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리시는 오는 23일 광개토대왕이 396년 수륙 양군으로 백제를 공격했던 아차산성 인근에 복제비를 세우는 제막식을 갖는다.
◆“광개토대왕릉비 서다” = 구리시의 대왕릉비 복제비는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현의 광개토대왕릉비를 실제로 옮겨다 놓은 듯 높이 6.39m, 너비 1.35∼2m로 완벽하게 재연됐다.
엄기용 구리시 광개토대왕릉비 복제비 추진단장은 이 복제비의 완성에 대해 ‘천운’이라고 했다. 2년 전 성분과 색깔이 중국의 원비와 일치하는 진귀한 100t짜리 청오석(靑烏石)을 충남 보령 산속에서 찾아내고, 국내 광개토대왕릉비에 정통한 학자와 명인이 공동작업을 하지 않았더라면 복제비는 만들어질 수 없었다는 것이다.
고증은 서영수 단국대 교수가 했고, 중요무형문화재 이재순 석장이 웅혼한 기상의 비신(碑身)을 깎았으며, 전홍규 한국금석문각자예술연구원장이 혼을 담아 비문을 새겨 넣었다.
서 교수는 “이번 복제비는 국내에 고구려 유적을 처음으로 완벽에 가깝게 복원해 낸 것이어서 역사적으로는 물론 학술적·교육적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무게 50t에 높이 6m가 넘는 복제비는 울퉁불퉁 굴곡이 크지만, 4개면을 통틀어 단 몇 ㎝의 오차도 허용치 않도록 정밀하게 깎였다. 또 국전 초대작가이자 서예가인 전 원장은 “청명본(한국), 수곡본(일본), 본조음 구장본(중국) 등 현존하는 탁본의 장점만을 살려 새로 탁본을 만들어 비문을 전각했다”면서 “지금 이 복제비와 원비 탁본을 떠놓으면 어느 전문가도 단 한 자(字)도 다름을 판별해 낼 수 없음을 자신한다”고 말했다. 전 원장은 일본이 1988년 대왕릉비 탁본전을 개최, 임나일본부설 등을 주장한 직후 줄곧 대왕릉비를 연구해 온 명인이다.
그는 지난 10개월 동안 하루 10시간씩 작업을 해 청오석에 모두 1775자를 새겨 넣었다.
◆“짝퉁 복제비를 고쳐라” = 현재 국내에는 광개토대왕릉비 복제비 또는 모형이 모두 6∼7개 존재한다. 이중 플라스틱 재질의 모형을 제외한 석비는 모두 3개. 건립위 위원 중 상당수는 특히 “식당과 개인화랑에 전시된 석비는 거꾸로 세워놨다 해도 따질 것이 없겠지만, 최소한 독립기념관의 석비는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비 형태는 물론 비문의 글씨 모양, 인위적으로 변색시킨 비신의 흔적까지 모두가 엉망이라는 것이다. 건립위 한 위원은 “독립기념관이 처음 복제비로 이름을 붙였다가 논란이 커지자 대왕릉비 모형으로 바꿔 불렀을 정도”라면서 “그러나 민족혼을 되새기는 상징적 장소에 엉터리 ‘짝퉁’ 복제비가 세워져 민족혼을 갉아먹고 있는 셈이니, 당장 수정해야 한다”고 했다.
또 다른 위원은 “(동북공정을 주장하는) 중국의 석공들이 드릴까지 동원해 비문을 새겼다”면서 “당장에 복제비를 파내야 한다”고 격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독립기념관측은 “(구리시 복제비와는 달리 독립기념관의 것은) 역사·학술적 자료 차원에서 만든 것이 아니다”면서 “학생들의 현장 교육용으로 만든 것이자, 민족기상을 높이는 계기로 삼자는 취지로 건립한 것”이라고 말했다.
◆“신묘년 기사(辛卯年 記事) 논란 종지부 찍어야” = 광개토대왕릉비 비문 중 이른바 ‘신묘년 기사’는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주요 근거로 삼는 등 논란이 수십년간 계속돼 왔다. ‘이왜이신묘년래도해파백잔○○신라이위신민(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이란 부분으로, 일본측은 1980년대 말 “일본이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 백제와 가야와 신라를 부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해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따라 구리시가 복제비를 건립하면서 이 부분을 어떻게 처리할지 관심이 모아졌었다.
서 교수는 신묘년 기사와 관련, “원비의 글자 형태를 그대로 따라 복제비를 만들었지만, 동시에 일본의 왜곡된 주장을 뒤집는 의미를 담았다”고 말했다. 즉, 대왕릉비 옆에 “백제와 신라는 옛 속민인데도 아직까지 조공을 바치지 않고, 왜(倭)는 신묘년(391년)부터 (바다를) 건너왔다. 그래서 ○은 백잔(신라)과 ○를 공파하고, 신라는 ○하여(복속시켜)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의 복제비 해설판을 세우기로 한 것이다.
전 원장은 이와 관련, “지난 수십년간 논문 수백편이 나와 신묘년 기사를 우려먹었다”면서 “그러나 태왕의 공덕비에 왜(일본)가 백제 등을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을 쓸 이유가 상식적으로 없다. 더 이상의 논란은 불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건립위 자문위원인 연민수 동북아역사재단 위원도 “신묘년 기사는 고구려가 전쟁 명분을 요약적으로 기술한 부분일 것”이라면서 “그러나 그 명분과 역사적 사실 여부는 별개며, 따라서 신묘년 기사는 임나일본부설 주장의 논리적 근거가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박수균기자 freewill@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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