건물이 마치 녹아 흘러내리는 듯한 느낌이다.

영산선학대학 앞에는 고종 때 경복궁 후원, 그러니까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지어진 웅장한 한옥 융문당이 옮겨 세워졌다. 융문당은 왕이 과거를 주관하며 쓰던 건물이었는데, 일제강점기에 헐려 용산에 있던 일본 절의 부속건물이 됐다. 해방 직후 그걸 원불교가 사들여 서울교당 법당으로 사용하다가 지난 2007년 여기 영산성지로 옮겨왔다. 융문당과 함께 짝을 이뤘던 융무당도 이곳으로 옮겨져 마을박물관 건물로 쓰이고 있다.


구수산 능선을 타고 넘는 산길인 ‘칠산노을 치유숲길’ 위에서 내려다본 영광풍력단지와 그 너머 무안군 해제면, 신안군 지도 일대의 모습.


# 노을을 보는 가장 아름다운 길

이제 미뤄둔 영광의 백수해안도로 얘기. 영광 9경 중 제1경이 백수해안도로다. 영광이 첫손으로 꼽는 명소라는 얘기다. ‘백수’는 읍소재지 지명. 실업자를 뜻하는 ‘백수(白手)’는 아니다. 백수읍에 산봉우리가 100여 개를 헤아린다 해서 ‘흰 백(白)’ 자에 ‘산봉우리 수(岫)’ 자를 쓴다. 왜 ‘일백 백(百)’ 자가 아니고 ‘흰 백’ 자일까. 산봉우리가 일백 개에서 하나가 모자란 아흔아홉이라 해서 ‘일백 백’ 자에서 ‘한 일(一)’ 자의 획을 지워 ‘흰 백’ 자를 썼다는 이야기. 바다를 끼고 달리는 백수해안도로에 산봉우리의 이름을 담은 셈이다.

백수해안도로는 ‘진짜 도로’다.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일부러 바다 쪽으로 낸 해안도로가 아니란 얘기다. 백수해안도로는 부산 중구에서 경기 파주 문산읍까지 한반도 남서해안을 L자형으로 잇는 국내 최장 국도인 77호선 가운데 백수읍 길용마을에서 백암리 석구미마을까지 이어지는 16.8㎞ 구간을 말한다. 제주나 동해안에 해안도로는 흔하지만, 서해안에 이 정도로 긴 해안도로는 흔치 않다. 동해안이나 남해안과는 다른, 서해안 해안도로의 특징은 길 위에서 낙조의 장관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 백수해안도로는 도로 전 구간에서 노을을 감상할 수 있는 아름다운 길이다.

백수해안도로는 해마다 업그레이드되고 있다. 드라이브 명소이긴 하지만, 관광객들이 차에 탄 채로 해안 절경을 순식간에 지나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자, 도로 곳곳에 주차장을 덧대고 도로 아래 해안가에다 보행용 나무 덱을 놓고 전망대 등을 만들었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해안도로 중간쯤의 언덕에다 시멘트로 지은 정자 ‘칠산정’ 하나만 달랑 있었는데, 지금은 해안도로의 주차장만 8개에 달하고, 해안가 쪽으로 3.5㎞의 걷기 길인 ‘노을길’이 놓였다. 나무 덱으로 놓은 걷기 길을 따라 노을종(鐘)과 노을전시관, 스카이워크 등도 들어섰다. 최근 설치한 스카이워크에는 끝에다 갈매기 날개를 형상화한 괭이갈매기 포토존을 만들어 세웠다. 해 질 무렵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실루엣 기념사진을 남기기 딱 좋은 자리다.

근사한 카페도 백수해안도로의 정취에 한몫한다. 대표적인 곳이 ‘카페 보리’다. 낮게 지어진 노출 시멘트 건물의 카페는 통창 너머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특이한 건 바다와 카페 사이에 보리를 심었다는 것. 카페와 바다 사이의 초록으로 일렁이는 봄날의 청보리밭과 그 밭 한가운데 심은 두 그루 팽나무가 풍경을 더욱 다채롭게 한다. 아무리 바다 전망이 좋다고 해도, 그저 바다만 보고 있었다면 금세 지루해지지 않았을까.


