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경기 일산의 한 요양원에서 휠체어에 앉아 있는 이애리수 여사.
지난 21일 경기 일산의 한 요양원에서 휠체어에 앉아 있는 이애리수 여사.
“가수 발설 안된다” 조건으로 결혼 슬하 2남 7녀… 白壽 앞두고 건강‘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가엽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왔노라.’ ‘황성옛터’는 한국인이 작사·작곡한 최초의 대중가요다. 망국(亡國)의 한을 표현한 ‘조선의 세레나데’이자 ‘항일가요 1호’로 꼽힌다. 일제 강점기 민족의 심금을 울렸던 노래 ‘황성옛터’를 부른 가수 이애리수(98) 여사가 생존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중 결혼과 함께 모습을 감췄던 이 여사는 경기 고양시 일산 백석마을의 한 요양원 아파트에서 평온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최근 이애리수 여사를 만난 정홍택 한국저작권단체연합회 이사장은 “거동이 불편해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백수(白壽)’에 가까운 나이지만 ‘어디 편찮으신 데는 없느냐’는 물음에 ‘괜찮다’고 또렷하게 답을 할 정도였다”고 밝혔다. 이 요양원 직원들도 “대화를 원활하게 할 정도는 아니지만 하루 세끼 죽을 깨끗이 비울 정도로 정정하다”고 전했다.

이애리수 여사의 본명은 이음전(李音全). 개성 출신의 막간가수였던 그는 18세 때인 1928년 전수린씨가 작곡하고 왕평씨가 가사를 쓴 ‘황성옛터’를 불러 일약 ‘국민가수’가 됐다. 1928년 가을 단성사 무대에 등장한 이 여사는 이 노래 후반부를 부르다 나라 잃은 설움에 복받쳐 울음을 참지 못했고, 노래는 중단됐다. 그가 목이 멘 상태로 노래를 계속하자 객석은 눈물바다가 됐다. 1932년 빅타레코드사에서 발매한 ‘황성옛터’ 음반은 무려 5만장이 팔렸다. 이 노래로 스타가 된 이애리수 여사는 22세 때 연희전문학교 재학생 배동필와과 열애를 했다.

정홍택 이사장은 “배씨 부친이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하자 이들은 파고다공원(탑골공원)에서 면도칼로 손목을 긋고 동반자살을 시도했다”며 “결국 배씨 가족들은 이 여사가 가수임을 절대로 얘기하지 않고 결혼식도 올리지 않는 조건으로 부부의 연을 허락했다. 이후 이 여사는 2남 7녀를 낳고 평범하게 살아왔다”고 밝혔다.

예진수기자 jinye@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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