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단 시즌 마무리作 ‘피고지고 피고지고’국립극단(예술감독 오태석)의 ‘피고지고 피고지고’(14~28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02-2280-4115)는 60대가 중심이 돼 만든 연극이다. 주인공 왕오는 69, 천축은 68, 국전이 67세다. 이를 연기하는 배우 이문수(60), 김재건(62), 오영수(65)씨도 모두 60대다. 극에서와 반대로 실제 나이는 국전역을 하는 오씨가 가장 많다. 연출자 강영걸씨 역시 65세다.

극작가 이만희(문화콘텐츠) 동국대 영상대학원 교수가 아직 이순(耳順)에 이르지 못한 54세이고 술집마담역의 여주인공 난타역의 계미경씨는 극중 배역과 비슷한 37세다.

1979년 등단한 이 교수는 ‘그것은 목탁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 ‘불 좀 꺼주세요’ ‘돼지와 오토바이’ 등 주옥 같은 작품과 영화 ‘와일드 카드’ ‘보리울의 여름’ ‘신기전’ 등을 쓴 예술성과 흥행성을 겸비한 작가. 그가 최고의 작품 가운데 하나로 꼽는 것이 바로 ‘피고지고…’다. ‘말맛을 가장 잘 아는 작가’ 가운데 한 명이 이 교수이고, ‘말맛을 가장 잘 살리는’ 연출가 중의 한 사람이 강씨다. 두 콤비의 작품은 각종 연극상을 휩쓰는 등 예술성은 물론 흥행불패의 신화까지 만들어냈다. 국립극단은 1993년 초연한 ‘피고지고…’를 2008년 시즌을 마무리하는 우수 레퍼토리로 선택했다.

초연 때와 달라진 것은 계씨뿐이다. 4일 국립극단 연습실에서 확인한 이 60대 배우들의 15년 앙상블의 내공은 대단했다.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진주처럼 옹골차게 영글어 빛나는 의미들이 알알이 가슴에 박히는 것 같다.

등장인물 왕오, 천축, 국전은 항상 꿈꾸지만 언제 한 번 활짝 피어 본 적이 없는 고달픈 인생들이다. 소매치기로 입봉한 왕오는 ‘무교동 불곰’이라는 덩치에 걸맞게 우직하다. 초등학교 교사까지 했지만 노름에 빠져 처자식을 잃고 밀수운반책을 하다가 형무소를 전전한 천축은 가장 ‘먹물’에 속한다. 사기꾼 출신인 국전은 ‘늙은 제비’를 연상시킨다. 이들은 신라시대에 지은 절 돈황사 뒤편에서 3년째 땅굴을 파고 있다.

“난 누굴 기다리는 게 제일 싫어. 밀수할 때도 매일 접선 접선 접선! 기다리는 게 일이었지. 저쪽 놈을 기다리노라면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올라. 일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이 자식이 배반한 것은 아닐까, 짜부가 낌새 챈 것은 아닐까…. 의심의 연속이지. 극도로 불안해져서 도망치고 싶고 나중엔 내가 먼저 배신해버리고 싶어진다고.” (왕오)

“대저 인생은 공수래공수거 아니던가. 백일홍이 피었다 진다 한들 어찌 세월을 탓할쏘냐. 이 몸 죽어 무소귀면 산천 또한 더불어 황천행 아니던가. 인간이 신선의 경지에 달하면 어찌 재물이 재물일쏜가. 어찌 권력이 권력일쏜가. 죄는 욕망을 좇음이요, 욕망은 무지를 좇음이니 욕망의 개꿈 속에 머물다 간 세월들이 못내 아쉽도다.”(천축)

“나 죽으면 화장해. 사람 많이 다니는 종로통에다 묻어줘. 남들 몰래. 죽게 되면 외로운 게 제일 싫다.”(국전)

일확천금을 꿈꾸며 2시간30분여 동안 계속되는 이들의 장광설은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 못지않다. ‘오랫동안 이리저리 헤매다니다가 내 이리 될 줄 알았지(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라는 버나드 쇼의 묘비명처럼 톡 쏘는 위트도 넘친다. 삶의 깊은 의미를 경쾌한 위트와 페이소스에 제대로 버무렸다.

이들을 상대로 한 난타는 보살행도 유혹적이다. 계씨는 상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인간에 대한 따뜻한 사랑이 넘치는 즐거운 에로티시즘을 선사, 끝없는 윤회의 수레바퀴를 돌며 피고지는 인연의 꽃을 멋지게 그려냈다.

강씨의 연출도 전에 없이 열기가 넘친다. 암으로 식도를 잘라내고, 폐로 전이돼 두 번이나 수술한 사람 같지 않다. 건강할 때는 의자에 앉아서 한참을 본 뒤 꼼꼼히 지적하는 스타일인데 이번에는 배우들의 옆에서 펄쩍펄쩍 뛰며 “옳지, 잘 한다” “강하게” “조금 꺾어” 등 추임새를 넣는다. 그는 “배우들이 실제로 배역과 비슷한 나이가 되면서 그만큼 깊어지고 부드러워졌다”며 “재공연할 때마다 이 교수와 조금씩 대본을 손봤는데 이번에 완결됐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세 배우들이 치는 대사가 잃어버린 우리말의 리듬을 완벽하게 살려내는 느낌”이라며 “이제 말이 노래가 됐다”고 감탄했다.

김승현기자 hyeon@munhwa.com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