낙조에 물든 노을전시관과 백수해안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 백수 해안을 보며 걷는 세 번째 길

백수 해안을 감상하는 길은 두 개였다. 하나는 차를 타고 달리는 백수해안도로이고, 다른 하나는 도로 옆이나 아래쪽 해안가에 나무 덱을 덧대 만든 걷는 길인 ‘노을길’이다. 바다를 끼고 유연한 곡선 길을 차로 달리는 드라이브 코스도 좋지만, 파도 소리와 새소리를 들으며 걷는 바다에 접한 길도 운치 만점이다.

찻길과 걷기 길 말고도 바다를 보며 가는 또 다른 길이 있다. 구수산 능선을 타고 걷는 산길이다. 해안선과 나란한 능선의 산줄기를 따라 이어지는 길에 붙여진 이름이 ‘칠산노을 치유숲길’이다. 구수산은 원불교 영산성지를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다. 앞서 말한 원불교 교조 소태산 박중빈의 아홉 제자가 봉우리마다 올라가 기도를 드렸다는 산이다.

숲길 등산로는 자동차 벤츠 마크처럼 생겼다. 들머리나 날머리가 되는 곳이 세 곳. 남쪽이 백수읍의 백수우체국 주차장이고, 동쪽이 영산성지의 삼밭재 입구, 북쪽이 정유재란 열부순절지다. 세 곳에서 출발한 길은 가장 높은 봉우리인 해발 376m의 봉화령에서 만난다. 봉화령이 해발고도가 가장 높지만, 이쪽의 산군은 해발 339m의 구수산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원불교와 얽힌 사연 때문에 구수산이 더 높고 커 보이는 것이리라.

구수산 일대는 최근 칠산노을 치유숲길을 조성하면서 대대적으로 등산로를 정비했다. 보통 백수우체국이나 영산성지의 삼밭재 쪽에서 올라서 봉화령을 거쳐 정유재란 열부순절지 쪽으로 내려오는 코스가 적당하다. 삼밭재 쪽에서 오르면 마당바위 등 원불교 성지를 두루 돌아볼 수 있지만, 백수우체국 쪽에서 오르는 길이 좀 더 수월한 편이다.

산에 올라서 내려다보면 바다가 높게 느껴진다. 수평선이 키를 넘는 느낌이다. 바다에 다가설수록, 그리고 고도를 낮출수록 수평선은 낮게 보이고, 멀어지고 높아질수록 수평선이 높게 느껴진다. 능선을 따라 숲길을 걸으면 나무둥치 사이로 보이는 바다가 마치 스크린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바다를 끼고 산길을 걷는 맛이 여기 있다.

능선을 따라가는 등산로에는 나무 덱으로 놓은 세 개의 전망대가 있다. 그중 봉화령에서 정유재란 열부순절지 쪽으로 내려오는 길에 전망대 두 개가 있는데, 전망대에 서면 칠산 앞바다와 송이도, 약수리 일대의 풍력발전단지, 그리고 그 너머로 신안의 섬들이 펼쳐진다. 평화로운 서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자리다.

칠산노을 치유숲길의 가장 큰 매력이라면 생각을 넉넉히 받아줄 정도로 길이 순하다는 것이다. 백수우체국에서 갓봉까지, 원불교 영산성지에서 구수산까지만 오르고 나면 그다음은 편안한 능선 길이 이어진다. 숲길에는 인적도 거의 없어 경관을 독차지할 수 있다. 게다가 지금 숲길에는 봄 야생화가 지천이다. 아직 피지는 않았지만, 이제 곧 등불처럼 환하게 꽃 피울 산벚나무도 곳곳에 있다. 느긋하게 걷는 이 길 위에서는 일상에서 품었던 생각을 굴리거나 다듬을 수 있다. 칠산 앞바다의 노을 풍경이 장엄하니 해질 때쯤을 겨냥해 간다면 더 좋겠다.


■ 원불교 대각개교절 축제

오는 28일은 원불교의 최대 명절 ‘대각개교절(大覺開敎節)’이다. ‘크게 깨달아 종교를 연 날’이란 뜻이다. 원불교 창시자인 소태산 박중빈이 오랜 수련 끝에 그날 깨달음을 얻었다. 원불교는 이날을 기준으로 원기(圓紀)를 계산한다. 원불교는 올해 대각개교절을 맞아 문화축제를 진행하고 있다. 온라인 축제는 지난 1일부터 한 달 예정으로 진행하고 있고, 오프라인 축제는 오는 22일부터 24일까지 사흘 동안 원불교 중앙총부가 있는 전북 익산시 신용동에서 개최한다.


영광 =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게재 일자 : 2022년 4월 7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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